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실성의 세 층위 —— 세계, 문제, 해결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 이를테면 거울이 아니라 위장(胃腸)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오해가 발생한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충실히 보여주는 위장이 좋은 위장이 아닌 것처럼,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거울로서의 소설이라는 관념은 끈질기다. 이 관념을 반성하지 않는 비평들은 흔히 소재주의라고 해야 할 어떤 편향에 몸을 싣곤 한다. 그 소재가 무엇이건, 도대체가 미학적으로 태만한 작품은 옹호할수가 없다.
**소수자 혹은 약소자를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현하고 감상적인 해결책을 반복하는 작품들은 그것이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를따지기 이전에 그저 **‘나쁜 소설‘일 뿐이다.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 이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는 (정치학적 · 사회학적) *2차 담론으로 완전히 환원되어 탕진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길이고, 그것이 소설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23쪽
**1. 현실성의 세 층위 - 세계, 문제, 해결(2)
소설과 현실의 관계를 온당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소설의 ‘현실성‘을 적어도 **세 가지 층위에서 검토해야 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 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 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 그러니 **세계의 현실성, 문제의 현실성, 해결의 현실성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입체적인 시공간에서 특히 **의미 있는 한 부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을 경우 **‘세계의 현실성‘ 이 확보되고,
**그 세계 안의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고투하면서 당대의 공론장에서 기꺼이 논의해볼 만한 의제를 산출해낼 때 **‘문제의 현실성‘ 이 확보되며,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심화·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를 제출할 때 **‘해결의 현실성‘ 이 확보된다.
소설의 현실성은 위의 세 단계에서 따로 또 같이 관철되거나 기각될 수 있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은 어떤가. 『광장』은 당시의 남한과 북한을 소설적 세계‘ 로 선택하면서 동서 냉전시대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체 제의 특수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요령(要領)을 점령했고 (세계의 현실성), ‘남(밀실)이냐 북(광장)이냐‘ 라는 민감한 문제‘를 설정하여 당대의 공론장에 뜨거운 의제를 던졌으며 (문제의 현실성),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하고 자살을 택하는 이명준의 ‘선택‘ 을 옹호함으로써 매카시즘의 광풍을 뚫고 당대의 이데올로기 좌표를 근저에서 흔들었다(해결의 현실성).
의미 있는 세계, 민감한 문제, 전대미문의 해결이라는 세 요소가 이 작품 안에 공존한다. 이것이 『광장의 당대적 ‘현실성‘ 이었다.
24쪽
2. <김영하의 빛의 제국>
고정간첩 김기영은 필사적으로 가면을 쓰다가 어느덧 그 가면이 맨얼굴이 되어버린 사내다. 그는 사유하지 않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만 사유할 수 있다. **사유와 존재를 일치시키려 하면 파멸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비극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분단체제 하의 남한과 북한은 상이한 별개의 두 체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왕자와 거지‘처럼 닮은 것이었다. ‘수령‘과 ‘당‘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국가‘와 ‘민족‘만 넣으면 되었다.
후배는 더 나아가 이 동일성 이면의 또다른 동일성을 포착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인간은 이념이나 풍요를 추구하는 존재하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기실 충동에 의해 추구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도스토옙스키적 전언과 흡사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념이 인민을 무균실의 존재로 사육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혹은 자본이 대중의 결핍을 완벽히 제거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이간은 참을 수 없는 결핍에 몸부림치면서 과잉으로 치닫는다.
모두가 조금씩은 **편집증적이고 조금씩은 **도착증적이다. 근과거의 북한과 남한이 그랬고, 지금 여기 21세기의 남한이 실로 그렇다.
***혁명이라는 대타자가 사라진 탈냉전/ 탈이념시대가 되면 안정과 풍요가 앞문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권태와 환멸이 옆문으로 들어오고 급기야 **편집과 도착까지 뒷문으로 들어온다.
남이건 북이건 혹은 과거건 현재건, 이 세계에서 더 우월한 것도 덜 우월한 것도 없고, 특별한 순결도 특별한 타락도 없다. 결핍인가 하면 과잉이고, 진실인가 하면 허상이다.
