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독서가>


- 책을 사는 것, 서문만 읽는 것, 부분부분만 찾아 읽는 것, 그 모든 것이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듯이 절대적인 비법은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려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5-19쪽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은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 전문성이란 깊이를 갖추는 것이겠죠. 그런데 깊이의 전제는 넓이입니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아요. 넓이의 전제가 깊이는 아니거든요. 지적인 영영에서 교양을 갖추지 않는다면 전문성도 가질 수 없죠.

-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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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주의 & 공격적 신화>


**파시스트 예술은 영웅을 좋아한다. 그들의 예술적 형식이 복고풍인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시대, 즉 *영웅의 시대였다. 나치 예술 역시 한 세기를 거슬러 19세기에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혹은 낭만주의적 양식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19세기에 영웅으로 꼽히던 사람들은 근대화 혁명가들이었다. 베토벤은 외국인인 나폴레옹에게 ‘영웅‘을 헌정했고, 헤겔은 제 조국의 침략자에게서 ‘절대정신‘을 보았다. 프랑스혁명은 **민족적 경계를 넘어 **전인류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신적 미족주의자인 나치에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세기에서 영웅주의를 빌어갈 때, 그들은 이 **진보적 내용은 슬그머니 생략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민족의 지도자를 찬양하는데에 써먹을 영웅숭배의 형식뿐이니까.

나치 예술은 과학과 미신을 교묘하게 섞어 공격적인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북방민족의 신화‘라는 것을 믿었다. 아틀란티스 문명을 건설했으며, 영국에 있는 스톤 헨지를 만든 것도 이들이라는 것이다.

**신화는 파시스트들의 ‘세계관의 그림‘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냉철한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다. 단지 파시스트 대중의 집단적 광기, 편견과 증오심, 야수적 공격본능을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파시스트들에게 예술은 *개인의 미적 취향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예술은 *집단적 현상, 국가이념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런 유의 *프로파간다 예술을 ‘국민예술‘로 치켜세운다.

93-5쪽

<기념적 성격, 이상적 인간미>


파시스트 신화와 영웅서사시의 미학적 특성은 그 기념적 성격에 조응하는 **숭고와 비장미로 포착할 수 있다. 숭고는 무엇보다도 일상적 ‘크기‘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파시스트 예술은 **‘과도한 것‘ 혹은 ‘일상적 척도를 넘어서는 거대함‘을 추구한다.

신화 속에 살았던 나치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이상적 인간이었다. 나치는 **‘머리만 크고 몸이 없는 괴물‘과 같은 이론적 인간들, 요컨대 지식인들을 혐오했다. 여기서 인간교육에서 *지성보다 신체의 발달을 강조하는 나치의 스포츠 철학이 나온다. 체력=전투력=국력

10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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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 미학>


아직까지 사과를 거부하면서, 흉악한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놓고 떠받드는 일본 우익 멜털리티의 저변에 깔려 있는 건 바로 **파시스트 운명철학이다.

변태적 유미주의

파시스트 운명철학과 짝을 이루는 게 바로 변태적 유미주의, 즉 **죽음의 미학이다. 이 봉건낭만주의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속에서 각별한 역할을 한다. 가령 가미가제를 생각해보라. 이들은 자기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따져보지 않고, 그저 ‘어떻게‘ 죽을까만 고민한다.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았다. ‘내 죽음이 정말 나라를 위한 것인가?‘ **이런 골치 아픈 고민은 권력을 잡은 우리에게 맡겨 두고, 너희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멋있게‘ 죽기만 해라.

2차대전 당시 일본 군부는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라고 강요하면서 이를 **‘옥쇄‘라는 말로 미화한 바 있다. 죽음의 미학. 여기에는 이렇게 실제의 **강요된 죽음을 ‘순절‘로 은폐하는 묘한 효능이 있다.

이 변태적 유미주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첫째, 죽음의 미학은 단순무식한 파시스트 대중들을, ‘내가 목숨을 바치려는 이 대의가 옳은 것인가‘하는 **번잡한 내용적 고민에서 해방시켜준다.

