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누웠던 자리>


그러나 그들이 엇갈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비로소 만난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우면서 시인은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저 ‘아니‘의 미묘한 머뭇거림이 이 시를 한층 겸허하게 만든다.

 주체가 객체를 서정적으로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하나가 되는 이 기술이 바로 뛰어난 서정의 마력이다. 이 태도는 환자의 고통을 진단하지 못하)는 의사의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와 대비되면서 더욱 아름다워진다. 이 윤리적 태도에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하나.

다시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와서 이것을 **‘미메시스의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미메시스는 모방과 다르다. "전통적인 예술 이론에서 미메시스가 객체의 모방‘ 이라면 아도르노적인 의미에서의 미메시스는 **객체에의 동화(同化)‘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투사(投射)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미메시스가 주변 세계와 유사해지려고 한다면 잘못된 투사는 주변 세계를 자기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한다."
이런 말들이 꽤 모호하게 들린다면 이는 아마도 대상을 객체화하는 근대적 합리성의 지배 속에서 우리가 저 미메시스의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뛰어난 서정시에는 그 미메시스의 계기가 보존되어 있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 눕는 이 소박하면서도 숭고한 행위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섣불리 확증함으로써 결국 객체를 주체로 종속시키고 마는 서정의 윟멍르 사려 깊게 피해간다. 그러면서 표명되는 희망이기에 이 시가 껴안고 있는 희망은 거북하지 않다.

스탕달은 예술을 "행복에의 약속"이라 했다. 행복이 지금-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예술은 허위다. 언젠가 그들은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라고 이 시는 말한다.


509-11쪽

<그가 누웠던 자리, 서정적으로 올바른>


 아우슈비츠 이후 씌어지는 서정시는 다음 세 가지의 계기를 내포해야만 한다. 

동일성(동일자)의 폭력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특수성(특수자)의 현실을 ‘발견‘ 하고, 그 특수자의 아픔을 ‘나‘의 고통으로 ‘감응‘하고, 고통 없는 세계의 비전 혹은 진실한 화해의 비전을 강렬하게 ‘환기 하기. **이를 발견, 감응, 환기의 3단 구조로 정식화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규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시 「병원」이 알려준다. 
첫째,
동일성의 폭력에서 특수자를 구제하기 위한 발견이 외려 동일화의 메커니즘을 채택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이미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눈 앞에서 특수자는 더러 제 뜻과 무관하게 아름다워지고 만다. 둘째, 특수자의 아픔에 감응하는 일은 그 감응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주의와 끝내 함께 가는 작업이어야 한다. 타자의 고통이 곧 ‘나‘ 의 고통임을 아름답게 고백하는 사이비 유마힐(維手話)이 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셋째, 고통 없는 세계 혹은 진실한해의 세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인 방식으로(그것은 바로 여기에제시되어서는 안 되며 다만 부정적인 방식으로(그것은 여기에 없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 (자연 혹은 여행지)에서 유아는 저 수많은 시들은 행복에의 약속‘ 이 아니라 행복의 단언이다) 환기되어야 한다. 


511쪽


 세 토막으로 이루어진 시 「병원」은 발견, 감응, 환기의 모범적인 사례를 그 순서 그대로 예시한다. 병원과 환자로 은유되는 세계의 실상의발견, 타자들의 아픔에 감응하면서 이뤄지는 ‘나‘의 고통의 인식, 미메시스의 윤리와 행복에의 약속을 통해 환기되는 유토피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배려가 저 소품 안에 있다. 

이 시가 그런 서정시의 최고 수준을 구현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서정시의 윤리학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걸작이라는 말보다는 문제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던지자.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우리는 그럴 때 서정적으로 올바른(poetically correct)‘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시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곳은 ‘그가 누웠던 자리‘다.

5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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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대 미디어 이용 조사>


- 초중고등학생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이용 시간은 **78분~94분이었다. 텔레비전 수상기로 tv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는 비율이 **76.9%로 여전히 높았다. 모바일 기기로 tv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는 비율은 56.3%에 육박한다.

- 모바일 시청에 적절한 형태로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상이 재가공/재편집되고 OTT 서비스로 재정소되고 있는 상황도 주목할 만하다.

