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득(1816/문학동네/원영선 전신화 옮김)은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로 1817년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출간되었으며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이러한 명성은 대문호의 마지막 작품들, 괴테의 파우스트나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등 대작가들의 유작과 의미를 생각할 때 제인 오스틴 사상의 정수가 담겼으리라는 기대를 높힌다. “오스틴은 자신의 표현 그대로 ‘2인치의 상아섬세한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정교한 필치로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세상사를 그려낸다.(339p)”는 해설처럼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세상사21세기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현재일 수 있는 감정과 삶의 면면, 불변의 진실을 말한다는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다.

 

앤의 애착과 회한은 젊은 시절 누려야 할 모든 즐거움에 기나긴 먹구름을 드리웠고, 그로 인해 일찍 시들어버린 생기와 젊음은 오래도록 회복될 줄 몰랐다. 이 가슴 아픈 작은 사건이 끝난 지도 칠 년이 넘었다.(40p)” 엘리엇 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열아홉 살 때 주변의 설득으로 사랑했던 사람과의 결혼을 이루지 못했고 스물 일곱이 된 지금 과거의 사랑과 재회하게 된다. 영향력 있고 지혜롭다 여겨지는, 거절하기도 어려운 주요 주변인들의 조언과 설득을 받아들였던 그때의 자신그로 인한 결과’, 금의환향하여 다시 모습을 드러낸 웬트워스 대령과 새롭게 설정되는 관계들이 집중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안타까워한들 어찌하랴! 냉정을 찾으려는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난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마음에 팔 년이란 세월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알아버렸다.(82p)”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엘리자베스의 본심은 기준점이 되어 상황 전개에 맞춰 그녀의 행동과 마음을 가늠하고 예측케 한다. 제목이기도 한 설득은 상황별로 다채로운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과거를 도가 지나친 설득의 결과였고, 나약함과 소심함의 결과였다(84p)’고 진단한다.

 

엘리자베스와 웬트워스 대령의 애정 행로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성장 서사도 주요 모티프다. 요 몇 년간 앤은 훌륭한 친구인 레이디 러셀이 자신과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95p)” 기본적으로 지혜롭고 사려깊은 엘리자베스는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 간의 관계나 숨은 의도를 경험하며 분별과 통찰력을 키워간다. 이해하는 만큼 수용의 폭은 넓어지고 사고의 조율은 민감해진다. 또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단지 부드러움과 기백이 양립할 수 없다는 흔해빠진 생각에 반대하고 싶었을 뿐, 벤윅 대령의 행동거지가 최고라고 대변하려던 것은 아니었다.(228p)”, “교활함이란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뭔가 불쾌한 것이 있어요. (275p)”

 

시간이 흐른 후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과거 그때처럼 레이디 러셀에게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는 확실히 쌀쌀하게 대해, 이제까지 조금씩 쌓인 불필요한 친밀감을 가능한 한 말썽 없이 줄이고자 했다.(284p)” 의도를 가지고 포장된 인격은 가면이 벗겨질 때 많은 것을 망가뜨린다. 엘리자베스의 판단과 행동은 내내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용기있는 실천가다. 무슨 일이든 가능했다. 무슨 일이든 알고 맞서는 것이 마음 졸이는 것보다는 나았다.(314p)”

 

재빨리 사물을 인지하고 인물됨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험으로도 얻을 수 없는 타고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331p)” 편견과 의심과 속단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일은 레이디 러셀 뿐 아니라 너무도 쉽게 맞닦뜨리게 되는 모두의 속성이다. 이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일, 보이는 것 넘어 있는 진실에 닿기 위해 애쓰는 것은 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부부가 사는 여러 방식, 혈연 관계임에도 너무도 개성적인 개인일 수 밖에 없는 자매들, 그러도록 또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얘기좀 해주셨으면 합니다.(61p)”로 통일되는 반복적 의뢰(‘당신이 설득하면, 한마디만 하면 들을거에요. 내 말은 안듣거든요.’의 여러 버전)의 부담-이건 정말 너무하는 것이다-은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았고, 사랑과 우정의 역동 관계, 선택의 문제와 추구해야 할 가치 등 세련된 문장으로 읽는 제인 오스틴은 늦게나마 오스틴 월드에 입성케 한다. 아직 읽어야 할 작품이 남아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책을 덮는다.