둘째, 이 변태적 유미주의의 예술적 형식은 그릇된 이념에 바쳐진 무의미한 개죽음을 숭고한 영웅의 죽음으로 변용시킴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묘한 미적 도취 상태에서 쉽게 목숨을 내던지게 한다.

셋째, 죽음의 미학은 이 인간 도라마의 또라이 관객들은 물론 이 도라마를 연기하는 또라이 배우들까지도 감동시킨다. 원래 쉽게 감동을 먹는 게 단순무식한 파시스트 또라이들의 특징이다.

물론 남들에게 죽으라고 강요했던 그 패장들은 정작 삶에 미련이 남았는지 옥쇄도 않고 요리조리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다 결국 교수대에 목이 대롱대롱 걸렸다.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다.

87-8쪽

<수동성과 적극성>


파시스트 운명철학과 변태적 유미주의. 이 두 요소가 국적을 달리하는 모든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국제적 공통성이다.

한편으로 파시즘은 대중들에게 극단적인 수동성을 요구한다. 즉, 정치적 탄압기구를 동원해 대중들의 정치참여와 개인적 의사표현을 가능한 한 억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일단 자기들 마음대로 국가적 목료를 결정하면, 이제 파시스트들은 이 헛된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이제 이들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이었던 대중들에게 극단적 적극성과 자발성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신화와 미신을 동원해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종교의 수준으로 신성하게 끌어올린다.

이때 동원되는 것이 바로 파시스트 죽음의 미학이다. 다시 말해 변태적 유미주의는 파시스트 종교예술의 본질적 특징이다. 다음에 거론할 몇 가지 파시스트 미학의 특성들은 모두 이 두 요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예술적 세계관>

파시스트의 세계관은 예술적이다. 물론 이들이 고상한 미적 취한("세련된 균형감각")가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의 미적 취향은 **유치한 키치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파시스트의 세계관이 예술적이라는 얘기는 그들이 현실과 허구를 마구 넘나든다는 뜻에서다. 

물론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대중들로 하여금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파시스트들의 **황당한 논리는 **논리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들의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데 *예술적 수단, 즉 **허구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령 조갑제와 이인화의 글을 읽어보라. 만화다. 이들은 자기들의 세게관을 형성하는 데 과학을 이용하지 않고 **예술적 상상력을 이용한다.

  발터 벤야민은 사회주의 예술과 나치 예술의 차이를 **‘예술의 정치화(사회주의 예술)와 **‘정치의 예술화(나치 예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적절한 말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세계관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과학적 작업의 산물이었다. 이들이 예술을 정치의 무기로 만들어 종종 경향예술로 전락시켰다면, 나치는 그 반대다. 

나치의 세계관은 고의의 산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신화 · 전설 미신 등 예술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들은 외려 과하을, 자기들의 예술저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입증하느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에게는 정치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예술적 사건이다.

물론 파시스트 대중들 역시 예술적이다. 이들은 **세계관의 공백을 파시스트가 쓴 역사소설이나 전쟁소설 따위로 메운다. 이론은 복잡하나 소설은 간단하고, 이론은 딱딱하나 이야기는 물렁물렁하고, 이론은 냉정하나 소설은 뜨거운 감동을 주지 않는가.
조갑제의 말이다.

"서구의 빛나는 이성과 합리보다는 그늘진 감성과 정감 / 과학과 수학보다는 문학과 예술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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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성의 세 층위 —— 세계, 문제, 해결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 이를테면 거울이 아니라 위장(胃腸)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오해가 발생한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충실히 보여주는 위장이 좋은 위장이 아닌 것처럼,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거울로서의 소설이라는 관념은 끈질기다. 이 관념을 반성하지 않는 비평들은 흔히 소재주의라고 해야 할 어떤 편향에 몸을 싣곤 한다. 그 소재가 무엇이건, 도대체가 미학적으로 태만한 작품은 옹호할수가 없다. 

