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2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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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시간은 밤(문학동네/김혜란옮김)은 스스로를 다큐멘터리 작가라 여기고(334p) 취재와 같은 글쓰기를 지속한 작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손녀 톨스타야, 페트루솁스카야보다 5년 늦게 태어나고 개혁정책, 페레스트로이카시기 데뷔한 울리츠카야와 함께) 러시아 3대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페트루솁스카야는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의 아름답고 근사한 실체를 그려내지 않아 오랜 기간 출간 금지 작가로, 발표할 지면을 잃은 채 언더그라운드 연극 등 다른 길을 모색해왔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더욱 적극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폭을 넓혀 예술가로서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은 밤은 열 두 편의 단편과 표제작인 중편 시간의 밤까지 총 열 세 작품을 담고 있다. 자신을 다큐멘터리 작가라 생각했고 보육원과 가정에서 마치 지옥에 갇힌 느낌이었다(335p)”며 어린시절을 회상했듯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의도적 등장인물에서 멈추지 않고 작품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는데 작가가 체험한 분위기 또한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매번 술술 읽히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를 털고 다음 작품으로 편안히 넘어가는 것을 막고, 기대조차 못하게 한다.

 

밀그롬의 마지막 문장이다. 석양빛으로 가득한 5월의 말라야브로나야 거리를 검은 원피스가 어른거리며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고 밀그롬, 영원한 사람 밀그롬은 노인 냄새가 나는 작은 방의 낡은 옷감들 사이에서 조심스러운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자기 인생의 박물관을 지키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26p)” 밀그롬 같은 사람들을 나는 안다.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안고 울어주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자기만의 통곡의 벽 아래서 행복하게 한숨을 내쉬는(25p) 그녀들에게 누가 잘 못 사셨네요비판할 수 있겠나.

 

어두운 운명은 단 세 쪽 분량으로 폭풍같은 한숨을 쉬게 만든다. 결론을 알면서도 괴로움의 늪을 행복하게 선택하고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불가항력의 삶. 어린건지 어리석은 것인지 당신 그러면 안됩니다선을 넘어 제지하고 싶다가도 소심하게 다른 삶을 선택하면 좋을텐데······ 혼잣말로 웅얼거린다. “성모 사건에는 어린 미혼모와 아이가 등장한다. 관계의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앞에 두고 그녀의 말을 옮기면,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다. 지금이었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리라.(45p)“ 하니 백만 번은 들어보고 해본 말이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과식과 소화불량의 우스개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은 연극이다의 사샤, 마지막 문단 역시 독자를 붙든다. 관찰하고 연구하고 수집한 기껏 자료 정도의 삶으로 끝까지 쿨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이유들. 어떤 문제들은 어느 곳이나, 인간 세상 만국 공통이구나 새삼 놀랍기도 하다. “파냐의 가난한 마음쯤에서는 쉬어갈 수 있을까, 역시 아니다. 열악하고 폭력적인 현실은 계속되는데 자신도 모르는 채 빼앗기는 보물들, 그것도 영영 빼앗기고 그 사실조차 은폐되니 파냐 아줌마의 잔상이 먹먹하다. 슬프고 가슴아픈 쇼팽과 멘델스존은 두 노인이 견딘 시간을 독자의 눈 앞에 갖다 댄다.

 

불행하고 비참하고 침묵한 채 혼자 문제를 감당하는 여성들은 계속 등장한다. 남성은 전면에 부각되어 주동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세 얼굴은 작정하고 부당하다 외치고 싶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자연스러운 시간 변조는 그들의 세계에 더 다가가게 만들고 세밀한 심리를 그려낸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으면 노이로제가 생긴다.(130p)” “아마도 료바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아내의 한결같은 태연함을 무너뜨리고, 그 만족감에 상처를 주며, 그녀에게 일종의 행동을,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으리라. 말 또한 일종의 행동이니까.(133p)” 무의미한 비틀림은 자격지심 때문일까, 주도면밀하고 치사하고 악한 그의 행동을 합리화 해보자. 그것은 가족사때문이고 생존에 필요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지적 인간이 무의식 속 욕구불만을 해소하기에 적절한 타자, 약자라 이 목적에 매우 적당하다 예상했으나 예상을 빗나가 누구보다 강자였던 타자와의 심리전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말하고 싶다.

 

할말이 많지만 넘어가자, 넘어가자······ 페트루솁스카야는 독자를 수다장이로 만든다. “아름다운 도시로의 한 줄 요약은 라리사 시기즈문도브나의 슬픈 가족사. 영민한 라리사가 지키고 싶었던 미혼의 어린 딸과 손녀,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하는 제자. 결국 실현되지 못한 천국 같던 한 날을 회상한다로 마친다. 가계도를 그리며 읽게 되는 작품은 가족 찬가시간은 밤이다. “가족 찬가는 독특한 이야기 틀을 통한 군더더기 없는 전개가 근사하다. 사건 개요 3을 보면 단 다섯 줄로 참담 인생을 완벽 구현한다. 작가의 분석적이고 유려한 문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건 개요 55삶은 그후로도 이어졌으니, 가족이여 영원하라.(173p)” 풍자 가득하고 표현이 생생한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비극적 인간의 아등바등을 보면서 왜 자꾸 실소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준비운동이었고 시간의 밤이 열린다. 심리학자와도 같이 예리한 민낯 드러내기, 속마음 파헤쳐 햇빛 아래 차분히 펼쳐 보이기가 정점을 찍는다. 그저 애쓰고 고생하고 혼신을 다한 그녀, 시인이었던 그녀 안나 안드리아노브나, 시인 안나 아흐마또바와 이니셜이 같아 기뻐했던 그녀, ‘나의 수난자,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랑인 아들 안드레이와 나의 수난자, 나의 영원한 고통인 딸 알료나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동시에 열렬히 사랑했던 그녀, 딸의 각각의 자녀들과 자신의 늙어 시설에 맡겨야 했던 엄마 때문에 슬펐던 그녀, 자신의 온전한 시간이라고는 깊은 밤 혼자 글 쓸 수 있었던 순간의 조각들 뿐이었던, 시간이란 자신에게 24시간일 수 없었고 찰나일 뿐이었던 그녀, 현상과 상황을 넘치도록 이해하고 있기에 더 슬프고 내색하지 않기에 더 아픈 상처, 드러난 표면 아래의 진리를 통찰하고 직면하는 그녀, 글쓰기만이 구원이었던 그녀를 깊이 만난다. 혈육이건 남이건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다 알고 있지 싶도록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일말의 오차없이 전달하는 능력이 놀랍다.

 

책을 읽으며 불편하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들, 너무 현실과 흡사해 민망하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무얼까, 왜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감당할 부담에 비현실의 고뇌를 보탬으로써 입체적 균형을 맞추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경고에 민감해지고 익숙함에 경종을 울리고 잿더미 속 불씨를 눈여겨 보기 위함이 아닐까, 그 불티가어쩌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올라 나무내와 온기를 내줄지도 모를 일이니까.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가림막도 커튼도 잡아뗀 생경한 글은 우리의 오감을 단련함으로써 안나 안드리아노브나가 살아내지 못했지만 살기를 원했던 삶의 가능성을, 천국의 시간을 독자에게만은 돌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녀를, 그리고 많은 그녀들을 생각하며 안나 아흐마또바의 시를 읽고 싶어지는 겨울이다.

    

 

책속에서>

어머니, , 이 얼마나 성스러운 단어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아이에게, 아이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들이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버려질 것이다. 아아아.(시간은 밤, 225p)

 

알료나는 내 시를 창피해했다. 하지만 나는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시간은 밤,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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