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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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여명(문학동네/송기정 옮김)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을수록 초대받은 자리에서 경청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콜레트는 프랑스에서는 우리의 콜레트라 불릴 만큼 인기를 누린 작가였고(181p) 작품 속에서도 그려지듯이 대중 뿐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과도 깊이 소통했으며, 대외활동이나 수상 등 생전에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명예를 얻었던 최초의 여성작가(182p)”이기도 했다. 깨어있는 의식의 재능 넘치는 작가로서, 삶이 곧 예술에 근접했던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여명은 어머니 시도의 편지로 시작된다. 딸의 집에 초대받았으나 응하지 못하는 이유로 선인장 꽃의 개화를 보기 위함을 든다. 이제는 세상에 안계시는 어머니,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에게 여전히 현재인 어머니를 기억하고 기리며 나아가 스스로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에게 재현한다. 본격적인 소설의 첫 문장은 이곳이 나의 마지막 집일까?(13p)"하는 반복되는 질문이다. 책들로 가득 찬 찬장들, 소파들, 서랍장들은 십오 년 동안 나와 함께 두세 군데의 프랑스 시골 지역들을 돌아다녔다.(19p)" 그 후 정착한 프로방스의 해안가 마을에서 그녀는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마음을 나누고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을 벗삼는데 안식을 향한 기대가 느껴진다. 어머니 시도의 회상, 동 식물을 비롯한 자연과의 깊은 교감이 인상적이고 주요 테마는 비알과의 예기치 못했던 사랑이다.

 

거리낌 없고 독립적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했던 어머니 시도는 그녀의 인도자이며 거울이고 다다르고 싶은 별이다. 편지로 추억으로 내면의 목소리로 어머니는 내내 출현한다. 어머니가 했음직한 말들을 생각해내려고 애쓰다보면, 항상 나로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가볍고도 느리게 나의 속내를 건드리고,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가도 천천히 다시 솟아오르는 단어들, 특히 주요 논거, 비난, 예상치 못했던 만큼 더욱 매력적인 관대함이 내게는 부족하다.(36p)" 예리한 동반자인 어머니를 향한 연가와도 같은 기록은 마음을 울린다.

 

그녀에게 들르는 친구들 중에서도 특별한 청년 비알을 중심으로 한다. 이미 많은 것을 겪고 누렸기에 웬만한 것들은 그저 넘기려던 시기에 비알은 일종의 때아닌 열매(81p)"였다. 그러나 분명한 열매, 후일에도 계속 생각날 열매다. 자신을 향하는 비알의 감정과 비알을 사랑하는 엘렌, 떠나보낸 비알과 자신의 감정을 조금 늦게 깨닫는 주인공, 그리고 기다림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각별한 세기의 사랑이라는 생각은 안든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삼각관계를 흔치 않게 만들고 품위있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서술자의 통찰력, 예민한 지성에 빚진다. 심리상태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충분히 표현해 살뜰히 전달하는 능력 말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진부한 것 중 하나인 사랑, 그 사랑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모성애는 또하나의 진부함이다. 그 둘로부터 해방되고 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즐겁고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25p)“

 

여명은 반복해서 읽으려 모은 잠언집과 같이 명문장으로 가득하다. 도대체 노쇠란 무엇인가?(43p)"처럼 노쇠, 나이, 여름(82p), , (99p) 등을 비롯해 단어 또한 새로움을 입는다. 모으다, 준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주제를 안기기도 한다. 나는 종종 부모들에 의해 뼛속까지 피폐해진 자식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중략) 그런 자식들은 하도 많아서 골라잡기만 하면 될 정도이다.(53p)” 글쓰기에 대해서는 늘 종이와 씨름하는 사람들, 글을 읽을 자유는 없고 오로지 쓰는 자유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글을 읽고 가구를 디자인하는 사치를 누린다.(53p)"말하니 독서가 호사임을 깨닫고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자연의 묘사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그 부분만 들어내어 삽화와 함께 예쁜 소책자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과 감각적 서술은 복숭아 향기를 맡게도 종소리를 듣게도 춤추는 댄스홀을 보게도 한다. 동식물을 글로써 채집하는 그녀의 산책길에 서둘러 따라 나서게 된다. 진정어린 교감을 하며 키우는 동물들은 물론 산책길의 생명체들까지 살아 숨쉰다. 언젠가 그에게 줄과 목걸이를 매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결국, 내게도!“ 라 말하며 한숨짓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중략) 그에게는 완벽한 연인이 갖출 법한 정숙함이 있어, 내가 억지로 만지기라도 할라치면 질겁하곤 한다.(56p)" 그녀는 함께 했던 세 번째 고양이를 추억한다. 그녀가 교류했던 예술가들을 엿보는 것도 즐거운 여정이다. 어떤 화가는 여명의 표지 삽화를 그렸다.