 

 

 

 

책 속에서>

-이 모든 소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려 작정한 듯 맹렬히 타오르는 크리스마스 장작불이 전체 그림을 마무리 지었다. 177p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소음에도 사람마다 나름의 취향이 있게 마련이다. 소리는 크기보다도 종류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도 들리고 아주 거슬리게도 들리니 말이다. 178p

- 벽난로 위의 우아한 작은 시계가 은빛 소리로 11를 알렸고, 멀리서 야경꾼이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0p

- 앤은 나이를 먹으면 현명하고 이성적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 슬프게도 아직 현명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3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소담출판사/이상훈 옮김)1865년 발표한 표제작과 쌈닭두 편을 묶고 있다. 창작 초기 그의 고향 오룔 부근의 여성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열두 편의 시리즈를 쓰려던(278p) 작가의 원래 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불도장을 찍은 듯 강렬한 작품의 여운을 생각할 때 궁금해지고 아쉬운 마음이다. 톨스토이도 극찬했고 문학사가 미르스키도 러시아 작가 가운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293p)’라 칭했던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16년 후 출간되는 왼솝잡이와는 꽤 다른 분위기로 독자를 데려간다.

 

나는 그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데, 이것은 내가 가르침을 얻은 곳이 학교가 아니라, 바로 스콧의 범선이었기 때문이다.(268p)"라고도 했듯이 처한 환경으로부터 얻은 경험은 작가를 스쳐가는 법이 없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도 그 당시의 젊은 며느리에 의한 엽기적인 시아버지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삼기에 더욱 놀랍다. 원제는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지만 제목의 상징성 또한 멈춰 생각하게 만든다. 권력욕과 야심을 일깨우며 남편을 끝까지 밀어 붙였던, 결국은 함께 파멸하고 만 그녀는 주인공 카테리나 리보브나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지 집중하게 만든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의 제사노래는 처음 부르기가 어려운 법이다.-러시아 속담는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도를 높혀갈 카테리나 리보브나의 악행, 살인을 암시한다. 우리 지방에선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생각할 때마다 영혼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인물들이 간혹 나온다.(11p)"라는 첫문장은 비극의 서막을 연다. 젊은 나이에 나이 많은 남편과의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러시아의 권태에 둘러싸여 6년을 보내는 동안 진저리치며 본성을 억눌렀던 그녀는 본래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인 세르게이의 유혹에 이끌려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이후 그녀의 행보는 너무도 쉽게 극단으로 치닫지만 결국은 비열한 세르게이의 정체 앞에 마지막 선택을 한다. 제동을 걸어줄 무언가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싶지만 그녀의 감정도 행동도 가속도를 더해가며 일방향으로 전진한다.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오페라에서 영화로 까지 잊혀지지 않는 전형으로 드러난다.

 