**소수자 혹은 약소자를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현하고 감상적인 해결책을 반복하는 작품들은 그것이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를따지기 이전에 그저 **‘나쁜 소설‘일 뿐이다.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 이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는 (정치학적 · 사회학적) *2차 담론으로 완전히 환원되어 탕진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길이고, 그것이 소설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23쪽

**1. 현실성의 세 층위 - 세계, 문제, 해결(2)


 소설과 현실의 관계를 온당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소설의 ‘현실성‘을 적어도 **세 가지 층위에서 검토해야 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 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 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 그러니 **세계의 현실성, 문제의 현실성, 해결의 현실성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입체적인 시공간에서 특히 **의미 있는 한 부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을 경우 **‘세계의 현실성‘ 이 확보되고, 

**그 세계 안의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고투하면서 당대의 공론장에서 기꺼이 논의해볼 만한 의제를 산출해낼 때 **‘문제의 현실성‘
이 확보되며,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심화·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를 제출할 때 **‘해결의 현실성‘ 이 확보된다. 

소설의 현실성은 위의 세 단계에서 따로 또 같이 관철되거나 기각될 수 있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은 어떤가. 『광장』은 당시의 남한과 북한을 소설적 세계‘ 로 선택하면서 동서 냉전시대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체 제의 특수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요령(要領)을 점령했고 (세계의 현실성), ‘남(밀실)이냐 북(광장)이냐‘ 라는 민감한 문제‘를 설정하여 당대의 공론장에 뜨거운 의제를 던졌으며 (문제의 현실성),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하고 자살을 택하는 이명준의 ‘선택‘ 을 옹호함으로써 매카시즘의 광풍을 뚫고 당대의 이데올로기 좌표를 근저에서 흔들었다(해결의 현실성). 

의미 있는 세계, 민감한 문제, 전대미문의 해결이라는 세 요소가 이 작품 안에 공존한다. 이것이 『광장의 당대적 ‘현실성‘ 이었다.
 

24쪽

2. <김영하의 빛의 제국>


고정간첩 김기영은 필사적으로 가면을 쓰다가 어느덧 그 가면이 맨얼굴이 되어버린 사내다. 그는 사유하지 않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만 사유할 수 있다. **사유와 존재를 일치시키려 하면 파멸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비극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분단체제 하의 남한과 북한은 상이한 별개의 두 체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왕자와 거지‘처럼 닮은 것이었다. ‘수령‘과 ‘당‘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국가‘와 ‘민족‘만 넣으면 되었다.

후배는 더 나아가 이 동일성 이면의 또다른 동일성을 포착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인간은 이념이나 풍요를 추구하는 존재하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기실 충동에 의해 추구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도스토옙스키적 전언과 흡사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념이 인민을 무균실의 존재로 사육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혹은 자본이 대중의 결핍을 완벽히 제거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이간은 참을 수 없는 결핍에 몸부림치면서 과잉으로 치닫는다.

모두가 조금씩은 **편집증적이고 조금씩은 **도착증적이다. 근과거의 북한과 남한이 그랬고, 지금 여기 21세기의 남한이 실로 그렇다.

***혁명이라는 대타자가 사라진 탈냉전/ 탈이념시대가 되면 안정과 풍요가 앞문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권태와 환멸이 옆문으로 들어오고 급기야 **편집과 도착까지 뒷문으로 들어온다.

남이건 북이건 혹은 과거건 현재건, 이 세계에서 더 우월한 것도 덜 우월한 것도 없고, 특별한 순결도 특별한 타락도 없다. 결핍인가 하면 과잉이고, 진실인가 하면 허상이다.

그 층위와 열도가 제각가이긴 하지만, 네 사람이 당면하고 있는 이 문제들은 모두 그들에게 이 세계를 향해 모종의 윤리적 의견 표명을 강제하는 질문들이다.

"걸어가는 기영을 서치라이트 하나가 포착했다. 그는 강렬한 빛에 갇힌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의외로 편안하고 부드러운, 비로소 자기 운명을 긍정하게 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눈물이 코주름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너무 강한 조명 때문에 얼굴의 음영이 지워져 마치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385쪽)"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미지다. ‘강렬한 빛‘ 속에 갇힌 채 ‘눈물‘을 흘리는 이 사내는 마치 ‘운명을 긍정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긍정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기 때문에 사내는 ‘유령‘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여기서 이 소설은 비로소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만난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주는 놀라움은 대낮 같은 환한 하늘과 밤인 듯 캄캄한 집을 ‘초현실적으로‘ 병치한 데서 생겨나는 놀라움이다. 마그리트의 이미지를 정치적 메타포로 변환하면 저 인용문의 이미지, 즉 ‘빛‘의 제국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암흑‘인 채로 서 있는 사내의 이미지가 된다.

