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 그림 아이
숀 탠 지음, 김경연 옮김 / 풀빛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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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탠의 『개(김경연 옮김/풀빛)』는 2020년 케이트 그린 어웨이 수상작인 “이너 시티 이야기” 중 한 작품으로 이번에 단독으로 출간되었다. 숀 탠 (Shaun Tan)은 비주얼 아티스트이면서 다양한 작품으로 여러 상을 수상한 그림책 작가로 <잃어버린 것>, <빨간 나무>, <도착>을 비롯한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여운을 간직한다. <이너 시티 이야기> 속 스물다섯 동물 중 선택된 <개>는 표지부터 부드럽고 온건하게 닿는다. 고급 벨벳 양장본으로 소장가치를 높였다고 하는데 지금껏 맺어온 관계, 앞으로 맺을 관계에 예를 더하는 느낌이다.

표지에 보이는 사선은 아스팔트 도로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검은 개는 무엇을 향하는지 양면을 펼쳐보자 끝에 누군가가 있다. 둘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앞 뒤 면지는 동일하다. 어스름한 바탕에 사람과 개가 그림자처럼 찍혀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람도 개도 모두 다르다. 패턴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각각은 고유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동반자일 것이다. 흰 배경에 한 번, 검은 배경으로 다시 한 번 타이틀 표지를 거치면 드디어 시작된다. 이야기이자 역사가.

“옛날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다.” 작가는 그 의미를 글 텍스트로, 다음 장에는 그림 텍스트만으로 설명한다. 서로를 잘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아는 상태. 본능적인 믿음이 이미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와 인간도 가까워진다.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걷게 된다. 같은 방향으로. 작가는 아름다운 짧은 문장으로 두 종의 연대를 온전히 보여준다. “우리는 함께 외로움과 두려움의 뒤를 쫓았고 언젠가 일어날 모든 일을 보았다. 아름다움과 공포와 흥망성쇠 모두.” 그러나 둘 모두에게는 한정된 시간이라는 조건이 있다.

유사한 구도로 그림이 진행된다. 책장을 넘기며 독자는 시간여행을 한다. 제본선을 제외하고 좌우 한 컷의 그림은 빛과 어둠, 향기와 소리가 증폭되는 미지의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컷마다 다르고도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쟁도 있었고 복구된 듯도 보인다. 비로소 시선을 마주했으나 환경은 이전과 다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다시 함께이기 때문일 것이다. 후기에서 숀 탠은 “이토록 웅대하고 서로를 바꾼 종족간의 우정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낙관하기 어려운 미래임에도 “유별나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개와 인간의 유대에서 희망을 본다.

숀 탠의 『개』를 읽으면서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충분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는 그런 차이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p.299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긴 연구서를 숀 탠은 아름답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숀 탠은 새로이 출간될 때마다 주저 없이 소장할 수 있는 작가에 속한다. 『개』는 숀 탠 스럽고 숀 탠적이다. 글과 그림에서, 문장과 행간에서, 색채와 여백에서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흐르고 넘치고 기다려준다. 『개』는 그동안 함께 했던 나의 개들을 속으로 불러보게 한다. 그들이 여전히 나의 개이며 결코 잊지 않음을 확인시킨다. 존재하는 내내 흥망성쇠 모두 기꺼이 나누어 졌던 종, 개에게 바치는 숀 탠의 헌사를 추천한다.

내가 달리면 너도 달렸다.

네가 부르면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외로움과 두려움의 뒤를 쫓았고

언젠가 일어날 모든 일을 보았다.

아름다움과 공포와 흥망성쇠 모두.



(출판사 도서제공_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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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빈곤 사회 -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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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의 『질문 빈곤 사회(행성B,2021)』는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질문이 부재하는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경종을 울리며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책은 여전히 한국이 ‘질문 후진국’(p.10)임을 상기시키며 ‘나쁜 질문’의 위험성과 ‘좋은 질문’의 전제와 방법을 익히도록 독자를 이끈다. 현직 교수인 저자는 현대 철학적·종교적 담론들 뿐 아니라 “코즈모폴리턴 권리, 정의, 환대 등의 문제들”에 학문적, 실천적 관심을 두고 학생과 대중에게 지식 전달과 변화를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과 종교 3부작을 비롯해 다양한 저서와 컬럼으로 독자를 만나고 있는데 『질문 빈곤 사회』는 최근작으로 “지금” 더 부각되고 수정해야 할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꼭 필요한 다섯 가지 “물음 묻기”를 제안한다. 대상 별로 “권력과 언론에 물음 묻기”부터 “타자의 얼굴”, “관행과 대안”, “존재와 혐오”, “희망과 생명”에까지 “물음 묻기”는 긴급하고 기본이 되는 것부터 미래 지향적인 단계까지 확대된다. 아인슈타인이 가진 호기심과 창의성에서 재능이 열정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봤을 때 “질문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정체성의 결정 중 하나”(p.61)다. 즉, “호기심이 없어 질문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나 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무관심한 사람“이며 그람시의 명제에 의해 그런 무관심한 이들은 ”기생하는 존재“들로써 이미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p.62)