- 82.2%가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했다고 응답했다. **텔레비전은 가족을 거실로 모이게 하는 매체로서 여전히 의미를 지닌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족들은 ‘함께 함‘을 경험할 것이다.

- 보바일 인터넷 미디어 환경에서는 다층적인 행위들이 ON과 OFF를 반복하며 ‘함께‘와 ‘따로‘가 공존한다.


<서비스별 플랫폼 이용률, 단위 %>

1. 인터넷 포털
네이버 90.3 > 구글 56.2 > 다음 12.5 > 네이트 2.7

2.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 92.5 > 페이스북 메신져 56.1 > 인스타 DM 20.0 > 트위터 DM 5.8

3.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 98.1 > 네이버 TV 24.7 > V LIVE 15.7 > 트위치 14.8

4. SNS
페이스북 80.3 > 인스타그램 61.0 > 트위터 25.3 > 틱톡 20.6

- 유튜브 사용 이유: 재미있는 콘텐츠, 시간 때우기, 새로운 정보나 뉴스, 맞춤형 정보, 동영상 형태로 보는 것이 이해가 잘 돼서 등


43-48쪽

<알고리즘 제어 문제>


- 소셜미디어는 *연대의 연결 도구가 될 수 있다. 주류 언론이 *외면하는 이슈를 끌어내고 *토론과 논쟁을 촉발시키고 때로는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끈다. *다양한 관점과 인식을 공유하고 *집단지성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튀니지와 이집트, 스페인, 칠레, 홍콩으로 소셜미디어 혁명이 확산되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철저하게 **상업적 동기와 **이윤 창출의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커먼 교수는 "**디지털 공론장을 한두 회사에 맡겨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 ***알고리즘이 우리가 보는 것을 제어 control 하지만 우리는 알고리즘을 제어할 수 없다.

-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는 날마다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를 **어떻게 필터링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은 페이스북과 구글에는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고객이라는 점이다. **우리 대부분은 상품이다.

- 페이스북은 광고주들에게 강력한 필터링 도구를 제공하지만 이용자들은 페이스북이 보여주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 허핑턴포스트와 복스, NPR, 슬레이트 등을 왼쪽으로, FOX와 뉴욕포스트, 데일리메일 등을 오른쪽으로 그리고 USA투데이와 월스트리트저널, CNBC 등을 중립으로 나눈다.

- 고보 gobo.social의 비전과 전략
1. 개인이 직접 자신의 뉴스피드를 설정 personal control
2. 다양한 목적으로 플랫폼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plural in purpose
3.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만들어야 하고 public in spirit
4. 이용자들이 플랫폼의 가이드라인을 결정ㅎ알 수 있어야 한다. participatory in governance


58-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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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언론 신뢰를 묻다>

-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측면에서 언론 환경이 크게 개선됐지만, **‘경제권력 종속‘이란느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등장했다.
협찬과 광고영업, 경언유착 등에 대한 기자들의 고민이 이번 조사 결과에도 어김없이 반영됐다.

-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대한 신뢰도
)신문사, 방송사, 인터넷언론사, 뉴스통신사 종사 기자 284명 응답)
1. 신뢰하는 편이다 59.5%
2. 매우 신뢰한다 27.5%
3. 보통 10.6%
4.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2.1%
5.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0.4%

- *가장 신뢰하는 정보 출처는 보고서 및 논문 등 학술자료(66점), 정부/정부기관의 보도자료(57.7), 검찰/경찰 브리핑(51.1), 기업 보도자료(45.5), 정치인 발언(29.2), sns/유튜브/인터넷 커뮤니티 등 인터넷 정보(26.6)

-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직/간접적인 요인
1. 광고주 68.4%
2. 편집/보도국 간부 52.7
3. 사주/사장 46.4
4. 기자의 자기검열 32.5
...
7. 독자/시청자/네티즌 18.4


- 광고주 요인 응답 비교
**경제일간지 (90.0%) vs 지상파3사 (29.6%)

- 언론인들은 **기업 활동에 대한 비판 및 감시를 언론의 중요한 사회적 역할로 판단하고 있으나, 그 중요도에 비해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기자들이 생각하는 디지털 뉴스 유통시 가장 중요한 플랫폼
1. 포털 65.4%
2 sns 16.7
3. 동영상 플랫폼 13.3


- 종별 매출액 규모
1. 전국 종합 일간1 / 사업개수 11 / 매출액 비율 36.5% (1조 3700억)
2. 경제일간 / 13개 / 21.6% (820억)
3. 지역종합일간 / 116 / 14.4% (550억)
....


