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너리스 2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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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 나나흰 필독도서로 온 이 방대한 소설책 두 권을 최근 내내 읽었다. 이제는 서평 마감 기한이 다가와서 너무 피곤한데 독서를 미룰 수 없었다. 재미있는데 새학기라 차분히 책을 읽을 여유가 없어 아쉬웠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 작품 말고는 요즘은 소설을 굳이 찾아 읽지 않는데, 작년부터 큰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한다고 신간 소설을 읽을 기회가 꽤 있었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하지만 다 읽고 보니 사랑 이야기였다. 자신과 영혼까지 닮았기에 만나면 두 배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 사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작가가 정말 치밀하고 천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돌고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다. 무디가 크라운 호텔에 들어가 12명 비밀 대화에 끼게 된 점 부터 운명이었던 듯 전지적인 작가 계산 속에 들어 있었음을 2권 후반에 오면서 알 수 있었다. 무심코 읽었던 대화와 성격 묘사, 특히 작가가 '이 행동은 실수'였다고 짚어두었던 부분들이 법정 공방 장면에서 타이밍 절묘하게 쓰인다. 1권 첫 장면에서 무디가 크라운 호텔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이렇게 아귀 맞게 마무리되기 힘들었을 테다. 무디가 보여준 신중하고 치밀하게 변호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이야기 앞에서부터 뒤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언행을 신중하게 하는 그 모습이 말이다.

 

점성술과 별자리에 대해 잘 몰라서 읽는 내내 아쉬웠는데 만약 잘 아는 사람이 읽는다면 이야기가 더 풍성하게 느껴질 듯하다. 2권에서는 강령회(영혼을 불러 대화하는 의식), 점성술, 영혼에 대한 낭만적인 의견이 1권보다 좀 더 자주 등장한다는 느낌이다. 이 2권 내내 작가가 세심하게 인물 성격 묘사를 하고 있는데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다양한 성향은 누군가에게는 드러나고 누군가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을 모두 말하기와 진실 말하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전자는 사실 가능하지도 않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부분 읽을 때 그 주 주일 설교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대해 들었기에 아래 부분을 곱씹어 읽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 웰스 부인. 이렇게 공통점이 부족하다고 해서 우정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타당성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아요. 그것만큼은 확인을 했죠. 하지만 정반대의 질문을 하나 드릴까 해요. 살아 있는 영혼은 어떠한가요? 죽은 사람을 '알 수' 없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무디는 미소를 띤 채 그 질문을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 미망인이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무디 씨의 친구분인 개스코인 씨를 정말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스코인은 이 수사학적인 예시의 대상이 된 것에 굉장히 불만스러운 것 같았고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 미망인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서 두번째로 무디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디는 개스코인을 보았다. 사실 그는 알고 지낸 지난 3주 동안 개스코인의 성격을 굉장히 세세하게 분석했다. 그래서 이 남자의 지성의 범위와 한계, 성격적 특성, 수많은 표정과 습관의 경향을 안다고 생각했다. 전반적으로 이 남자의 성격을 굉장히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남의 영혼을 아는 데에 3주보다는 더 긴 시간의 고나찰이 필요한 법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211-212쪽.

 

