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의식한 순간 잔잔한 수면 위로 파문이 인 듯 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생소하고 어색하면서도 발아래가 붕 뜬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설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뭔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이상한 해방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세상에도, 타인과의 관계에도 미숙하고 서툴러 상대의 예상 밖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감정들을 얼굴과 눈빛으로 모두 드러내 보이는 아주 순수한 소년.
그 천진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역시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건 그냥, 우연이었고 실수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오늘의 멍청한 짓에 추가될 법한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 역시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충동적인 호기심으로 그 녀석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건 안 된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으로 그 녀석을 좇으며 그 남자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그 감정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근사한 성인 남자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그를 의식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안 된다. 어떤 의미로든 위험한 남자다.
자신의 본능이, 그리고 육감이라는 게 그렇게 이르고 있었다.
관심도 갖지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그와 함께 일순 멈춘 듯했던 시간과 공간이 갑자기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가 한 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결국 이 남자가 내 인생을 망칠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꿈꾸던 삶은 평범하고 조용한, 어느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을 완벽한 삶이었다. 대단한 성공을 하겠다는 야망 같은 건 없지만 보통의 아이들처럼, 아니 그 아이들보다 더 완벽한, 누가 봐도 잘 자랐다고 할 만한 인생을, 지금껏 꿈꿔 왔다.

모든 걸 내던져 버리더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충동에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꿈속의 그는 냉랭해 보이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현실의 그는 더없이 매섭고 차갑기만 하다.
꿈속의 그와 현실의 그 사이의 괴리에 문득, 만약 진짜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 만났다면 그의 태도도 조금은 달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겨우 세 번째의 만남에 그렇게까지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도 웃기지만 자신이 먼저 그를 따라갔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꿈속에서조차 자신은 재영이와 재원이를 버리고 이 남자를 선택했다.
그저 꿈일 뿐임에도,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묵직한 죄책감이 뱃속 깊이 내려앉았다.

그와 자신이 완전한 타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게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봤자 결국 그것들은 모두 가정일 뿐이다. 이미 엄마는 그 순간 선택을 했고 자신 역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다.

이제 와 과거의 선택을 바꿀 수도, 지금 이 현실을 되돌릴 수도 없다.

지금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지금 그에게 얼굴을 보이면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킬 것 같아, 싫다. 그라면 언뜻 비치는 찰나의 감정조차도 읽어 낼 것 같아서, 무섭다.

의식 아래 깊은 곳에 깔려 있는 희미한 감각의 기저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조금이라도 그걸 내비치고 싶지 않다.

아주 간혹, 사람은 순간의 충동과 착각으로 자기 무덤을 파기도 한다.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이젠 이 사람이 뭘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하고 자신이 맞춰 주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도 이 남자는 평생 변하지 않을 거다. 변해야 할 이유도 없고 변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이 질리지 않는 남자와 함께라면 이 세계의 끝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소원은 어떻게든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마 마지막 소원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자신에게 이 이상의 행복은 존재할 수 없기에 더할 수 없이 만족하고 있다.
다만, 단 한 가지 바라는 건…….

아니, 단순히 아름답고 화려하다는 감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형에 시선이 끌리지만, 그 뒤에는 불길하고 기괴한 그의 분위기에 절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아주 소극적인, 하지만 명확한 그 의사 표현에 잠시 멈칫한 그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본다. 조금 당황한 듯 그답지 않게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위로 이내 미소가 흐른다.

늘 바라 오던 건 이런 일상이었다.
평화롭고 잔잔하고, 누구나 누리고 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는 느긋한 보통의 일상.

자신은 크리스천도 아니고 소원 따위는 빌지 않으며 산타클로스 따위는 더더구나 믿지 않지만 만약 올해의 소원이 내년에 이루어진다면 매해 같은 소원을 빌고 싶었다.
다음 크리스마스 역시 그와 함께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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