 

작가는 누구든 가까이 다가서고 싶게 하는, 자의식이 빛나는, 일종의 숨만 쉬어도 멋있는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 살로메를 비롯한 천재적 그녀들이 빠르게 스친다. 생각과 감정, 행동이 기계적으로 연속되는 생각의 틀을 작동시키지 않고 감정과 생각을 분리시키는 것이 일상화된 깨어있는 의식을 지녔기에 작품도 삶도 가능했을 것이다. 글쓰는 자, 기록하는 자이니 이부자리적 요소(오래전 도스토옙스키 번역본에서 읽었던 표현)에 빠져 침몰하는 일 따위는 없다.

 

시 공간적 배경 뿐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분모가 없어 적절한 비교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직전에 읽은 작품의 짙은 잔상은 다음 독서에 영향을 끼친다.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작품에서(시간은 밤/문학동네) 몸부림치는 여성들과 콜레트의 여성들은 너무도 다른 곳에 있다.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가림막도 커튼도 잡아뗀 생경한 글로 우리의 오감을 단련시키며 , 같이 한 번 내려가 봅시다, 지옥으로라고 이끄는 페트루솁스카야의 세계와, 계절의 추이를 가늠하고 오수 이후 하루의 때 조차도 미려하기 그지 없이 포착해 보석으로 테를 두른 일기 같기도 한 콜레트의 나른한 세계는 너무도 멀다. "나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은 다 싫어한다.(109p)" 사례를 나열하며 확고하게 반복하는 콜레트와 달리 살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만 있다면 무엇이든 참아보겠다는 페트루솁스카야의 여자들은 다른 차원의 공기를 마신다.

 

콜레트는 사랑받았던 만큼 빼어난 감수성으로 맘껏 기록하고 창조했던 작가이며,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고 많은 것을 증명했기에 독자에게 용기를 주고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진심 가득한 글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에 시처럼, 노래처럼 아름답다. 점점 더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는 그녀의 어머니 시도는 콜레트에게서 다시 이어진다. 창에서 뛰어내린, 아직 정체불명의 이 새벽이라는 친구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변화하는 형태를 완성할 시간이 부족했는지, 그것은 땅에 닿은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 그것은 숲이 되었고, 물보라가 되었고, 별똥별이 되었고, 무한히 펼쳐지는 책이, 포도송이가, 배가, 오아시스가 되었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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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놀라운 건축 이야기
옌스 한세고드 지음, 안데슈 뉘베리 그림, 이유진 옮김 / 지양어린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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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 한세고드의 건축이야기(안데슈 뉘베리 그림/지양어린이)지구에서 가장 놀라운이라는 수식어를 곁들인 제목으로 호기심 가득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작가인 옌스 한세고드는 이미 지구에서가장 굉장한 동물, 사라진 보물들, 가장 무서운 생명체 등을 발표하며 눈에 띄는 논픽션 작품들을 선보여 왔습니다. “건축이야기의 표지에는 몇 번 쯤 봐왔을 유명한 건축물들이 모여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면지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표지에서 보았던 건축물들 이름과 위치가 적혀있어 한 번 더 눈여겨 보게 됩니다.