쌈닭은 레이스 상인이자 중매쟁이로 끝도 없는 사건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또는 일을 만들어서 스스로 처하곤 했던 돔나 플라토노브나의 이야기를 화자인 의 목소리로 전달한다. 그러나 이후 시종일관 이어지는 대화체의 문장은 레스코프 문학의 특징이라는 스카즈 장르’, 즉 살아있는 구어체를 재현하려는 일종의 문체양식(276p)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페트루셰프스카야 등 현대 여성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이 문체는 시간의 밤(문학동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넘치는 자기 확신으로 펼쳐 보이는 이야기들은 시작과 끝이 정연하지 않고 새로운 곁길이 불쑥 돌출하며 이어지곤 한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에 형식은 주고 받는 대화일지언정, 혼자 말할 뿐 상대 목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타인의 감정은 조금도 배려하거나 공감할 줄 모르고 자기딴에는 선한 의도가 상대방을 비참의 수렁으로 천진하게 내몬다. 눈물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눈물은 눈물일 뿐이에요. 당신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눈물로는 돈이 생기지 않아요.(149p)" ”그거야 세상사가 그렇지. 사람이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고 느끼면 곧바로 돼지가 되거든.(184p)" 때론 헛웃음이 새나오는 비유로, 정작 본인은 유머와 풍자를 의식할 여유라곤 없이 오로지 진지하게 거침없는 의견을 내뱉는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착각들조차 조금도 의심할 줄 모르는 그녀는 왜 이런 여인, “쌈닭이 되었을까. 책 속에서 직접 묻고 있다. 그럼에도 돔나 플라토노브나,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202p)" 그리고 페테르스부르크의 물정에 대해 알려준다. 페테르스부르크의 물정이라는 것은 돔나 플라토노브나나 그와 비슷한 존재를 생성시키고 발달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무턱대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레카니다 같은 사람들을 그녀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203p)“ 돔나 플라토노브나의 사연과 마지막 장들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에서 잊기 어려운 두 개성적인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 펼쳐볼 책 광대 팜팔론에서는 조금 더 웃음기 있는 세상이 전개될지, 21세기에 만난 19세기 러시아 여성들은 한참 쓴 여운을 남긴다.

 

 

책 속에서>

-그 어떤 혐오스러운 상황에서도 인간은 적응을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보잘것없는 기쁨이라도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아무것에도 적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세르게이를 보았고, 그와 함께라면 유형지로 떠나는 길도 기쁨이었다. (8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타르인의 사막(문학동네/한리나 옮김/1940)』은 환상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며 보르헤스, 쿳시 등 대가들의 찬사를 받은 디노 부차티의 국내 초역 장편이다. 글쓰기 이외에도 그림, 무대 디자인 등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함을 증명했던 그는 스스로를 기자와 작가를 취미로 하는 화가라고 일컫는데 시선을 뗄 수 없는 표지의 삽화 역시 부차티의 작품이다. 중국어판과 영어, 프랑스 판의 표지 역시 요새를 내세우지만 부차티의 그림은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장교로 임명된 조반니 드로고가 도시를 떠나 그의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향한 것은, 9월 어느 아침이었다.(7p)”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도시를 떠나며 드로고가 떠나야했던 것들, ‘요새로 향하며의심과 열망을 비롯한 감정의 격동과 동시에 그가 겪어낸 것들과 매번 같은 얼굴이지만 현격히 멀어져 가는 ‘9월 어느 아침들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9월의 어느 아침들은 하루의 어느 때, 사계절의 어느 시기로건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요새로 가는 길에 들은 말들, 요새라니요?”, “무슨 요새 말입니까?(11p)”에서는 이제 시작이군!’하는 혼잣말을 내뱉게 한다. 부차티가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왔다는 해설의 소개처럼 도입부에서 또렷이 연상되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요새를 찾아가는 드로고의 여정이 카프카의 에서 성을 찾아가는 토지측량사 K나 알바로 무티스의 작품에서 제제소를 찾아가는 마크롤 가비에로와 겹쳐 보인다.

 

 

요새에 들어섰으나 드로고의 마음은 불편하다. 지금 돌아가고 싶다, 당장 돌아가겠다고 말하나 절차때문에 적어도 이 주 정도는 걸린다는 답을 듣는다. ‘이 주의 유예중위가 여기서 넉 달을 머무른다면 최선의 해결책이 될 겁니다.(34P)”라는 말로써 넉 달로 연기되고 보이지 않는 올가미는 마련된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잠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60P)”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라니! 한참을 이 문장에 빠져있다.