특히 스테인스가 갖고 있는 몽상가적이면서 낭만적인 성향이 위기에 처했던 안나와 웰스를 구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스테인스가 엄청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이었거나, 치밀하게 계산하고 능력주의적인 성공을 노리는 사람이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테다. 모르는 타인 일에 개입하기도, 사랑을 알아보기도 어려웠을 테기 때문이다. 아래 묘사를 보면 스테인스야 말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의 타고난 명랑함은 절대로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딱히 도덕적인 기반을 갖고 있진 않았다. 대체로 그의 신념은 신중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었고, 친구를 고르는 데에도 딱히 까다롭지 않았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양한 성격과 상황, 관점과 만나봐야 하는 것이 의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낭만주의 시대를 좋아하고 숭고함의 특성에 대해서 질리지도 않고 떠들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조를, 혹은 다른 어떤 특정 사조를 엄격하게 따르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고 혼자 보낸 어린 시절 덕택에 에머리 스테인스는 어느 하나를 선호하지 않고 여러 가지 삶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543쪽.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서 선과 악은 분명했다. 뒤로 갈 수록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야기 초반에 그 악을 꽁꽁 잘 숨겨놓았다가 치밀한 계산 하에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악이 왜 악인지 설명해주기에 독자는 통쾌하게 독서를 마무리할 수 있다. 후반으로 갈 수록 작은 챕터들 분량이 점점 짤막짤막해졌고 설명이 듬성듬성한 부분이 있어서 궁금증이 생기는 지점이 몇 군데 있기는 했지만, 영상으로 만들어도 손색 없을 이 방대한 이야기를 쓴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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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둬도 돈 걱정 없는 인생 - 준비한 만큼 즐기는 퇴직금 사용설명서
송승용 지음, YoOSARU(유사루) 카툰 / 21세기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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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북스 서포터즈라 신간 신청할 기회가 있어서 받아보았다. 나야 이변이 없는 한 직장 생활한 날보다 할 날이 훨씬 많이 남았기에 노후 준비라는 단어가 아직은 멀게 느껴진다. 2006년 신규 발령 때 부장님들께서 '교직원 공제'는 최소한으로만 넣어라, 너희 세대는 공무원 연금을 많이 넣어도 어른 세대를 부양하느라 조금만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유리통장이라 기여금을 꼬박꼬박 떼여 적립 당하고 있다. 젊었을 때 들라던 이런 저런 보험이나 개인 연금을 넣고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내 보장자산들을 떠올리거나 통장을 꺼내 정리하면서 금리나 이자를 확인하게 된다는 점이 이 독서가 주는 장점이었다.  

 

저성장 고령화 시대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하는 시기다. 책은 교육계 사교육 업체 마냥 퇴직 시기를 맞은 독자가 가졌을 법한 마음 속 불안감을 구체화 시켜준다. 처방은 꽤나 안정적이다. 최근에 읽은 "3년 후 한국은 없다"와는 달리 이 책에 대한 이미지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경제 상식을 잘은 모르지만 저자는 대기업 입장에서가 아니라 일반 월급쟁이들이 노후를 마음 편히 보낼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후 자금은 중간에 빼서 쓸 수 없도록 묶어두기, 미리 준비하기, 노후에 안정적으로 월급처럼 받을 수 있는 일정한 생활비를 확보하기, 월급을 받을 때 조금씩이라도 쪼개서 여러 연금 상품에 가입해두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국민연금을 좀 더 유용하게 활용하는 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어떤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지 잘 모를 때에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이력을 살펴보면 도움이 되는데, "한겨레"와 함께 '금융소비자 주권 찾기 캠페인'을 진행했다는 이력이 저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금융상품이 숨기고 싶은 비밀'을 전문가 입장에서 일반인에게 꾸준히 드러내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전업주부인 엄마가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우편물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잠깐 일을 하다가 그만둔 후 넣지 않고 있었던 연금을 납부하면 곧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더해 저자가 제시하는 아래와 같이 일반인으로서 잘 알 수 없었던 스킬들을 잘 활용한다면 (오래 살 수록 유리하다는 가정 하에) 월 수령액을 늘릴 수 있다. 평소 국민연금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 불신감만 가지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소득 적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유리한 구조를 확인하면서 국민연금이 안정적으로 잘만 운용된다면 그나마 소득재분배에 도움을 주는 제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면서 겉으로만 설득하는 근거가 아니라면, 이론적으로는 다소 납득이 되는 제도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여전히 잘은 모르겠지만. 공적 자금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믿고 성실하게 국민연금을 납부해 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 그만큼 소득이 적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점을 기억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신하고 내지 않으려는 꼼수를 쓰기 시작하면 재정 자체가 불안정해질 위험은 여전히 있다. 어쨌거나 지금 생활할 만하니 국민연금은 최대한 늦게 받는 편이 유리하다(오래 살 수 있도록 건강 관리 잘 하면서...)고 엄마에게 말해주어야겠다. 국민연금 재정이 부족해서 일부러 제도를 이렇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연금을 빨리 받으면 조금 주고 늦게 받으면 많이 주는 식으로 말이다.

 

 "국민연금 많이 받는 방법

 

가입기간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더 내면 더 받는 구조다...