 

속표지를 지나 본문이 바로 시작됩니다. “건축이야기는 하나의 건축물을 좌 우 양면을 할애해 그림과 글로 설명해줍니다. 건축물의 이름과 위치는 제목이 되는 셈입니다. 역시 시작은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로 시작되는군요. 피라미드에 얽힌 무수한 정보들 중에서 무엇을 추려 정리했을지 살피는 것 또한 즐겁습니다. 언젠가는 직접 피라미드를 볼 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바래봅니다. 콜로세움과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뒤이으며 총 18가지 건축물을 만나보고 마천루들, 국제 우주정거장,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한 기발한 건축물까지 꼭 알아야 할 특별한 건축물을 탐험하게 됩니다.

 

콜로세움은 거대함 뿐만 아니라 모의 해전을 위해 경기장 안을 물로 채우기도 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노트르담대성당이 철거 위기에 있을 때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이 분위기를 반전시켜 모금운동과 복원을 가능케 했다는 것은 문학의 힘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성바실리대성당의 아름다운 종들을 녹여 없애버린 인간의 비뚤어진 생각은 안타깝고 다행히 하나 남은 종이 여전히 16세기와 똑같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 또한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캘리포니아주 샌호제이의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입니다. 이 집에는 40개의 침실과 2개의 무도회장을 포함해서 160개의 방과 17개의 굴뚝, 3개의 엘리베이터, 10000개의 창문이 있습니다.(28p)"라니, 유령이 길을 잃도록 계획없이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가이드가 없으면 방문객 역시 길을 잃기 쉽다는 이 집은 정말 궁금합니다. 간결하기도 아름답기도 한 만화체의 그림을 감상하는 내내 생각은 꼬리를 뭅니다. 점점 시간을 지나 건축물이 진화하는 모습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점 또한 이 책의 장점입니다. 펼치면 언제든 시작되는 흥미롭고 알찬 책 속 여행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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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2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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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시간은 밤(문학동네/김혜란옮김)은 스스로를 다큐멘터리 작가라 여기고(334p) 취재와 같은 글쓰기를 지속한 작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손녀 톨스타야, 페트루솁스카야보다 5년 늦게 태어나고 개혁정책, 페레스트로이카시기 데뷔한 울리츠카야와 함께) 러시아 3대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페트루솁스카야는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의 아름답고 근사한 실체를 그려내지 않아 오랜 기간 출간 금지 작가로, 발표할 지면을 잃은 채 언더그라운드 연극 등 다른 길을 모색해왔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더욱 적극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폭을 넓혀 예술가로서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은 밤은 열 두 편의 단편과 표제작인 중편 시간의 밤까지 총 열 세 작품을 담고 있다. 자신을 다큐멘터리 작가라 생각했고 보육원과 가정에서 마치 지옥에 갇힌 느낌이었다(335p)”며 어린시절을 회상했듯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의도적 등장인물에서 멈추지 않고 작품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는데 작가가 체험한 분위기 또한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매번 술술 읽히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를 털고 다음 작품으로 편안히 넘어가는 것을 막고, 기대조차 못하게 한다.

 

밀그롬의 마지막 문장이다. 석양빛으로 가득한 5월의 말라야브로나야 거리를 검은 원피스가 어른거리며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고 밀그롬, 영원한 사람 밀그롬은 노인 냄새가 나는 작은 방의 낡은 옷감들 사이에서 조심스러운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자기 인생의 박물관을 지키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26p)” 밀그롬 같은 사람들을 나는 안다.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안고 울어주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자기만의 통곡의 벽 아래서 행복하게 한숨을 내쉬는(25p) 그녀들에게 누가 잘 못 사셨네요비판할 수 있겠나.