2부 "타자의 얼굴에 물음 묻기"에서는 사람은 처해진 환경과 별도로 세 종류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매니퓰레이터, 매니저, 리더의 특징을 하나씩 살펴볼 때 저자가 보여주는 사례는 그들을 넘어 우리 주위의 누군가로 확대, 연상된다. 또한 저자는 일반화된 호칭 뒤에 숨은 폄하 의도, 한국의 나이 집착주의가 왜 위험한지를 근거를 들어 밝힌다. "정치적 행위로써의 말과 글"(p.108)에서의 지적도 논의를 부른다.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차별과 혐오의 면책 특권 영역이 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어떤 종류의 글이든 이러한 비판적 수정 작업의 대상임을 시인을 보여준다."(p.110)는 지점에서 저자의 의도는 알겠지만 범위를 한정하는데 있어 의문이 들기도 한다.

“긴즈버그의 유산”을 하나씩 짚어가며 숙고하는 장면들도, 배움과 불편함의 관계 등을 정리할 때도 밑줄에 괄호, 별표와 각종 체크가 지면 가득이다. 적절한 인용과 풍성한 사례는 이 책의 장점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이해를 돕는다. “진정한 배움은 학생들에게 익숙한 인식 세계를 깨고, 새로운 관점으로 주변 세계의 문제들을 보게 함으로써 상투적이고 무비판적인 인식을 깨는 ‘불편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배움이 가능하다.”(p.188) 날선 비판에 움츠러드는 부분, 내내 강력하게 주도하는 글로써 과하다 싶은 부분도 있지만 지평을 확장하는 배움을 위한 ‘불편함’의 감수는 반대할 수 없다. 주요 이슈를 빼곡이 담아 공부하며 읽어야 할 책 같다. 책 자체가 배움의 과정을 자연스레 경험케한다. 여러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다시 펼치는 부분은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현대 세계의 “식민화”다. 이는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고독의 시간과 공간’ 가지기를 회피할 때 언제든 가능한 식민화로 “스스로 사유하고, 읽고,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고 씨름하는 과정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황과 연계된 대안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다.”(p.132)는 권고를 다시 새기게 한다. 희망적인 논의의 결말이 책을 덮는 독자의 마음에 선물처럼 남을 책이다.

책속에서>

현대 세계에서 식민화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고독의 시간과 공간’ 가지기를 회피한다면, 외부 세력이(그것이 사람이든, 대중 매체이든, 사회나 국가든) 나를 대신해 내 삶의 방향과 대안을 결정하게 하는 ‘식민화’의 문을 열 개 된다. 스스로 사유하고, 읽고,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고 씨름하는 과정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황과 연계된 대안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다.(p.132)


교육과정에서 '불편함'이 생략된다면, 현실 세계가 담고 있는 무수한 차별과 배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변화 주체'로서 이행하는 진정한 평등 교육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배움은 학생들에게 익숙한 인식 세계를 깨고, 새로운 관점으로 주변 세계의 문제들을 보게 함으로써 상투적이고 무비판적인 인식을 깨는 '불편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배움이 가능하다.(p.188)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이란 무수한 ‘작심 3일’들을 거치면서, 이 삶의 짐들을 견뎌 내면서 지금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생명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p.352)

인간의 삶은 무수한 ‘작심 3일’들이 만나서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자신만의 여정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므로.(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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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서 쏜살 문고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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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1896~1943)의 『법앞에서(전영애 옮김/민음사)』는 열 네 편의 작품을 담은 단편집으로 “카프카적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한다.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카프카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때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장편과 단편, 일기 등을 합해 총 3400여 쪽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죽기 전 평생의 벗이었던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미완성 작품을 모두 없애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브로트가 이를 실행하지 않은 덕분에 현대의 독자가 카프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책은 한 손에 쥐어지는 문고본으로 분량도 165쪽으로 가볍다. 들어가는 말, 역자해설, 편집후기 등도 없고 작품에만 최대한 페이지를 할애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막강하게 행진해온다.