가령 국민연금 보혐료의 납부 총액이 같다면 가입기간이 길수록 연금수령액이 많아진다. 똑같은 금액의 보혐료를 냈더라도 A씨는 20만 원씩 10년간 국민연금에 가입했고 B씨는 10만 원씩 20년간 가입했다면 오래 가입한 B씨의 연금수령액이 많다는 의미다. 이는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물가상승률이 반영된 재평가율이 적용돼 연금수령액이 증가하는 효과와 둘째, 소득이 적은 계층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 때문이다. 첫째 이유를 부연 설명하지만 가입 연도별 가입자들의 평균소득과 본인의 소득이 감안된 금액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재평가율이 적용돼 연금수령액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소득이 적어서 연금보험료를 적게 내는 사람은 소득이 많은 사람보다 낸 돈 대비 받는 배율이 더 높다. A씨와 B씨는 낸 총액은 같지만 월 20만 원씩 짧게 낸 A씨보다 월 10만 원씩 길게 낸 B씨가 소득재분배 기능의 덕을 많이 보게 된다." 201쪽.

 

 "국민연금이 노후에 큰돈도 안 된다느니, 조만간 고갈이 된다느니, 정부를 어떻게 믿느냐는 등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에 가입하느니 차라리 내가 그 돈을 굴려서 노후 준비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남에게 맡기느니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제대로 준비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재테크 하다 날리고, 먹고 마시고 놀러 가는 데 쓰다가 통장잔고는 비게 된다." 314쪽.

 

특히 꾸준히 저축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를 납득했다. 금리가 낮아졌으니 이자로 혜택 보겠다는 목적은 아니지만, 조금씩이라도 저축해서 목돈을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저축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특히 매달 새어나가는 돈을 아껴서 의지를 가지고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매일 마시는 프랜차이즈 커피가 사례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금리 2%일 때 1000만원을 예금으로 묶어두면 이자가 20만원 쯤 붙을 텐데, 한달에 커피 몇 잔 아낀 돈으로 저축을 해도 그만큼을 모을 수 있으니 1000만원을 가지고 돈을 굴린 행동과 같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납득했다고 해서 내가 지금 커피 사먹기를 참게 될 듯하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주장임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노후 자금이 많이 남아 있게 되면 이득이다. 

 

각 장 앞부분에 흥미로운 카툰을 통해 퇴직 즈음에 맞을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저자가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문체로 그러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서 생생하게 와 닿았다. 권고사직에 따라오는 위로금 보관법과 활용법, 퇴직 이후 삶을 준비하는 다양한 방법(자영업 준비하는 법, 취미 생활 갖기나 가족 관계 잘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 심지어 귀농과 귀촌에 대한 이야기까지), 여러 요인과 심지어 자녀들로부터 자신의 노후 자금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과 방법까지. 코앞에 노후가 닥친 독자들에게 유용할 꿀팁이 가득한 실용서이다. 30대인 나보다는 엄마, 아빠에게 좀 더 권하고 싶은 책인데 우리 같은 젊은이들도 미리 알고 준비해도 나쁘지 않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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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리스 1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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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산북스 나나흰에서 보내준 신간은 2권으로 구성한 긴 소설이다. 금광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이 범죄에 휘말리는 내용이다. 플롯을 엄청 복잡하게 꼬아놓았기 때문에 2권까지 다 읽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범인을 추측하거나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하기가 어렵다. 꽤나 오래 들고 읽어왔는데 막상 서평은 짧게 써진다. 아마도 대하소설류나 머리를 써야하는 범죄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싶다.

 

방대한 분량, 번역(번역이 나쁘지는 않은데, 나는 외국 사람과 이미지를 연관지어 외우는 일 자체가 어려웠음), 여러 등장인물이 나온다는 점 등을 이유로 초반 독서는 좀 헤맸다. 다른 나나흰 분들 말씀처럼 중후반으로 갈 수록 이야기 힘에 빠져들어 범인을 궁금해하면서 독서에 속도를 붙일 수 있었다. 이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매력은 '별자리'를 이야기 풀어가는 소재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별자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작가가 별자리와 성격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겠다. 크라운 호텔에 모인 13명과 거기에 없었지만 이 사건에 연관된 여러 명을 합치면 꽤나 많은 인원이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들의 성격을 많은 분량을 들여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에도 배경이나 인물 묘사를 너무 자세하게 한 부분을 읽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루미너리스"에서는 작가가 성격 묘사를 세밀하게 하기를 의도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아무튼 치밀한 플롯과 성격 묘사가 대단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만나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잘 만든 미드 대본 같다. 이들의 성격이 별자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2권까지 읽어보아야 알 수 있겠다.