 

어두운 운명은 단 세 쪽 분량으로 폭풍같은 한숨을 쉬게 만든다. 결론을 알면서도 괴로움의 늪을 행복하게 선택하고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불가항력의 삶. 어린건지 어리석은 것인지 당신 그러면 안됩니다선을 넘어 제지하고 싶다가도 소심하게 다른 삶을 선택하면 좋을텐데······ 혼잣말로 웅얼거린다. “성모 사건에는 어린 미혼모와 아이가 등장한다. 관계의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앞에 두고 그녀의 말을 옮기면,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다. 지금이었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리라.(45p)“ 하니 백만 번은 들어보고 해본 말이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과식과 소화불량의 우스개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은 연극이다의 사샤, 마지막 문단 역시 독자를 붙든다. 관찰하고 연구하고 수집한 기껏 자료 정도의 삶으로 끝까지 쿨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이유들. 어떤 문제들은 어느 곳이나, 인간 세상 만국 공통이구나 새삼 놀랍기도 하다. “파냐의 가난한 마음쯤에서는 쉬어갈 수 있을까, 역시 아니다. 열악하고 폭력적인 현실은 계속되는데 자신도 모르는 채 빼앗기는 보물들, 그것도 영영 빼앗기고 그 사실조차 은폐되니 파냐 아줌마의 잔상이 먹먹하다. 슬프고 가슴아픈 쇼팽과 멘델스존은 두 노인이 견딘 시간을 독자의 눈 앞에 갖다 댄다.

 

불행하고 비참하고 침묵한 채 혼자 문제를 감당하는 여성들은 계속 등장한다. 남성은 전면에 부각되어 주동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세 얼굴은 작정하고 부당하다 외치고 싶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자연스러운 시간 변조는 그들의 세계에 더 다가가게 만들고 세밀한 심리를 그려낸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으면 노이로제가 생긴다.(130p)” “아마도 료바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아내의 한결같은 태연함을 무너뜨리고, 그 만족감에 상처를 주며, 그녀에게 일종의 행동을,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으리라. 말 또한 일종의 행동이니까.(133p)” 무의미한 비틀림은 자격지심 때문일까, 주도면밀하고 치사하고 악한 그의 행동을 합리화 해보자. 그것은 가족사때문이고 생존에 필요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지적 인간이 무의식 속 욕구불만을 해소하기에 적절한 타자, 약자라 이 목적에 매우 적당하다 예상했으나 예상을 빗나가 누구보다 강자였던 타자와의 심리전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말하고 싶다.

 

할말이 많지만 넘어가자, 넘어가자······ 페트루솁스카야는 독자를 수다장이로 만든다. “아름다운 도시로의 한 줄 요약은 라리사 시기즈문도브나의 슬픈 가족사. 영민한 라리사가 지키고 싶었던 미혼의 어린 딸과 손녀,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하는 제자. 결국 실현되지 못한 천국 같던 한 날을 회상한다로 마친다. 가계도를 그리며 읽게 되는 작품은 가족 찬가시간은 밤이다. “가족 찬가는 독특한 이야기 틀을 통한 군더더기 없는 전개가 근사하다. 사건 개요 3을 보면 단 다섯 줄로 참담 인생을 완벽 구현한다. 작가의 분석적이고 유려한 문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건 개요 55삶은 그후로도 이어졌으니, 가족이여 영원하라.(173p)” 풍자 가득하고 표현이 생생한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비극적 인간의 아등바등을 보면서 왜 자꾸 실소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준비운동이었고 시간의 밤이 열린다. 심리학자와도 같이 예리한 민낯 드러내기, 속마음 파헤쳐 햇빛 아래 차분히 펼쳐 보이기가 정점을 찍는다. 그저 애쓰고 고생하고 혼신을 다한 그녀, 시인이었던 그녀 안나 안드리아노브나, 시인 안나 아흐마또바와 이니셜이 같아 기뻐했던 그녀, ‘나의 수난자,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랑인 아들 안드레이와 나의 수난자, 나의 영원한 고통인 딸 알료나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동시에 열렬히 사랑했던 그녀, 딸의 각각의 자녀들과 자신의 늙어 시설에 맡겨야 했던 엄마 때문에 슬펐던 그녀, 자신의 온전한 시간이라고는 깊은 밤 혼자 글 쓸 수 있었던 순간의 조각들 뿐이었던, 시간이란 자신에게 24시간일 수 없었고 찰나일 뿐이었던 그녀, 현상과 상황을 넘치도록 이해하고 있기에 더 슬프고 내색하지 않기에 더 아픈 상처, 드러난 표면 아래의 진리를 통찰하고 직면하는 그녀, 글쓰기만이 구원이었던 그녀를 깊이 만난다. 혈육이건 남이건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다 알고 있지 싶도록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일말의 오차없이 전달하는 능력이 놀랍다.

