[전자책] [BL] 죽은 친구가 흡혈귀가 되어 돌아왔다
나니에 / 더클북컴퍼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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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가 진심으로 참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잘생긴 얼굴에 서글픈 표정을 짓자 다른 사람보다 배나 안쓰러워 보였다. 죽었다 살아 돌아왔다는데 모진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사는 것도 힘든데,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건 얼마나 힘이 들까.

희주가 내 등 뒤에 있다. 석 달 전에 죽었다. 죽고 나서 되살아났다. 흡혈귀가 되었다. 내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나는 왜 내가 희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희주를 몰라야 정상이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자신 있게 ‘그’를, 타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말에 희주가 웃었다. 눈에 애교살이 접히고 뺨에 보조개가 잡혔다. 참으로 시원하면서도 예쁜 웃음이었다. 대체 저 집안은 하나 있는 아들을 어떻게 저렇게 잘생기도록 낳아 놓았을까.

나는 깊게 잠든 희주를 보며 생각했었다.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희주는 이렇게 해가 뜨면 잠들어 버리는 걸까.

같이 사는 게 불편하긴 해도 그가 완전히 죽어 버리는 건 싫었다. 병원에서 부고를 들었을 땐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실감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슬플 것 같았다. 어쨌든 희주는 내 친구였다.

사막에 폭우가 내린다. 혹은, 사막에 폭우가 내리는 꿈을 꾼다. 누군가는 사막에서 익사하고, 누군가는 설원에서 불에 타죽는다.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사랑으로 죽고,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증오로 재생한다.

희주는 먼 사막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내게 돌아온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흡혈귀로. 낮에는 비록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힘과, 예리한 감각과, 사람을 매혹하는 기술과,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돌아온 것이다.

괜찮지 않았다. 얼음송곳이 심장으로 들어가 사정없이 온몸을 훑고 다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괜찮던 다리까지도 쑤셔 왔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손을 땅을 짚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닥을 짚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얕게 구역질을 했다. 심장이 너무 아팠다. 사고로 시퍼렇게 멍이 든 심장과 폐를 아껴 써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엎드리고 싶었다. 엎드려서 심장에 압박을 가하면 좀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운이 좋다고 느끼지 않았다. 삶이 가늠할 수 없는 지옥이라고만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두려움을, 무서움을,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죽고 싶다는 말보다는 훨씬 소극적인 말이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능동적이라면 살고 싶지 않음은, 누군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다리는 말이었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 먼, 아득한 지하,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지식들, 지각, 멘틀, 핵 이런저런 것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발아래의 공간, 그곳에서 흘러든 신성하고도 아름답고, 또한 섬뜩한 목소리.

나도 흡혈귀가 되고 싶었다. 희주를 잡아먹기 위하여. 실은 흡혈귀가 된 희주가 24시간 언제나 외롭지 않게 지켜 주고 싶어서.
아, 그렇구나 나는.
희주를.

입술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부드럽고,
상상하던 것보다 차갑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와 인연을 맺으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었다. 나의 선조는 참으로 어리석거나 미친 사람이 분명했다.

누군가 내 심장에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두르고 희주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너를 위해 내 심장을 이렇게 꾸몄다고, 그러니 제발 봐 달라고. 나는 스스로 가슴을 갈라 그렇게 보여 줄 수 있었다.

한참 기능을 잃었던 내 머리는 희주에 관한 기억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혼란스러운 기억의 용광로가 식으면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뱀이 속삭인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되는지 꼭 보여 줄게.

"희주야, 나 입 맞춰 줘."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
나는 널 경멸해.
그러나 나는 희주에게 입맞춤을 조른다.
우리, 이 대화 없던 일로 하자.

가끔은 죽음의 세계가 가까웠다.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압도적인 세계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파열된 잿빛 뇌와 보랏빛 내장의 세계이다. 붉은 피와 새파란 창백함의 세상이다.

도시의 불빛은 강물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불빛이 만든 세계는 지상의 세계보다 훨씬 다채로우며 섬세하다. 바람에 따라 쉽게 일렁이고 깨어지지만 모든 것들이 대체로 그렇듯 수명이 짧은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우리는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아득했다. 아니, 모든 것이 멀었다. 가까운 것은 희주의 숨결뿐이었다. 조금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숨결이었다. 단지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뿐으로 희주를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숨 쉬고 있는데.

우리는 드뷔시의 월광을 들었다. 흔하고 자주 들리는 곡이니 이 곡을 들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이날 밤을 떠올리게 되리라. 달빛은 밝았고, 수면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어리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아득해지는, 고요한 세상.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흡혈귀가 앉아 손끝을 겹치는 밤.

나의 흡혈귀.
나는 오로지 나의 흡혈귀만을 걱정했다. 아무리 비가 온다지만 흡혈귀에게 햇볕은 너무 강했다. 태양은 비에도 지지 않았다. 물에 축축하게 젖어 빛이 바래 버렸더라도, 귀신에게도 흡혈귀에게도 공평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지.
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났지.
이러고 보니 어떻게 흡혈귀가 되는 걸까. 많은 책에서는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것만으로는 흡혈귀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흡혈귀의 피를 빨아야 진짜 흡혈귀로 탄생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제는 희주가 죽었다거나, 살아났다거나, 또 죽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 나는 희주와 입맞춤을 했고, 하는 중이었고 꼭 살아 있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동안은 입맞춤을 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모든 삶에서 나는 남겨진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 섬이 있다면 희주가 유일했다. 희주를 제외하면 나는 몸을 기댈 암초조차 없었다.

내 기억들이 한 군데로 뭉쳐 휘저어지고, 재배열된다. 나는 또 많은 것을 잊는다. 나는 판공초의 기억을 잊는다. 그때 내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를 잊는다. 높은 하늘을 날던 연과 그 연과 나란히 날아가던 새와, 그러니까 믿을 수 없이 높이 날던 그 새를 잊어버린다. 손을 뻗으면 바로 우주로 향하던 그 천공을 잊는다. 한강변을 잊어버린다. 달빛을 들으면, 그날의 강물이 생각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작고 섬세한 불빛들을 잊는다. 나의 흡혈귀와 손끝이 닿아 있던, 그 손끝이 유난히 뜨거웠음을 잊는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상태로 있어 주면 충분했다. 물론 되살아나면 좋고, 애초에 죽지 않으면 가장 좋았다.
나는 몸 안의 모든 의지력을 끌어올렸다. 내가 가끔은 바보긴 해도 여러 번 같은 수에 당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희주를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저 인생에 가느다란 선을 남긴, 친구로만 기억하게 되리라.

희주는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또 죽었다. 나는 살았고, 계속 살아 있다. 아마도 계속 살아 나가리라. 큰 이변이 없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도를 다하면서.
나는 무덤 옆에 눕는다. 부질없는 짓이다.

희주는 이 무덤 속에 없는데, 무덤으로 돌아올 가능성조차 없는데. 하지만 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무지갯빛으로 폭삭 내려앉았던 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꿈을, 그리하여, 희주가 다시 내 앞에 허기진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남는 것은 한 줌 재의 가벼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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