 

요즘 사람 마음 속에 있는 각기 다양한 기준, 권력자가 그 기준을 가지고 사회 내부에서 작동하는 힘들을 조종하며 약자를 세밀하게 통치했을 때 어떤 악영향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생뚱맞게도 아래 내용에 꽂혔다. 나라 차원에서도 마찬가지고 작은 조직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약자를 지켜주리라 믿었던 법이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시시때때로 확인할 때 당사자는 훨씬 크게 분노한다. 금을 둘러싼 욕망, 이 마을 남성들 사이에서 공공재로 여겨졌던 안나에 대한 욕망들은 어떠한 힘이 되어 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인다. 이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마무리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2권까지 끝까지 즐기며 읽을 수밖에 없겠다.

  

"교도소장이 자세나 말투를 바꾸지도 않고서 즉시 말을 시작했다.

"두 가지 법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 사람은 언제나 하나를 갖고서 다른 것을 비난하게 마련이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창녀를 치안판사 재판소에 고발하는 것이 올바르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쳐봅시다. 법이 자신의 일을 잘 처리해줄 거라고 생각하고서 말이오. 하지만 고발은 기각되고 오히려 여자를 샀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이자는 법률과 여자를 모두 비난하겠지. 법이 이자가 응당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손으로 법을 집행하기로 하고 여자를 목 졸라 죽이게 되는 거요. 예전 같으면 다툼을 그 자리에서 주먹으로 해결했겠지. 그게 광부의 법이었으니까. 창녀가 죽을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자기 손으로 해치웠을 거요. 하지만 이제는 법적인 조처를 요구할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하고서, 바로 그 부분에 반응을 하는 거요. 두 배로 화를 내고, 그 분노를 두 배로 휘두르지. 나는 이러한 본보기를 매일같이 보고 있소."" 199쪽.

 

또 하나 재미있었던 지점은 주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광둥어를 사용하는 아퀴와 아숙은 서로 의사소통은 능숙하지만, 주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크라운 호텔에서 열린 비밀 회의나 일상 속 중요한 상황 파악에 미숙하다. 마오리 족인 타우웨어(= 뉴질랜드에게 땅을 빼앗긴 종족)가 의도를 가지고 꾸준히 보이는 언행은 좀 더 흥미롭다. 줄곧 뉴질랜드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행동하려하고 그들이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만큼 자신도 마오리어를 당당히 사용한다. 타우웨어가 은둔자에게 평소 마오리어를 가르쳐주었던 점, 선교사들이 성경을 마오리어로 번역(마오리 현지화 해서 의역)한 점에 대해 데블린 목사가 생각해보는 지점들을 작가는 세심하게 적고 있다. 작가는 일부러 대화 속에서 다양한 언어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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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한국은 없다 -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한민국 민낯 보고서
공병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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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십일 서포터즈여서 잘 모르고 신청해서 받아보았다. 서평을 써야하기에 꾸역꾸역 다 읽었는데 내용이 어렵지 않음에도 저자와 나의 정치적 성향이 전혀 달라 매우 화나고 고통스러운 독서였다. 구매해서 쓰는 서평이라면 훨씬 솔직하게 혹평하고 싶은데, 아무튼 수위 조절을 해가며 정리해야겠다.

 