실상 그는 스스로 자유롭다 생각한 지난 10년 동안 이미 자유롭지 않았고, 그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뇌했던 마지막 하루 동안에도 전혀 자유롭지 않았으며, 강요된 선택 이후의 삶에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김기영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이미 소제국이 된 남한에서 더 이상 어떤 **이념적/체계적 대안도 없이 살아가는 무력한 인간 군상들(더 구체적으로는 **386세대) 일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자본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고정간첩들이 아닌다. 이 소설은 21세기 한국의 착잡한 초상화다.

**김기영은 몰락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몰락에 흡수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해결이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뒤흔드는 해결이라고 하긴 어렵다. 이 소설의 후반부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에 기꺼이 내기를 거는 선택, 그 선택의 윤리적 숭고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25-30쪽

5. 현실과 실재의 간극


오늘날 *소설과 현실의 관계는 단선적인 반영관계가 아니라 *섭취, 흡수, 소화의 관계인 탓에 확실히 소설에서 현실의 인력을 투명하게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자본의 활동이 초국가적 전지구적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탓에 그것의 운신과 패악도 점점 미시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소설은 그 금지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제 소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이 곧 실재인 시대는 끝난 것 같다. 

**이제는 현실과 실재의 간극을 인식하는 것이 성숙한 소설의 덕목이 된 것처럼 보인다.

 **"현실(reality)은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연루된 현실적 사람들의 사회적 현실인 반면,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적 논리이다." 

재현의 구성적 요소이지만 그 자체 재현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실재(實在)‘라 명명한다면, 오늘날 초국적 자본의 전방위적 인력이야말로 실재의 심급을 차지한다. 그것이 재현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현실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무중력공간‘ 이 존재한다고 간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라는 한 시인(이문제,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의 인상적인 에피그램을 기억해야 한다. **중력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중력이 되었다. 무중력의 공간처럼 보이는 그곳이야말로 실제로는 자본의 만유인력이 가장 빼어나게 작동하는 곳이기 십상인 것이다.

  물론 예외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텍스트에서 텍스트를 뽑아내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 하지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주식은 여전히 현실이다. 주식을 거부하고 간식만으로 버티는 다이어트와 흡사한 글쓰기는 결국 영양실조와 아사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설이 한 시대의 공론장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먹고 실재를 토해낼 수밖에 없다.

실재는 현실의 찢김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을 괄호치고 실재를 곧바로 겨냥할 때 소설은 실재적이기는커녕 상징적이지도 못한 상상적인 알레고리로 떨어질 수 있다.


스핑크스가 묻는다.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본질적으로 근대적 국민국가 만들기에 실패한 분단체제 하의 땅이다. 현상적으로 근대적 일상의 난마 속에서 허덕인다. *편집증적으로 탈근대의 정신적 우주를 유영한다. 이렇게 *세 겹의 시간대가 착종되어 있는 곳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괴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 아픈데, 왜 아무도 병들지 않았는가.

41-3쪽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 (1)>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때로 가장 뜨거운 질문이 가장 차가운 소설을 만들어낸다.

김훈은 그의 자서에 이렇게 적었다. "애초에 내가 도모했던 것은 언어와 삶 사이의 전면전(全面戰)이었다." 당시 김훈을 사로잡고 있었던 욕망의 정체가 이 문장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에게 소설쓰기는 애초부터 일종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문장 뒤에 그는 이렇게도 썼다. "나는 참패하였다. 언어와 삶 사이의 전면전이란 무엇인가. 왜 그는 참패했다고 말하는가. 