 

책을 읽으며 불편하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들, 너무 현실과 흡사해 민망하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무얼까, 왜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감당할 부담에 비현실의 고뇌를 보탬으로써 입체적 균형을 맞추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경고에 민감해지고 익숙함에 경종을 울리고 잿더미 속 불씨를 눈여겨 보기 위함이 아닐까, 그 불티가어쩌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올라 나무내와 온기를 내줄지도 모를 일이니까.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가림막도 커튼도 잡아뗀 생경한 글은 우리의 오감을 단련함으로써 안나 안드리아노브나가 살아내지 못했지만 살기를 원했던 삶의 가능성을, 천국의 시간을 독자에게만은 돌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녀를, 그리고 많은 그녀들을 생각하며 안나 아흐마또바의 시를 읽고 싶어지는 겨울이다.

    

 

책속에서>

어머니, , 이 얼마나 성스러운 단어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아이에게, 아이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들이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버려질 것이다. 아아아.(시간은 밤, 225p)

 

알료나는 내 시를 창피해했다. 하지만 나는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시간은 밤,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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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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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문학동네/오진영 옮김)은 그가 리스본의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책을 출판하기 원하는 페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사람의 일기이자 고백록인 사실 없는 자서전을 말한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르난두 페소아는 시와 산문을 포함해 다양한 영역의 저술을 남겼으나 생전 출간작은 영어와 포르투갈어 시집 총 네 권 뿐이며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저술 대부분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채 여전히 분류 작업중이라니(592p) 실로 놀랍다.

 

페소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명’, 즉 가상 인물이다.(594p)” 상상 친구를 소재로 하는 인상깊은 동화작품들을 떠올릴 때 페소아는 특정 시기의 상상 친구로써 무심히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으로 정밀하게 형상화한다. 함부로 현실이라 부르는 대상과 생생한 비현실 속 인물(594p)을 놓고 볼 때 현실과 비현실을 마술을 시연하듯 뒤섞는다. 이렇게 생명을 불어넣고 작가의 이명으로 활약하도록 만든 가상인물은 70개가 넘고, 그 중에서도 페소아에게 가장 근접한 아바타 격 인물이 불안의 책의 서술자 페르나르두 소아르스다. 여성 페르소나 마리아 주제까지 알고 나면 페소아가 구축한 세계, 그의 천재성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불안의 책은 번호가 붙은 481개의 단상으로 한 두줄의 짧은 글부터 페이지가 넘어가는 경우까지 분량은 유동적이다. 드물게 소제목을 갖춘 글도 있고 알아보기 어렵거나, 추측했거나, 빈 칸인 경우까지 발견된 작가의 글을 최대한 근접하게 복원하고 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거듭 변주하는 글, 개념을 정리하고 자신의 말로 정의 내리는 글, 평범한 현상을 비범한 시선과 조건으로 비틀어 보는 글, 자신 안으로 침잠하며 숲을 이야기하다 나뭇잎의 세포까지 돌연 해체시키는 글, 강조와 변화, 비유등 수사법의 온갖 치장을 은근히 장식하는 글, 유쾌한 비약으로 웃음짓게 하는 글, 극한의 상상력을 자랑하는 글, 찬성이요 또는 난 반대요 거수하게 하는 글, 염세주의자로군 싶게 한없이 소진시키는 글, 바로 어느 틈에 나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다.(509p)” 몇 번이고 선언하는 글, 단단하고 가슴벅찬 긍정의 표를 슬쩍 건네는 글······ 페소아의 문장은 독자를 데리고 떠난다. 한 걸음씩 더 깊은 미지의 곳으로.

