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처적 체질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평점 :
가을이 깊어져서 그러나?...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즈음 부쩍 신파가 땡긴다. 뽕짝의 촌스럽고 단순한 리듬이 좋아지고, 노래가사의 사랑얘기도 절절해 진다.
어머니가 즐겨 보는 '가요무대'까지는 아니어도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도 챙겨보게 되고 일요일 점심무렵에는 '출발,비디오여행'을 봤었는데 요즘은 가끔 송해 형의 '전국노래자랑'도 보게 된다. 그러다 손에 쥔 시집, 감성폭발 류근 시인의 '상처적 체질'이다. 이 시집제목, 참 신파적이다. "상처적 체질"이라...알레르기 체질이니, '체질적이니~', '체질적으로~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상처적 체질?...아마 마음에 상처를 잘, 그리고 많이 받는 체질이란 뜻이겠지..이런 유리같고 비눗방울 같은 감성이야 어찌 이 시인을 뛰어넘을 수 있을 쏘냐.. 통속적인 감상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다.
류근 시인이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작사했다는 사실은 즐겨보던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사를 지은 류근 시인에게는 정말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터넷을 통해 알수 있었다.
류근 시인은 군 복무시절 사귀던 여자를 선배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전방GOP근무를 하면서 아침이면 매일 ‘오늘은 죽어야지’ 결심했다가 저녁노을이 밀려오면 ‘하루만 더 살아보자’ 마음 고쳐먹기를 몇 달이나 거듭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래서 나온 가사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신춘문예 등단이후 18년만에 나온 첫시집..'상처적 체질'
상처를 잘,그리고 많이 받는 체질의 이런 사람은 술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참 술을 좋아한다. 나 처럼 혼자서도 술을 잘 마신다. 시 '독작'은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아마도 혼자 술 마시면서 쓴 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운다.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28쪽,어떤 흐린 가을비] 이러한 깨달음은 쉽게 상처받는 자신의 체질에 대해 알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48쪽, 상처적 체질] 그리하여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114쪽, 반가사유]이렇게 독한사랑에 취해 살고 싶어 하다 서서히 '태초에 구멍이 있어 세상에 없는 힘.'[132쪽,구멍經]에 이르러 도인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이제는 모든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유와 관조. 그리고 달관..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이다.
너무 아픈 사랑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왠지, "주~운"하면서 도끼빗으로 앞머리 가르마를 탈 것같은 느끼함과 통속미가 느껴지지 않는가? 비록 제비짓?을 하며 모텔에서 하룻밤을 봉사하고, 뼈다귀 해장국에 소주잔을 털어넣으며, 그녀의 구구절절한 옛사랑 얘기를 들어주고는 택시비를 받아오는 삶..그런 삶을 산다고해서 그에게는 사랑이 없겠는가. 그가 사랑을 모르겠는가. 죽을 것 같은 사랑을 홀로 견뎌 이렇게나마 살아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이제는 '너무 아픈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는 너무 아픈사랑도, 너무 아름다운 사랑도, 너무 추한 사랑도, 너무 더러운 사랑도 없다. 그냥 사랑만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우리 모두의 삶을 견디는 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