저자 공병호를 잘 몰랐다. 그저 책 많이 읽고 자기계발서를 많이 출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큰 출판사에서 그의 책을 출간할 때마다 저돌적인 마케팅 때문인지 읽기 쉽기 때문인지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많은 블로그 친구들이 읽고 있었기에 저자 이름만큼은 익숙했다. 그러나 힘겨웠던 이 독서 이후 그의 책을 자발적으로 다시 찾아 읽을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책이나 매체에서건 sns에서건 자기와 맞는 사람 이야기만 골라 듣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의지를 내어 다른 목소리를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끝까지 읽어냈지만 역시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만 두고 말하자면 한국 우파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저자가 시장 중심 자유지상주의적 개혁을 설파하는 내용이다.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독자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언어를 골라가며 쓴 책인데, 거기 숨어 있는 나쁜 가치관을 엿보고 있으려니 화가 났다. 나와 저자 모두의 문제는 읽고 싶은 내용을 읽고 싶은 대로 읽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의 생각만 보고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더 공고히 해나가는 지점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안상훈 교수(서울대 복지학과)는 노년층의 증가가 가져올 또 하나의 큰 변화를 엄중하게 경고한다. 노년층의 증가가 정치 지형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령화 하면 경제적 부양 문제부터 떠올리지만, 이는 나라의 정치 지형을 바꾼다는 면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복병이다. 노인들은 대체로 복지국가의 개혁 과정에서 꼭 필요한 변화에도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장덕진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장기적으로 더욱 우울한 전망을 내린다. "장기적으로 젊은 층이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양률이 100%에 육박하는 사회가 되면 이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민을 포함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세대 갈등은 세대 전쟁이 될 것이고, 정책 수단은 무력화될 것이다. 잊우화, 고령화, 민주주의의 문제, 그것들의 상호 억제가 향후 한국사회의 중층적 난제인 이유다."(안상훈 외 4인, "복지 정치의 두 얼굴", 21세기북스)" 123-124쪽.

 

 

책은 비관론자가 되지 말라며 마무리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망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경영 전문가가 풍부한 데이터를 가공하고 전문 용어를 사용해가며 한국에 닥친 위기를 보여주고 있고 일정 부분 일리가 있는 분석도 있을 테다. 그러나 현상을 비슷하게 분석한다 하더라도 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대안은 매우 상반될 수 있다. 저자는 일리 있어보이는 주장에 자기 편 가치관에 입각한 대안을 제시한다. 1. 한국 구석 구석에 비효율과 부패가 만연해 있어 국채가 늘었고 저성장시대가 닥쳤으니 그대로 두면 망한다-> 규제를 최대한 철폐하고 기업에 최대한 자유를 주어 경제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도록 하자, 최대한 작은 정부를 만들어 복지를 줄이고 시장 경쟁에 맡기자. 개발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개발하자. 2. 고령화 시대가 왔다-> 환경 보호, 인구 증가 우려 등의 이유로 묶여 있던 지역 개발 규제를 최대한 풀고 일부를 임대 주택 등으로 풀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자. 3. 중국이 이미 치고 올라왔다-> 서비스업을 육성한다고 제조업을 등한시하지 말자, 우리가 원래 잘하던 제조업을 보호해야 한다. 등등.

 

그러나 세계에 '저성장시대' 현실은 이미 와 있다. 근현대에 고공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필요하지도 않은 부분에 대한 개발+ 자본주의적 소비에 의한 낭비+ 전쟁+  금융권이 만들어낸 거품 같은 부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쁘고 불필요했던 소비를 줄이면 전과 같은 성장은 멈춘다. 저자가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좌파? 지식인, 민중주의?를 부추기는 정치인, 일부 불만 많은 강성? 시민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이미 온 현실에 맞는 대안은 오히려 기본적인 생존이 불안하지 않도록 빈부격차를 줄이고 복지를 보장하는 일이다. 일반인 증세 혹은 부자 증세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경제적 약자가 적어도 굶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복지를 요구하는 시민을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민중주의자'('민중'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쓰는 방식도 마땅치 않다)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가 결혼과 출산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고 이민을 꿈꾸는 이유는 이 나라의 불안정한 복지 그 자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빈부격차를 줄이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복지 제도를 갖추는 일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나도 개신교인이지만 저자가 청교도 정신을 가져와 개발, 성공, 번영을 강조하는 면이 부끄럽고 불편하다. 요즘 너무나도 미국적인 그러한 주장을 한국교회 안에서도 다시 성찰해보며 자정하려고 노력하는 움직임이 있다(옥성호 저자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복음과 상황"에서 다루는 논의들...). 내가 번영하면 누군가는 고통에 빠질 수 있는 경쟁 시스템은 성경적이지 않다. 저자가 구약 성경을 다시 읽어보았으면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배려하라고 요청했는지. 책,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http://blog.yes24.com/document/8408854

 

"반면에 공공부문과 공공기관이 팽창하는 데에는 강력한 동인이 있다... 예를 들어, 일반 국민들은 저렴한 전기료와 물값 등으로 이익을 누릴 수 있다면 그 부담은 다음 세대로 넘길 수 있기 때문에 관련 공공기관의 조직 축소를 요구할 이유가 없다. 결국 경제주체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공공기관의 팽창을 제어해야 할 동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 183쪽.