그 층위와 열도가 제각가이긴 하지만, 네 사람이 당면하고 있는 이 문제들은 모두 그들에게 이 세계를 향해 모종의 윤리적 의견 표명을 강제하는 질문들이다.
"걸어가는 기영을 서치라이트 하나가 포착했다. 그는 강렬한 빛에 갇힌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의외로 편안하고 부드러운, 비로소 자기 운명을 긍정하게 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눈물이 코주름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너무 강한 조명 때문에 얼굴의 음영이 지워져 마치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385쪽)"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미지다. ‘강렬한 빛‘ 속에 갇힌 채 ‘눈물‘을 흘리는 이 사내는 마치 ‘운명을 긍정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긍정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기 때문에 사내는 ‘유령‘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여기서 이 소설은 비로소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만난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주는 놀라움은 대낮 같은 환한 하늘과 밤인 듯 캄캄한 집을 ‘초현실적으로‘ 병치한 데서 생겨나는 놀라움이다. 마그리트의 이미지를 정치적 메타포로 변환하면 저 인용문의 이미지, 즉 ‘빛‘의 제국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암흑‘인 채로 서 있는 사내의 이미지가 된다.
실상 그는 스스로 자유롭다 생각한 지난 10년 동안 이미 자유롭지 않았고, 그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뇌했던 마지막 하루 동안에도 전혀 자유롭지 않았으며, 강요된 선택 이후의 삶에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김기영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이미 소제국이 된 남한에서 더 이상 어떤 **이념적/체계적 대안도 없이 살아가는 무력한 인간 군상들(더 구체적으로는 **386세대) 일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자본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고정간첩들이 아닌다. 이 소설은 21세기 한국의 착잡한 초상화다.
**김기영은 몰락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몰락에 흡수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해결이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뒤흔드는 해결이라고 하긴 어렵다. 이 소설의 후반부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에 기꺼이 내기를 거는 선택, 그 선택의 윤리적 숭고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25-30쪽
5. 현실과 실재의 간극
오늘날 *소설과 현실의 관계는 단선적인 반영관계가 아니라 *섭취, 흡수, 소화의 관계인 탓에 확실히 소설에서 현실의 인력을 투명하게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자본의 활동이 초국가적 전지구적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탓에 그것의 운신과 패악도 점점 미시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소설은 그 금지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제 소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이 곧 실재인 시대는 끝난 것 같다.
**이제는 현실과 실재의 간극을 인식하는 것이 성숙한 소설의 덕목이 된 것처럼 보인다.
**"현실(reality)은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연루된 현실적 사람들의 사회적 현실인 반면,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적 논리이다."
재현의 구성적 요소이지만 그 자체 재현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실재(實在)‘라 명명한다면, 오늘날 초국적 자본의 전방위적 인력이야말로 실재의 심급을 차지한다. 그것이 재현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현실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무중력공간‘ 이 존재한다고 간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라는 한 시인(이문제,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의 인상적인 에피그램을 기억해야 한다. **중력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중력이 되었다. 무중력의 공간처럼 보이는 그곳이야말로 실제로는 자본의 만유인력이 가장 빼어나게 작동하는 곳이기 십상인 것이다.
물론 예외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텍스트에서 텍스트를 뽑아내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 하지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주식은 여전히 현실이다. 주식을 거부하고 간식만으로 버티는 다이어트와 흡사한 글쓰기는 결국 영양실조와 아사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설이 한 시대의 공론장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먹고 실재를 토해낼 수밖에 없다.
실재는 현실의 찢김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을 괄호치고 실재를 곧바로 겨냥할 때 소설은 실재적이기는커녕 상징적이지도 못한 상상적인 알레고리로 떨어질 수 있다.
스핑크스가 묻는다.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본질적으로 근대적 국민국가 만들기에 실패한 분단체제 하의 땅이다. 현상적으로 근대적 일상의 난마 속에서 허덕인다. *편집증적으로 탈근대의 정신적 우주를 유영한다. 이렇게 *세 겹의 시간대가 착종되어 있는 곳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괴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 아픈데, 왜 아무도 병들지 않았는가.
41-3쪽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 (1)>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때로 가장 뜨거운 질문이 가장 차가운 소설을 만들어낸다.