***"살아갈수록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 
몽롱한 것들과 확실한 것들,
희뿌연 것들과 뚜렷한 것들은 뒤섞인다.

**‘살아갈수록‘ 이라든지 ‘뒤섞인다‘ 같은 말들은 사실 무책임하고 부정확하다.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은 ‘살아갈수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뒤섞여 있는 것이며,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들을 분별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토기』, 79쪽)

이 말들은 어쩔 수 없이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44-45쪽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 (2)>

『논리 - 철학 논고는 오랫동안 논리실증주의의 성서로 간주되어 왔다. 단 후반부(6절 4항 이후)에 갑자기
등장하는, 논리학이나 언어철학과는 무관해 보이는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몇 개의 불친절한 명제를 무시할 때만 그렇다. 

그러나 훗날 공개된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책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라고 썼다. "내 책은 윤리적인 것의 영역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그린 한계를 긋는 단 하나의 엄격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윤리와 비(非)윤리의 경계를 구획하고 이를 언표함으로써 윤리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을 언표하는 일이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힘으로써 **윤리에 대한 모든 언설들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허튼소리만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내 책에서 그런 문제에 관해 *침묵함으로써 모든 것이 확고하게 제자리를 찾게하는 일을 수행했다. 바로 이것이다.

 김훈의 말들이 그러하다. 그의 첫 소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그의 고단한 사변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명제로 수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다. 

이 동어반복만이 유일하게 가당한 말이라고,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정직한 입장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 같다. 


46쪽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 (3)>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자신의 책에는 씌어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이 있다고, **그 절반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훈은 ‘언어와 삶이 모두 무장해제된 시원(始原)의 평화 (「자서」, 『토기』, 5쪽)를 도모하는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했다. 20년을 기자로 살았던 사람이 품어봄 직한,
기자의 말로 세상의 언어를 가지런히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린다고 믿었던 그에게 그것은 시도해볼 만한 싸움이었을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언어의 윤리, 윤리의 언어를 만들어보겠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을 확인하는 문장들만을 무수히 만들어내야 했다. 그것이 그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고 말함으로써 세상의 부박한 말들에 맞서는 길 하나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의 승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들은 제 무능을 고백할 때 가장 당당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첫 책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훈의 첫 소설은 우선 언어에 대한 소설이지만 은밀하게는 윤리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47쪽

<자연사의 이념>


늘 이미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의 어느 한 시공간에서, 인간의 생멸이 부질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자연은 다시 늘 이미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이것은 역사이되 역사일 수가 없다.

56쪽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다"
<칼, 65쪽>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상한 것이라는 인식이 소위 ‘자연사의 이념‘이다. 역사는 몰락의 과정일 뿐이고, 역사가 남긴 것은 잔해와 파편일 뿐이라는 인식이 그 이념 안에 있다.

57쪽

김훈은 ***인류의 역사가 약육강식의 질서로 움직여왔따는 것을 ‘긍정‘할 수는 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정하되 긍정하지 않는 길이 어려운 길이다.

59쪽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라고 적었다.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Les no dupes errent)‘라고 말한다. (세미나 21) 맥락을 달리해도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속지 않았다고 믿는 자가 길을 잃는다. 속아주는 자만이 넘어설 수 있다. **벤야민이 희망이 없는 자에게만 희망이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뜻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인간주의와 얼마나 많은 역사주의가 있는 것인가. 김훈은 그런 것들이 세상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에 회의적이다. 그래서 인간을 긍정하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역사를 믿지 못하면서 역사소설을 쓴다. 이 역설이 김훈 소설의 힘이다. 그 역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치열하게 동어반복한다.

역설이 아닌 것은 세계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고통의 절대성만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유일한 것이다" (아도르노) 고통은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고 어쩌면 그 고통에 가닿는 길도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서문, <남한산성>)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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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과 노력으로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
루스벨트의 첫 번째 취임 연설(1933)


현재 돌아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진정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텐트를 접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포기하거나, 그저 달아나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과 자기 가족을 임박한 듯한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전쟁은 그런 유의 사건이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기와 동료 의식으로 무장한 채 공격자와 맞서게 해야 한다. **두려움은 원심력을 띤다. **두려움은 한데 뭉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의 에너지를 흩어지게 한다. 지도자들이 하는 말은 큰 차이를 낳을 수 있어서, 사람들을 공통의 과제로 끌어들일 수있다.