 

글의 후반에 페소아는 내가 인생에서 맡고 싶은 역할은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때 사회 법칙의 영향은 점점 더 적게 받고 대신 자신의 판단을 더 따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다······영혼의 상처를 소독하고 처치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저속함에 오염되지 않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되고 싶은 자기 관리 교육자가 껴안을 수 있는 가장 찬란한 운명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의견에 완전히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운다면-주제의 성격이 그렇듯 당연히 천천히-이는 내 삶의 학문적 정채를 보상하고도 남는 꽃다발일 것이다.(479p)”라고 밝힌다. 그는 결벽의 정신이며 페트리 접시에 담긴 증류수를 연상케 한다. “불안의 책을 읽으며 가장 떠오르는 작품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였다. 오래 전에 읽었던 말테의 부럽고 아름다운 공간이 재현되는 느낌에 행복했다.

 

줄 친 부분은 물론 박스로 묶거나 온갖 기호로 표를 하며 읽었던 부분, 특히 글쓰기, 문학, 독서, 부조리를 다루는, 그리고 다시 읽어야 할 그 많은 부분을 다 옮길 수 없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책,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책, 동시에 끝나버림이 아쉽기 그지없는 책이다. 이제 페소아를 조금이나마 더 기억하기 위해 타부키의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을 읽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수많은 이명 속에서 익명이었던 페소아 자체 같이 슬프고도 사실적이다. 내일이면 나 역시, 그렇다, 느끼고 생각하는 영혼이며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우주인 나 역시 이 거리를 더 이상 지나지 않을 테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어떻게 됐지?’라고 어렴풋이 떠올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일, 내가 느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일상의 거리에서 사라진 한 명의 행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리라.(587p)”

 

책 속에서>

그러면서 거의 아무 생각 없이 나는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인류가 이렇게 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의식 수준이 높든 낮든, 정체해 있든 활발히 움직이든,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똑같이 무심하고, 각자의 목적을 똑같이 포기하고, 인생을 똑같이 느끼면서 살아간다.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를 볼 때마다 나는 인류를 떠올린다.(4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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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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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열린책들/이상룡 옮김)』은 5대 소설 중에서 악령을 쓴 지 5년 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쓰기 5년 전, 작가적 역량이 거의 정점에 있을 때 완성한 작품이다.(987p) 러시아 문학가의 양대 산맥 중 한 축이자,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보여주었던 지적인 경지는 미성년또한 특별한 기대로 책장을 넘기게끔 이끈다. 그러나 읽을수록 탄력을 받으며 몰입하기 보다는 내가 뭘 잘못 읽고 있는 걸까스스로를 의심하며 석연치 않은 심정으로 무한 기다림의 챗바퀴를 돌리는 기분이 든다. 후반에 실린 작품 평론에서 역자도 단일한 의미를 담아낼 한 문단 안에서 조차 흐름이 각각인 지향점이 있다, 서술이 통일적이지 않다, 묘사가 명료하지 않다등 지적하며 이 작품은 다른 4대 장편들에 비해서 작가의 고유한 주제 의식이 제대로 형상화 되지 않았다는 문학적 평가를 받아왔다(993p)”고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모든 구성요소가 그 자체로 꼭 필요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 작품의 목표, 존재 의의임을 이해하게 한다.

 

첫 문장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꼭 써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두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처음으로 인생이라는 무대에 들어설 무렵에 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상권, 11p)” 이것이 작품의 중심이다. 물론 덧붙임은 계속된다. ‘이제 100살이 되더라도 더 안쓸 것이다, 상세히 내면을 기록하려고 썼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수식없이 쓰겠다, 작가가 될 생각은 없다, 이런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계속 한다는 것! 무려 1000페이지를 채운다는 것,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미성년 주인공 아르까지 마까르비치 돌고루끼가 1인칭 서술자로 자신이 경험한 시간을 기록하는 성장 일지, 성장 수기다. 작품의 첫 문장 만큼 313장 결말 중 3, 마지막 네 페이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의 목소리임을 누구라도 알아챌 만하게 해설 격의 총정리를 해준다. 톨스토이의 자전적 3부작과의 비교는 물론 작품의 의의와 예상가능한 미래의 쓰임에 대해서까지 마무리를 한다. 시작과 끝은 정연하고도 분명하다. 문제는 그 사이다. 이 사이는 굵은 거미줄과 같으니 그 중에서 자신에게 더 의미있는 가닥을 선택해 줄을 따라가며 숙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제법 간단해질지도 모른다.