김훈은 그의 자서에 이렇게 적었다. "애초에 내가 도모했던 것은 언어와 삶 사이의 전면전(全面戰)이었다." 당시 김훈을 사로잡고 있었던 욕망의 정체가 이 문장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에게 소설쓰기는 애초부터 일종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문장 뒤에 그는 이렇게도 썼다. "나는 참패하였다. 언어와 삶 사이의 전면전이란 무엇인가. 왜 그는 참패했다고 말하는가.
***"살아갈수록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 몽롱한 것들과 확실한 것들, 희뿌연 것들과 뚜렷한 것들은 뒤섞인다.
**‘살아갈수록‘ 이라든지 ‘뒤섞인다‘ 같은 말들은 사실 무책임하고 부정확하다.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은 ‘살아갈수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뒤섞여 있는 것이며,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들을 분별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토기』, 79쪽)
이 말들은 어쩔 수 없이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44-45쪽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 (2)>
『논리 - 철학 논고는 오랫동안 논리실증주의의 성서로 간주되어 왔다. 단 후반부(6절 4항 이후)에 갑자기 등장하는, 논리학이나 언어철학과는 무관해 보이는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몇 개의 불친절한 명제를 무시할 때만 그렇다.
그러나 훗날 공개된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책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라고 썼다. "내 책은 윤리적인 것의 영역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그린 한계를 긋는 단 하나의 엄격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윤리와 비(非)윤리의 경계를 구획하고 이를 언표함으로써 윤리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을 언표하는 일이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힘으로써 **윤리에 대한 모든 언설들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허튼소리만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내 책에서 그런 문제에 관해 *침묵함으로써 모든 것이 확고하게 제자리를 찾게하는 일을 수행했다. 바로 이것이다.
김훈의 말들이 그러하다. 그의 첫 소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그의 고단한 사변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명제로 수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다.
이 동어반복만이 유일하게 가당한 말이라고,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정직한 입장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 같다.
46쪽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 (3)>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자신의 책에는 씌어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이 있다고, **그 절반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훈은 ‘언어와 삶이 모두 무장해제된 시원(始原)의 평화 (「자서」, 『토기』, 5쪽)를 도모하는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했다. 20년을 기자로 살았던 사람이 품어봄 직한, 기자의 말로 세상의 언어를 가지런히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린다고 믿었던 그에게 그것은 시도해볼 만한 싸움이었을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언어의 윤리, 윤리의 언어를 만들어보겠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을 확인하는 문장들만을 무수히 만들어내야 했다. 그것이 그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고 말함으로써 세상의 부박한 말들에 맞서는 길 하나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의 승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들은 제 무능을 고백할 때 가장 당당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첫 책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훈의 첫 소설은 우선 언어에 대한 소설이지만 은밀하게는 윤리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47쪽
<자연사의 이념>
늘 이미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의 어느 한 시공간에서, 인간의 생멸이 부질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자연은 다시 늘 이미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이것은 역사이되 역사일 수가 없다.
56쪽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다" <칼, 65쪽>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상한 것이라는 인식이 소위 ‘자연사의 이념‘이다. 역사는 몰락의 과정일 뿐이고, 역사가 남긴 것은 잔해와 파편일 뿐이라는 인식이 그 이념 안에 있다.
57쪽
김훈은 ***인류의 역사가 약육강식의 질서로 움직여왔따는 것을 ‘긍정‘할 수는 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정하되 긍정하지 않는 길이 어려운 길이다.
59쪽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라고 적었다.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Les no dupes errent)‘라고 말한다. (세미나 21) 맥락을 달리해도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속지 않았다고 믿는 자가 길을 잃는다. 속아주는 자만이 넘어설 수 있다. **벤야민이 희망이 없는 자에게만 희망이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뜻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인간주의와 얼마나 많은 역사주의가 있는 것인가. 김훈은 그런 것들이 세상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에 회의적이다. 그래서 인간을 긍정하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역사를 믿지 못하면서 역사소설을 쓴다. 이 역설이 김훈 소설의 힘이다. 그 역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치열하게 동어반복한다.
역설이 아닌 것은 세계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고통의 절대성만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유일한 것이다" (아도르노) 고통은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고 어쩌면 그 고통에 가닿는 길도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서문, <남한산성>)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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