- 신문 산업 매출액 구성 현황
일간 / **광고수입 60.7% / 부가사업 및 기타사업수입 19.5% / 인터넷상의 콘텐츠 판매수입 8.9%


- 대부분 신문사들은 지속적으로 *발행부수를 줄이고 있으며, 신문지국에서 각 가정에 배달하는 부수에 대해서도 자율증감제를 도입해 *유료부수 위주로 신문 판매 전략이 바뀌고 있다. 가운데 유료부수가 *100만부를 넘는 신문사는 *조선일보뿐이었다. 50만부 이상의 유료부수를 판매한 신문사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 4개사였다.


- 한국 ABC협회에 따르면 2018년 전국 일간지 172개사 발행부수는 총 938만 부, 유료부수는 총 709만 부이다.

5-25쪽


<독자에게 언론 신뢰를 묻다>


- ‘언론사와 해당 정보 출처를 비교할 때 어느 쪽의 정보를 더 신뢰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오직 인터넷 포털(52.8%)만이 언론사보다 더 신뢰(47.1%)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SNS, 지인의 메시지보다는 언론사를 더 믿을만한 출처로 여겼다.

- <2019 언론수용자 조사> 결과에서도 전통 매체의 위상 약화와 디지털 플랫폼의 강세라는 경향은 유지됐지만, 매체별로 전년과 다소 차별된 양상을 보였다.

-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을 꼽자면 **텔레비전의 상대적 경쟁 우위 유지, 인쇄매체(종이신문과 잡지)의 끝없는 추락, 메신저와 SNS의 상승세 주춤,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들 수 있다.

- 뉴스 이용 수단의 중심축이 고정형 PC에서 모바일로 가파르게 옮겨가고 있다.

- 유튜브가 언론으로서의 영향력과 신뢰도에서 수많은 기존 언론사보다 높은 평가를 받은 점도 이채롭다.

- **메신저는 2018년에 이용률 81.9%를 기록해 10명 중 8명이 이용하는 보편적 통신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SNS 이용률 역시 49.9%로 10명 중 절반이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플랫폼의 승자독식>


- 지난 한 주간 뉴스 및 시사 정보 주 이용 경로

**1. 전체 / TV 53.2% / 포털 39. 1% / 종이신문 1.5% / 동영상 플랫폼 1.5%
2. 20대 / TV 10.1% / 포털 77.7%
...
5. 50대 / TV 68.8% / 포털 23.5%


- 전통 매체의 이용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채널로 분산돼 있지만, 디지털 플랫폼은 특정 채널 쏠림 현상이 지배적이다.

- 포털에서는 네이버,
메신저에서는 카카오톡,
SNS에서는 페이스북,
동영상 플랫폼에서는 유튜브가 절대적으로 이용을 선도하고 있다.

- 디지털 플랫폼의 경쟁 우위는 알고리즘에 의한 맞춤형 추천 시스템이다. 뉴스 소비 역시 플랫폼 사업자가 어떤 뉴스를 선택하고 어떻게 배치하고 추천하는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들의 독점적 지배에 보다 주의 깊은 조사/분석이 요구된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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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세계>  

/ 김행숙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349쪽

당대의 독자들에게 이상 문학의 혁신성은 무엇보다도 **눈의 혁신성이었다. 그의 시선은 벤야민의 보들레르마냥 경성 거리를 산책한 모더니스트들의 시선-도시와 군중에 대한 ‘매혹과 반발‘의 기묘한 변증법으로 생겨나는 ‘산책자‘의 시선-과도 닮지 않다.

**이상의 시선은 매혹된 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서늘하고, 반발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대상에 너무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그의 시선은 경성의 자본주의와 도시문화를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인지하면서도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냉정한 시선이다.