 

 

시간을 말하는 작품들은 주저없이 선택하고 아끼게 되는데 타타르인의 사막시간의 해부도라 볼 만큼 시간이 간직하고 있는 거의 모든 ’, 드러나 있거나 숨겨진 비밀들을 끌어내 펼쳐보인다. 문장까지 아름답고 처연하게,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시간을 그려내기에 읽는 내내 허망함과 긴장, 슬픔과 후회, 무엇도 담보할 수 없는 미미하고 소모적인 인간 조건인 노력 또는 노오력에 부대낄 수 밖에 없었다. 드로고가 겪는 감정들과 때로 전면에 드러나는 두려움은 곧 나의 것이고, 매마른 땅을 바라보는 눈은 그가 아닌 독자의 것이라는 사실에 더 늦기 전에 도망쳐, 드로고! 지금 속고 있는 거야!” 그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무엇으로부터?’ 라 묻게 된다. 요새로부터, 사막과 타타르인의 전설로부터, 환영이나 망상으로부터,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허울뿐인 자부심으로부터, 머리를 쓰고 너를 속이며 가장무도회를 끝내지 않는 악한 동료들로부터! 그러나 결국 시간으로부터, ‘으로부터에 이르자 도망치는 것은 그 무엇도 고칠 수 없음을, 우린 결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만다. 좋은 것은 뒤에, 아주 뒤에 있는데, 그가 모른 채 그 앞을 지나쳐버렸다고. , 되돌아가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고, 뒤에서는 그를 쫓아오는 무리의 웅성거림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하지만 텅 빈 하얀 길 위에서, 그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63P)” 모른채 지나가 버렸던 그 많은 것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저 스쳐버렸던 그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71P)”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을까 물었을 때 이미 너무 늦었다, 또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하는 변명이 따른다. 시간은 드로고를 비롯한 사람들을 길들이고 익숙한 습관은 무감각한 일상으로 안락함을 선사한다. 실존과는 거리가 먼, 그 순간에도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도피하고 있음을 감추는 안락함이다. 한편, 책상 맞은편의 시계추는 계속해서 삶을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141P)”

 

 

초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비열하고 이기적인 본성에 충실한 모략과 갈등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인간의 여러 유형이 단순하기에 더 웅장한 서사 아래 경고하듯 흔적을 남긴다. 마치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을 것처럼 내일 해야 할 일······(167P)”을 마지막 말로 남기는 앙구스티나는 어리석은 것인가, 애처로운 것인가, 누구나 그럴 것인가. 그때로부터 사 년이 지났다. 인생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었다. 수많은 희망이 옳았음을 보여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은 쏜살같이 지나갔다.(173P)” 작품 속 시간의 흐름은 귓전에 초침이 울리듯 점점 압박감을 더해가고 꽤 실제적으로 감각된다.

 

 

미처 자각할 틈도 없이 우리가 맞을 마지막 시간. 드로고는 삶의 중요한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환상을 놓지 않는다. 그는 결코 오지 않은 자기의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 다가올 시간이 무한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낭비해도 되는 무궁무진한 부유함처럼 여겨졌던 옛 시절이 더는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241P)” 새로 부임해 오는 중위를 우연히 만나는 드로고는 오래전 기억속에 생생한 그날을 떠올린다. 계속해서 또 다른 조반니 드로고들은 요새에 도착할 것이고 떠날 것인지, 어떤 교훈도 약속도 없이, 마치 시지프스처럼! 드로고가 마지막 적, 북쪽의 이민족 타타르인이 아닌 인류 공동의 적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들은 가슴아픈 여운을 남긴다.

 

 