 

작은 정부, 민영화를 염두에 둔 주장이어보인다. 공공기관에 부패와 소모적인 관행이 있다면 투명하게 혁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사례로 든 전기료와 물값 같은 지점에 대한 대안이 결국 민영화에 있는지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다큐멘터리 "블랙딜"을 보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공재를 민영화하면서 오히려 부패가 심해지고 사적 이득을 취하는 일이 많아져 시민은 시민대로 형편 없는 서비스를 비싸게 이용하고 나라 차원의 소모는 더 심해지며 심지어 안전까지 위협 받는 사례가 많다. 다시 한 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처럼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되는 분야는 분명히 있다고 말하고 싶다. 공공기관은 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일본과의 껄끄러운 과거사 문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역사관 차이를 볼 때 가까운 장래에 깔끔하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절대로 그 선까지 사죄를 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일본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거듭 사과를 요구해봐야 서로 얼굴 붉히는 일만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고 일본도 양보를 하는 선에서 타협을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시원한 선택이 아니긴 하지만 이처럼 냉랭한 관계로 한일관계를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은 일본을 대함에 있어서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 더 이상 과거에 뒷덜미를 잡혀 있어선 안 된다. 자꾸 과거를 보자고 촉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 사회가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살아 있는 사람 또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254-255쪽.

 

또한 저자는 역사에 대해 소모적으로 옳고 그름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타협을 하라'고 책에서 여러 차례 주장을 하고 있다. 저자의 책을 즐겨 읽는 독자가 그러한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 대한 민족사관을 비판하며 일본이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부패나 계급주의를 청산했지 우리 민족 스스로는 불가능했으리라고 주장한다(동학농민운동은?? 이들이 바로 계급을 타파하고자 했던 우리 역사 주인인 '민중'이었다). 책 말미 '민족성'에 대한 이야기 또한 불편했다. 국가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에 저자는 사사건건 분노하고 불만을 표출해서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고 '국'익을 위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분노하고 분열하는 건 한국인의 나쁜 민족성 때문이라고 일반화한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저자가 책에서 섣부르게도 교육을 다루고 있어서 그 부분만큼은 특별히 화를 내면서 읽었다. 마이클 센델과 같은 공화주의자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같은 책에서 시장에 자유롭게 맡겨서는 안 될 분야 중 하나로 교육을 들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참사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규제 철폐나 메르스 사태를 불러왔을지 모르는 의료 민영화와 함께, 공교육을 의무로 보장하면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야할지 정하는 지점에 있어서는 시장에 맡길 수 없다. 어떤 착한 가치를 추구하며 교육을 혁신해나갈까 고민하는 시대에 저자가 아직도 mb 정권 때의 영어몰입교육에 찬사를 보내며 '수월성' 교육을 주장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어서 놀랐다. 세계가 미국발 경제 불황을 겪으며 이제는 경제 분야에 대해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절감하고 사민주의적인 복지를 추구하는 시대에 아직도 매우 근대적이게도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는 경제경영 전문가는 역시나 교육에서도 똑똑한 몇 명만 잘 키우는 교육을 하자고 주장한다.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도 명확히 밝히지 않는 창의성 교육을 말하면서 외국어를 잘 가르치고 '불필요한 과목은 최대한 없애자'고 주장한다(mb 정부 이주호 장관 하에서 실패한 정책 집중이수제!!). 학교에 오라고 했으면 모두에게 밥을 주는 일은 당연한데, 즉 의무교육에서 의무급식을 하기란 당연한데 선별적 복지가 아니어서 불필요한 비용이 낭비되고 있다고 한다. '일부 정치인이 현찰을 나눠주며 인기에 영합한다'와 같은 표현이 매우 불편했다. 공교육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십분 양보하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내 상식으로는 그가 제시하는 해법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육에서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에 교육계 안팎에서 공감하고 있고, 경기도 교육청은 앞장서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5.31 교육체제와 같은 경쟁 중심 수월성 교육에서 벗어나 배움의 기쁨 그 자체를 누리도록 도우며 인간을 인간답게 교육하는 4.16 교육체제로 전환하려는 담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분석은 같을 수 있지만 가치관에 따라 대안은 천차 만별이다.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특별히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저자에게 책 "그 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http://blog.yes24.com/document/8237250 를 추천한다.