***다 알고 있는 자의 시선은 매혹과 반발에 휩쓸리기보다는 차라리 조롱과 공포 사이를 오간다. 대상의 치부를 알고 있어서 우습고 대상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무섭다.


460-2쪽

<윤동주 병원, 그가 누웠던 자리>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병원> 전문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 이 라름다운 시를 경계로 윤동조는 비로소 습작기의 어설픔을 잘별한다.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시집의 표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다. 당시 윤동주는 세계가 거대한 병원이고 사람들은 모두 환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실한 시인이라면 *지난한 암중모색의 와중에 세계를 인식하는 어떤 *구조적 틀을 얻게 된다. ‘병원‘이라는 단어는 그가 포착한 세계의 그 구조를 압축하는 말이었다. 이 시는 일종의 개안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504-5쪽

문제작으로서의 「병원」


문제작이란 무엇인가? 문제는 problem 이거나 question이다. **당대에 분란(problem)을 일으켰거나 후대에 계속 질문(question)을 던지는 작품이 문제작이다.

 
이 시는 서정적이다. (서정적인 것‘ 의 상위 범주인 ‘시적인 것‘은 앞으로도 완전히 규정될 수 없을 것이다. **미지의 ‘시적인 것‘ 들을 향해 시인들이 계속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모든 서정적인 것이 아름다움에도 달하지는 않는다. 질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특정한 서정은 어떻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가.

이 시는 세 토막으로 되어 있고 각 연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보아야 하는가)
**둘째,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가(느껴야 하는가)
**셋째,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 행하는가(행해야 하는가)

505-6쪽

<그가 누웠던 자리 3>


1연의 병원과 질병은 ‘정치적 은유‘로 읽힐 수 있다. 이 정치적 은유를 ‘윤리적 은유‘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시는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 1일)과 일본의 진주만 침공 (1941년 12월 8일) 사이에 씌어졌다. 공교롭게도 2차대전 발발 이후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간 윤동주가 1년 3개월여 만에 쓴 작품이다. 

<계몽의 변증법』(1947)의 저자들이 지적한 대로 그 **전쟁은 인간을 신화와 마법의 세계에서 구출한 ‘계몽‘ 의 과정이 ‘자연 지배‘ 를 거쳐 마침내 인간 지배‘에 이르게 된 일련의 타락의 한 종착점이었다. 

그 전쟁은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도구적 이성‘ 의 전횡이 낳은 필연적 비극이었고, 잇달아 벌어진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동일자(동일성)의 폭력속에서 **특수자(특수성)가 질식사한 참극이었다. 이는 실로 이성의 자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은 병원 뒤뜰에서 병들고 고립된 한 환자의 오후를 목격하였다. 이 병원의 뒤뜰은 이를테면 ‘계몽(이성)의 뒤뜰‘일지도 모른다.

아도르노의 말이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고통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의사의 매뉴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이해와 표현이 오로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축적된 고통의 기억‘이다.

시인은 병 없이 앓는 자다. 윤동주의 ‘나도 모를 아픔‘은 훗날 이성복에 의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라는 인식론으로 변주된 그 아픔이고, 황지우에 의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라는 윤리학으로 확산된 아픔이다.

50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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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해설 / 인간의 조건>


1. 공론 영역(The public realm, Der öffentliche Raum)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또 산출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공론 영역은 한편으로 공중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공공성‘ (publicity)을 특징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현상‘ 또는 출현 (appearance)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 개념은 종종 공론장‘(公論場)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의 구별은 고대 그리스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실체로서 존재한 ‘가정‘과 ‘정치적 영역‘의 구별에 상응하기 때문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 개념으로서 이해할 때는 영역(領域)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 이 경우 공론 영역은 ‘자유의 영역이다.


2.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

 **진리 탐구를 유일하게 자유로운 활동으로 해석하는 철학적 삶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비오스 테오레티코스‘ (bios theoreikos)의 번역어로서 *‘관조‘와 *‘명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철학자의 삶의 방식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세상사를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과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의 대립은 소크라테스의 재판, 즉 철학자와 폴리스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전통적으로 관조적 삶은 활동적 삶에 대해 우위를 차지해 왔으며, 이는 결국 한편으로는 **활동적 삶의 세 가지 근본활동인 노동 · 작업 · 행위를 명료하게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행위와 자유의 연관관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437쪽


3. 권력(Power, Macht)

  권력은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정치적 현상의 공간, 즉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행위할 때 그들 사이에서 갑자기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정치적 행위의 관점에서 규정된 권력은 한편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행위의 능력처럼 자발적이고 예측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속과 복종보다는 합의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위계적이다. 