군에서는 이 년이라는 시간은 사회 경력상 사 년에 해당한다고(18P) 유혹적인 조건을 내놓기도 하면서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에 견주어 퇴색되지 않을 의미로 남을 수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익숙한 습관이 주는 편안함을 경계하기 위해 깨어있는 의식을 경주할 것, 그와 같은 나의 익숙함의 고리는 무엇일까도 되새겨본다. 때론 장편의 연작시같고 꿈속 장면에서는 동화 같기도 해서 하나의 소설 안에서 다채로운 감동을 경험했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만큼 다음 독서로 이어질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부차티의 단편집 “60개 이야기가 출간을 앞두고 있다니 설레인다. 기다리는 동안 발레리오 주를리니 감독의 영화로, 그 안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주제 음악으로 맥박에 맞춰 심장이 뚝뚝 떨어지는 것같은 작품 타타르인의 사막을 감상하며 기억하려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재독겠지만. 어쩌면 발췌와 필사도 필요한 새겨야 할명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엔지니어가 될 거야 BBC 과학 프로그램 진행자인 시니 소마라 박사가 들려주는 직업 이야기
시니 소마라 지음, 나자 사렐 그림, 박정화 옮김 / 바나나북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니 소마라 박사의 나는 엔지니어가 될 거야(바나나BOOK/나자 사렐 그림)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엔지니어에 대해 알려주는 진로 그림책입니다. 공학박사이며 엔지니어인 시니 소마라는 과학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어린이책 작가이기에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안내자가 분명합니다. 엔지니어는 자주 들을 수 있는 익숙한 직업이지만 곧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전체의 일부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스칩니다. 답을 찾아가는 길, 엔지니어를 꿈꾸는 친구들과 그 세계를 함께 탐색해 볼 생각에 설레이네요.

 

화사한 하늘색 표지, 이 소녀도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면지를 여니 종이비행기 접는 순서가 그려져 있어요. 나도 아는데, 하지만 뭔가 다른 부분이 눈에 띕니다. 종이를 가져오게 되네요. 이야기가 시작되고 첫 장면인 세아의 방에는 여러 모양의 종이 비행기가 보입니다. 다른 종이로, 다른 크기로 접은 비행기들과 구긴 종이뭉치도 보이는데 이번 비행기 역시 나는 듯 하다 바로 추락하네요. 이때 할머니가 접은 종이비행기는 멋지게 날아갑니다.

 

할머니와 집을 나선 세아는 가는 길에 만나는 궁금한 것들을 실컷 질문합니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크레인과 불도저, 늘 멋진 롤러코스터와 에스컬레이터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배워갑니다. ‘주파수 도약기술을 만든 헤디 라머와 알리시아에스볼러 데이비스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즐루 칸 등 훌륭한 엔지니어들도 새롭습니다. 이 날의 외출은 세아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 같습니다. 할머니는 비행기를 설계한단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사람들처럼 할머니도 엔지니어란다. 최고의 직업이지. 늘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문제점을 해결한단다. 엔지니어가 된다는 건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낸다는 거야.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거지!(책 속에서)” 할머니는 세아 뿐 아니라 모든 친구들에게 엔지니어의 세계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은 관찰하고 질문하고 도전하는 일련의 과정을 즐기도록 질문을 던집니다. “왜 뜨거운 음식은 결국 차갑게 식을까요?”같은 질문이에요. 또한 엔지니어의 문제 해결법으로 아이디어와 실험 예시가 재미있게 담겨 있어요. 복잡해서 모르겠다 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나 크레인의 구조도 핵심을 부각한 그림으로 보니 신기하고 궁금증을 채워줍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채와 인물의 표정이 딱딱할 것 같은 지식 그림책을 푹 빠져서 즐기게 해주네요. 이제 이 책 한 권이면 엔지니어는요~”하고 자신있게 말하고 또 꿈을 키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직업 이야기도 기다려집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와 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4
귄터 그라스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1961/문학동네/박경희 옮김)』 는 작가의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하는 단치히 3부작 중 한 권으로 첫 소설 양철북 다음에 출간되었다. 올해가 귄터 그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육 년, “고양이와 쥐”가 발표된 지 육십 년이 되는 해(194p)라는 말에 조금 더 일찍 귄터 그라스를 접하지 않았고, 못했던 스스로가 아쉽다. 출간 후 환영보다는 비판과 논란에 시달렸다는 “고양이와 쥐”는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가 내내 집중했던 주제를 담아낸다. 살만 류슈디의 “홀로코스트를 두고, 독일인이 스스로 선택했던 맹목성에 대해 반 유대주의자라면 결코 쓸 수 없었을 역대 최고의 반나치 걸작들을 쓴 작가”라는 설명(193p)을 앞으로 읽어갈 귄터 그라스를 위해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나, 너의 쥐를 한 마리의 그리고 모든 고양이의 눈에 띄게 했던 나는 이제 써야만 한다. 설사 우리 둘마저 허구라 해도 나는 그래야 할 것이다.(8p)” 자책 같기도 고백 같기도 한 문장이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다. 문제의 발단은 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숨고 싶은 쥐는 내내 등장하고 발톱을 드러낸 고양이 앞에 때로 속수무책으로 움츠리고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압도하기도 하고, 혹은 무심한 척 기다린다. 말케의 울대뼈, 후두는 눈에 띄는 공격 대상이었고, 단지 그 이유로 무리는 태연히 자신들의 행동을 은연중에 정당화한다. 의도치 않은 시선집중을 피하고자 말케는 특별한 의미로 포장한 물건들을 치렁거리며 걸어보고 가려본다.