 

아르까지 마까르비치 돌고루끼는 지주이자 귀족 미망인인 베르실로프(안드레이 뻬뜨로비치)의 서자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베르실로프는 전처의 자녀와의 관계 이외에 실질적 가정을 아르까지와 리자의 어머니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꾸린 상태이지만 여행과 방랑의 이유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아내를 빼앗긴 또는 인류애적 차원에서 내어준 마까르 이바노비치 돌고루끼는 베르실로프의 하인이지만 아르까지 4인 가족의 마음의 지주이자 영적 순례자로 자리매김하고 임종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유산을 물려준다. 본인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독특한 처지로 세상에 던져진아르까지는 자의식이 생긴 이후 자기만의 사고와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부모 특히 친부인 베르실로프를 향한 분노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민감한 영혼인 아르까지는 베르실로프를 점차 동경하고 양가감정의 혼란 속에 조금씩 마음을 연다.

 

 

성년이 아닌 나이, 민법상 만 19세 미만미성년의 사전적 정의다. 부당함에 처한 소년의 성장기로 읽히다 어느 순간 베르실로프와의 대화중 솔직한 고백에 이르면 초첨은 아버지에게로 이동한다. 성인인 베르실로프 또한 불안정한 미성년임이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인데 미성년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네 싶어진다. 정말로 마치 내가 둘로 갈라지는 듯해요.(881p)” 베르실로프의 미성숙함은 점진적이고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다급하게 쫓기던 분신의 골랴드낀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 섬망에 시달리며 악마와 대화를 이어가던 이반을 연상케한다. 미성년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신체적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분열과 부조화, 방랑과 불안, 통제불능의 의지를 상징하며, 반면 통합과 조화, 내적 안정으로의 회귀와 신뢰, 배려는 닿고자 목표하는 극단에 존재한다.

 

그 외 각 인물이 간직한 서사도 다양해서 앞서 말했듯이 거미줄 한 가닥씩을 따로 살펴봄직 하다. 작품 전체에서 인물과 관계를 안정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따찌아나 빠블로브나 여지주는 바보, 이 멍청이야, 광대 같은 녀석······’ 등 아르까지를 향한 답답함을 거친 말로 내뱉으며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때가 되지 않으면 모르는 법,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겠다. 옆에서 숨어 엿듣게 되는 연극적 장면들, 작가의 경험이 묻어난 듯 한 도박 장면, 예언과도 같은 꿈, 옷 안쪽으로 실로 꿰멘 편지와 집착하는 무리들, 카라마조프 부자가 글루셴카를 동시에 사랑하듯 까쩨리나 니꼴라예브나를 향한 베르실로프와 아르까지의 사랑, 아르까지의 어머니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돌고루까야의 삶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뛰어드는 문장들과 에피소드와 인용 작품들 등 살필 것은 무궁무진하다.

 

 

도스토옙스키적 문장이 어떠하리라 짐작했음에도 쉼없는 장광설은 마음을 다잡게 한다. 사건을 전개시키다 직전 또는 직후의 예기치 못한 상황이 기존의 진행 궤도를 바꾸는데 그 사이에 들어갈 퍼즐은 매번 새로운 우연, 새로운 사실이다. 이는 도로의 차선에 서둘러 합류하듯이 겹쳐 들어오곤 한다. 혼돈 상태에서 방향을 잃고 천방지축 사방으로 달리는 인물 아르까지와 함께 달리느라 숨이 찬 시간이었다. 동시에 천방지축도 때가 있다, 늙어서까지,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후에까지 미성년으로 고착되어버린 많은 사람들, 자신의 미숙함은 모른 채 타인을 지적하고 교정하겠다 발벗는 많은 사람들도 떠올라 씁쓸하다. (애쓰는 모두가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정신없음 가운데 내내 불평하며 읽어나가는 독자를 묵묵히 내버려두는 작가의 의도도 조금은 이해된다. 아마 그래서 5대 소설일 것이다. 괄호로 묶는 조건으로,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밝았다.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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