이런 점에서 **권력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힘‘(strength) 그리고 도구화될 수 있는 *‘세력 (force) 및 *‘폭력‘ (violence)과 구별된다. 권력과 폭력의 구별은 세 가지다. 

첫째, 권력은 도구화되거나 물질화될 수 없는데 폭력은 도구적이고 물질적이다. 
둘째, 공론 영역에서 발생하는 권력은 언어행위를 전제하는데 폭력은 말의 가능성을 억압한다. 
셋째, 권력은 협력행위 (action in concert)를 추구하는데 폭력은 고립을 선호한다.


4. 노동(labour, Arbeiten) 

**인간의 생물학적 삶에 상응하는 활동, 인간의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처렴 *생존의 필연성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에게 부과된 활동의 표현이 노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상에서 생물학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노동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과정도 자연의 순환운동의 한 부분인 까닭에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죽어야만 끝나는 ‘노고와 고통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5. 노동하는 동물(animat Laborans)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라틴어 용어 ‘이성적 동물‘ (animal rationale)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인간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사람은 노동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체이기보다는 인류라는 종의 일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생존이라는 이해관계만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들은 노동의 단순한 기능만을 수행하는 동물의 종으로 퇴보할 가능성이 크다.


6. 불멸성(immortality, Unsterblichkeit) 

시간 안에서 영속하고 지상의 이 세계에서 죽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영원성 (eternity, Ewigkeit)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신의 특성으로 이해된다면, **불멸성은 시간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히 되풀이되는 ‘자연‘과 죽지 않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신들이 불멸의 존재로 여겨졌다. 

아렌트는 **시간 안에서 어느 정도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불멸성을 추구하는 것을 인간의 고유한 조건과 능력으로 파악한다.


438쪽

7. 사멸성(mortality, Mortalität) 

사멸성(死滅性)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탄생과 죽음이 인간실존의 조건인 것처럼 탄생성과 짝을 이루는 사멸성은 인간행위의 전제조건이 된다.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진정한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본 하이데거처럼 아렌트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 비로소 어느 정도 영속적으로 전재하는 것을 창조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멸성은 인간을 생물학적인 순환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동시에 탄생과 죽음 사이의 직선적 운동을 통해 **개별적인 삶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 할지라도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멸성이다.


8. 사적 영역 (The private realm) 

**생물학적 욕구와 필요가 충족되는 필연성의 영역을 의미한다. 사적 영역은 남자의 노동과 여자의 출산을 통한 삶의 유지가 주목적인 가정의 영역과 일치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된 사적 영역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가장이 다스리는 가정은 사유의 영역이 아니다. 가정은 불평등의 영역이며, 가장의 동치방식은 전제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정은정지적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 ‘박탈된 영역이다. 

아렌드는 ‘사적‘ (private)이라는 용어가 본래 **‘결핍‘ 및 ‘박탈‘을 뜻하는 낱말, *privative에서 유래한다는 점에 착안한다. 사적 영역은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 삶보다 더 영속적인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된 영역이다.


9. 세계성 (worldliness, Welclichkeit)

 한편으로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의 상대적 객관성과 지속성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인공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뜻한다. 기념비 · 건축 · 도시처럼 인위적인 사물세계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거처이기 때문에 ‘세계성‘은 지상에 시 살아가는 인간의 근본조건이다.