두려움을 정치적으로 현명하게 관리한 명백한 예는, 윈스턴 처칠 이 1940년 5월 13일 하원 의사당에서 총리로서 처음 한 그 유명한 연 설이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두려움과 궁핍으로 피폐해질 만한 실제적인 위험에 처해 있었다. 처칠의 목표는, 요구될 엄청난 수고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희망과 연대를 위해 패배주의적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이었고, 이것은 탁월하게 달성되었다.

503쪽

<처칠의 연설> 

정부 각료에게 했던 말을 의회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부에게 **피, 수고, 눈물, 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우리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나긴 투쟁과 고통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힘을 다해 육해공 모두에서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통탄스러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포악한 압제에 맞서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한마디로 답하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공포에 맞서 승리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들어도 승리할 것입니다.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승리를 이루어냅시다. 

영국 제국의 생존도, 영국 제국이 옹호하는 모든 것의 생존도, 인류가 목표를 향해 전진하리라는 모든 세대의 충동과 욕구의 생존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낙천성과 희망을 가지고 나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나는 우리의 대의가 패배라는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자, 힘을 한데 모아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순전히 수사법의 관점에서만 보면, 성서풍의 울림 있는 구절, 주술적 반복, 기교적 반복, 점점 고조됨을 특징으로 하는 이 연설은 키케로에게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고(처칠이 고전에 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키케로에게서 볼 수 있을 것만큼이나 공들인 티가 난다.

처칠은 사실상 사람들의 두려움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 두려움을 외면하는 대신에 그것에 맞선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쁩니다. 그것은 끔찍한 시련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 과업은 영웅적인, 따라서 호소력 있고 다소 화려한 면모를 띠기 시작한다.

504-5쪽

2. 이상과 현실


우리는 정치적 이상들에서 출발해, 모든 시민의 자유와 복지를 위해 힘들게 노력한 어떤 국가를 상상했다. 하지만 역사에서, 그리고 현실 국가들의 결점 있는 현실에서 사례들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적 이론"을 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과 제도들을 있는 그대로 다루고 있는 것일까?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어서 우리를 오도한다. **이상은 현실적이다.

***이상은 우리의 노력을, 우리의 계획을, 우리의 법 절차를 이끈다. 헌법은, 언제나 줄곧 완벽하게 시행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또 대개 국가의 가장 심원한 염원을 구현한다는 의미에서, 이상적인 문서다. 하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들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주어지지 않을 때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헌법은 또한 현실적이다.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의 평등"은 모두 고상한 이상이지만, 그것들은 실제 세계에서의 소송과 판결을 위한, 실제 사람들의 교육을 위한, 골치 아픈 사회 문제들의 개선을 위한 기초가 되어준다.

이상은 다른 방식으로 현실적이다. **좋은 이상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실제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

실제 사람들은 육체적이고 궁핍하다. 실제 사람들은 다양한 인간적 허약함이나 우수함을 갖고 있다. 실제 사람들은 그저 인간일 뿐, 기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천사들의 나라의 헌법은 어떤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코끼리나 호랑이나 고래의 나라에 가장 적합한헌법은 어떤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국가는 인간의,
인간을 위한 국가이며(다른 종들과의 복잡한 상호 관계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 국가의 헌법은 인간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를 반영할때에만 좋은 헌법이다.

 (존 롤스는 이 점을 분명히 이해했으며, 내 연구가 실현된 정의보다는 염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롤스의 연구와가깝고 롤스의 연구를 보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은 현실적이다. 동시에, **현실 또한 이상을 내포한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염원을 품는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더 나아질 가능성들을 상상해내며, 그것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인간 그 자체의 한계를 초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가끔은 그러한 이상 추구가 길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정치적 삶을 위한 많은 어려움이 그런 식의 자기 거부적 염원에서 온다는 것을 살펴봤다. 하지만 모든 이상 추구가 이런 불운하고 비생산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5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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