 

책 읽는 내내 나는 저자가 매우 비판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공무원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기득권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다. 유리 통장 덕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열심히 세금을 내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투명하고 건전한 복지제도를 마련하리라는 믿음만 있다면 증세나 연금 개혁에 반대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공무원 사회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  더 좋은 사회는 모두가 기득권처럼 사는 사회일 테다. 저자가 책 내내 주장하는 기업 중심 시장 경쟁 체제를 중심으로 한 '구조 조정'에 반대한다. 우리 사회에도 버니 샌더슨 같은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공무원이라서 당원으로 활동할 수는 없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방식에 대부분 공감한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해서.   

월간 "페이퍼"에 수록한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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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6-02-09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것이었군요. ˝우리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고 일본도 양보를 하는 선에서 타협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 양보에 대한 생각이 저와 공병호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해피클라라 2016-02-1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포터즈로 책을 받았던 터라...
저랑 비슷한 생각으로 읽으신듯요.
저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책을 끝까지 읽었는데
후아... 21세기북스 자체는 좋아하지만
이번 책은 아이었네 싶었습니다 -_-;
 
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북이십일 서포터즈로서 신간을 받아본 주제에 매우 솔직한 서평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시설에서 지내는 청소년 일탈 행위가 담겨 있는 이 소설, 강도가 매우 세다. 뭣도 모르고 고등학생 때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었다가 충격 받은 기억이 났다. 무라카미 류 주인공은 성인이기라도 했지, 아마도 첫 작품인데 극찬을 받았다던 이 소설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은 이 "파놉티콘" 속 주인공이 청소년들이라면 몇 배 충격이다. 발달 단계 상 감정적 혼란을 겪으며 센척하는 중2들을 종종 보며 살고 있지만 이 정도 급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과연 앵거스처럼 유연하게 대할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아프게 만들었나 싶어 분량도 꽤 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최근 읽은 책 중 다 읽기 가장 힘들었다.

 

벤담이 제안했고 푸코가 감시와 처벌하는 사회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왔던 원형 감옥 아이디어 '파놉티콘'을 작가는 이 소설에서 현실화한다. 감옥 독방들보다 약간 높은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자리잡은 원형 감옥 중앙에 있는 감시탑에서는 죄수들 일거수 일투족을 24시간 내내 항상 감시할 수 있다. 감시하지 않고도 감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감방에서는 감시탑에서 감시를 하는지 안하는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에서의 권력 차이는 감시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죄수는 감시를 내면화한다. 이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은 누군가 자신을 실험하고 있다는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특히 이 이야기 배경은 파놉티콘이라는 '시설'이다. 여러 이유로 보호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들을 '클라이언트'라고 부르며 보호하는 시설이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주인공은 욕-폭력-흡연, 음주, 약물남용- 길거리에서의 일 의 악순환 속에서 머릿 속으로 끊임없이 사고 실험을 한다. 이를 '생일 게임'이라고 부른다. 만약 내가 어디서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변주하는 게임인데 이 내용에는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담겨 있어서 안쓰럽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며 증오하고 저주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지도 모르는 시설 독방에서 문도 꽉 닫지 못하고 지내야하는 삶 속에서 정체성 혼란과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몸을 확인하기 위해 각종 일탈 행위들을 이 시설에 사는 청소년들은 공감하며 함께 행하고 있다. 주인공은 '실험'이 다음 타켓을 정하면서 한 명 한 명 '제거'해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기 파놉티콘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는데, 이 이야기 결말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현실인지 환상인지 나는 모호하다.  

 

약물을 복용하는 장면이 계속 나와 불편했기에 혹시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도 꽤나 하드코어한 장면이 만들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4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이야기는 클라이맥스가 있다기보다는 계속 높은 강도의 충격을 유지하는 듯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의미들을 발견해 보여주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아, 이 이야기가 그런 의미도 담고 있었어??' 생각하며 오히려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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