10. 세계소외 (World alienation, Weltentfrcmdung)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행위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개인들이 사회적 계급으로 인해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로부터 분리되고 오히려 이들로부터 지배를 반게 되어 결국 본래 실현해야 할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마르크스의 ‘자기소I toelbstentffemdung)와 유사하지만, **아렌트의 세계 소외는 세계 내에서 자신의 장소를 박탈당한 상태를 뜻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소유는 우리가 세계 안에서 자신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기초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발생한 탈소유화는 임금노동자의 탈소유화를 통해 세계소외를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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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간의 조건 (human condition) 

**인간이 지구 위에서 실존하는 데 필요한 근본조건을 의미한다. 인간이 지구로부터 탈출하여 화성과 같은 다른 행성에서 살게되면 전혀 다른 조건에시 살아야만 하는 것처럼 아렌트는 이 개념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조건에 의해 제한된 존재 (conditioned bcings, bedingte Wesen)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통철학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인간본성‘ (human nature)을 알고자 했다면,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개념으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은 우리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실존조건이다.


12. 작업 (work, Herstellen) 

인간의 비자연적 세계성에 상응하는 활동, 작업은 글자 그대로 주어진 자연을 변형하여 인간에 게 필요한 인공적인 시물들을 만들고 제작하는 활동이다. 장인과 예술가의 작품처리 작업의 산물인 인공세계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초월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영속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13. 지구소외 (earth alienation, Erdentfremdung)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지각하고 분석하기 위하여 모른 현상을 가설적으로 설정한 보편적 관점으로 환원하는 과학적 태도와 현상을 뜻한다.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을 놓은 ‘지구 밖의 한 점‘만 있으면 지구라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한 아르키메데스의 관점을 계승하는 현대 과학은 결과적으로 지구소외를 야기한다. **인간의 조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미치 외부의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지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를 *수학적으로 다루면, 우리는 지구의 구체적 조건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14. 탄생성 (natality, Natalität)

 아렌트가 "정치적 사상의 핵심적 범주로 명명한 것으로서 사실적으로는 모든 인긴의 삶이 탄생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적 범주로서 탄생성은 어떤 것을 새로이 시작할 능력을 뜻한다. 

아렌트에게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행위의 능력이기 때문에 탄생성은 자유로운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로 서술된다. 탄생성은 자유의 원리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태어남으로써 새로 온 자, 시작하는 자가 되고 주도권을 쥐고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도권‘으로 옮긴 영어 낱말 **이니셔티브(initiative)는 그리스어 ‘아르케인‘ (archein)과 라틴어 ‘이니티움‘ (initium)과의 연관관계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창발성‘의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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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행위(action, Handeln)

 **‘보편적 인간‘ (Man)이 아닌 ‘복수의 인간들‘(men)이 지구상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하는 활동으로서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행위는 정치석 삶의 필요조건인 ‘다원성‘ (plurality)에 부합하기 때문에 행위는 곧 정치적 행위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행위‘는 이와 유사한 다른 사회학석 범주들, 즉 ‘행동‘
(behaviour), ‘역할 수행‘(role playing), ‘업무 수행‘ (doing a job) 등과 구별된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를 통해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인간세계에 참여하는 활동이 바로 ‘행위‘다.


14. 호모 파베르 (homo faher) 

도구를 만드는 제작인. 현생인류를 포함하는 종(種)의 학명으로 사용되는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지혜로운 인간)와 대비되는 용어로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특징으로서 ‘제작‘에 주목한다.

 제작은 세계에 하나의 독립적 실재로 남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속성을 가진 전혀 새로운 사물의 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호모 파베르는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지배자로 이해한다. **인간이 호모 파베르인 한, 그는 *모든 것을 *사물화하고 *도구화하는 경향이 있다.



15. 활동적 삶 (vita activa)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묶일 수밖에 없는 세 가지 기본조건에 부합하는 ‘노동‘ ‘작업‘ ‘행위‘를 포괄하는 실천적 삶‘을 의미한다. 

**노동은 탄생과 죽음의 생물학적 조건에 상응하고, 작업은 인공세계의 의존성에 부합하고,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다윈성에 부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렌트가 활동적 삶으로 표현되는 인간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적 삶은 자유를 실현하는 ‘정치적 삶‘ (bios politikos)만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치적 행위만이 진정한 실천이다. 그러나 고대 도시국가 폴리스의 몰락과 더불어 활동적 삶이란 용어는 본래의 고유한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활동적 삶의 위계를 변화시켜 행위를 노동과 직업 같은 필연적 활동으로 축소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 관조적 삶‘ (uita contemplativa)만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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