 

 

“수영을 할 줄 알기 전에,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호명되면 대체로 정답을 말하며, 요아힘 말케라 불렸을 뿐. (중략) 그 무렵 큰 사건들이 세계를 뒤흔들었으나 말케의 시간은 자유롭게 수영하기 이전과 자유롭게 수영하게 된 이후로 나뉘었다.(36p)” ‘아무것도 아니었던 소년’이 ‘매우 특별한 말케(32p)’가 되어 모순된 의미를 지닌 갈채를 받기도 하다가 ‘위대한 말케’가 되기까지의 팽팽한 시간을 기록자인 필렌츠의 목소리로 듣게 된다. “실제 마주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두려움이 깃들고 물기어린 눈(53p)”을 가진 말케의 적극적인 대응과 소리 없는 견딤은 마지막 장을 덮고 회상하는 이 시간 더 아프게 다가온다.

 

 

경외의 대상이었던 말케는 “부풀어오르는 소음의 한가운데서 경탄은 뒤집혔다. 우리는 그가 혐오스러웠고 그를 외면했다.(81p)” 더 이상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학교 졸업생이자 해군 대위의 훈장 분실 사건과 말케의 대응, ‘전대 미문의 사건’이라며 내린 학교의 퇴학 조치, 어느날 다시 나타난 그는 조금 달라져 있다.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결코 잊히지 않았던 그에 대해 “무엇보다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잿빛이든, 검정이든, 얼룩무늬든 고양이만 보면 내 눈앞에는 쥐가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계속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작은 쥐를 보호해야 할지, 고양이들을 부추겨 사냥하도록 해야 할지.(134p)”라고 회상하며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말케를 쫒던 필렌츠는 선망과 질시 사이에서 감정의 극단을 오가다 말케의 소망이었던 자신이 다녔던 학교에서의 멋진 강연이 좌절되는 것을 지켜본다. 대신 한 사람의 관객 앞에서 들려주는 강연은 먹먹한 울림을 준다. “그러나 가장 큰 고요를 만들어낸 것은 너 요하임 말케였다. 내가 내는 소음에도 답할 줄 모르던.(180p)” 이어지는 ‘그러니까’, 하지만 ‘그러니까’가 백 번 이상 반복되어도 회복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간적 배경이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패전한 1945년 무렵까지라는 특수성을 배제한다면 소년들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것이다. 내내 연상되는 작품이 존 놀스의 “분리된 평화”나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이었듯이 소년들, 특히 주인공 말케와 서술자 필렌츠의 역학관계에 이끌렸다. 동시에 중반 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상하는 결말이 다가오겠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다만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지 않기를 바랬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장, 때론 시같고, 노래같은 반복이 인상깊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자 애도의 서로써 말케 뿐만 아니라 광기어린 시대와 후에는 웃어넘길 지언정 아슬아슬한 통과의례로써의 찬란함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유년의 시기를 엿볼 수 있었다. 필렌츠는 말케의 심중을 예상해 “너는 생각했을 것이다. (중략) 어서 이 겨울이 지나갔으면. 나는 다시 잠수해서 물속에 머물고 싶다.(70p)”고 말한다. 물 속으로, 물 속으로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공간만을 자신의 기지로 삼아야 했던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