“법(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p.7)로 시작하는 표제작 <법 앞에서>는 카프카 자신이 일기에서 “전설”이라 불렀다 한다. 카프카 전기를 쓴 클라우스 바겐바하에 의하면 카프카 스스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지만 확고한 정설로 인정받을 만한 해석이 없을 만큼 수수께끼로 남아있다.(p.168,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은행나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우리 모두이기도 한 “시골 사람 하나”와 삶의 목표이자 유일한 가치, 의미일 수 있는 “법”, 그 사이 통과해야만 하는 단계, 또는 과정인 “문지기”의 단순한 구도로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시골사람은 카프카, 문지기는 아버지라고 단선적으로 읽히지는 않았다. “법”의 수많은 다른 이름, 꿈이나 목표, 의미에 닿는 진정한 길은 있을까,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의 방향을 틀어본다면 다음 단편 <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중 첫 번째 잠언이 이를 정리해준다. “진정한 길은 드높이 팽팽하게 쳐진 줄이 아니라 땅바닥 위로 바싹 쳐진 줄처럼 나 있다. 진정 디디고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끔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p.11) 이 통찰과 비유에 놀라울 따름이다. <굴>에 이르면 또 다른 세계다. 법에 닿기 위해 애쓴 압축 여정에 비해 설명과 묘사를 채워 넣음으로 굴과 나, 굴을 파고 예측하고 아끼고 사유하고 갈등하고 손을 놓는 일련의 과정, 어느덧 백발이 지름길로 오는 인생 행로를 그려낸다.

<황제의 전갈>은 불가능이란 무엇인가를 시전한다. 절대 절망과 깊은 무력감, 그럼에도 이어질 반복을 떠올린다. 이 짧은 단편은 다음 이야기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부속 장면으로 삽입되는데 영리한 전개다. 작가는 무한히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가장 작은 씨앗의 미세함이라든지 언뜻 스치는 바람결을 놓치지 않는다.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가 가장 마음을 끄는 작품이었다. “압도적 거대함 앞에 몰아세워지다, 그 사실조차 잊은 채 전락하는 인간”이 이 작품에 대한 한줄 정리 중 한 예다. 본 적도 없고 결코 보지 못할 북방인들을 대비해 축조하는 장성이라니. 이를 위해 감수하는 희생 또한 끝 간데를 모르고 요청받고 지불하는 희생이다. 만리장성 축조는 작가의 미완성 장편 <성>을 떠올린다. 그 외에도 미지의 것에 사로잡혀 무모하게 작동하는 인간의 초상은 또 다른 작품들을 소환한다. 가장 먼저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문학동네)>, 이어서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문학동네)>이다. 카프카가 거듭 변주하는 인물들은 환상적인 배경을 무대로 터무니없이 성실하다. <굶는 광대>는 또 어떤가. 단편 하나 하나 마다 “놀라워라”를 연발하며 읽는 이유는 극도의 환상이 환상에 머물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발견 때문이다. 불통인 채로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맞는 결말들이 가슴을 서늘케 하지만 “지금, 여기, 여전히”는 모든 작품에 들어맞는다. 우아하고 시적인 문장으로 비극적 인간 조건을 말할 때 감정이 실릴 공간은 없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시선은 기록할 뿐이다. 그럼으로 여전히 웅변한다.

책 속에서>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것이 도리어 그 당시보다 덜 준비되어 있으니, 커다란 굴은 여기 무방비 상태로 덩그러니 서 있다. 나는 이제 꼬마 수습공이 아니라 노장 건축사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힘을 결단의 시기가 오면 정작 쓰지 못할 터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늙었더라도, 지금보다 한결 더 늙는다면, 정말이지 좋겠다. 이끼 아래의 나의 휴식처로부터 더 이상 몸을 전혀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면. 그러나 실제로 나는 이 곳을 견디지 못해 몸을 일으키고, 이곳에서 포만한 평화와 새로운 근심으로 나를 가득 채우기라도 한 듯이 다시 질주해 내려간다, 집 안으로(p.84, 굴)

그가 사는 건 자신의 개인적 삶 때문이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건 자기의 개인적 사고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한 가족의 강박에 의해 자기가 살고, 또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자체로 생명력과 사고력이 지나치리만큼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가 모르는 어떤 법칙에 따라 일종의 형식적 필연성을 지니는 가족 말이다. 이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이 알지 못하는 법칙들 때문에 그는 풀려날 수가 없다.(p.160, 그-1920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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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위대한 생각 시리즈 13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정초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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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정초일 옮김/은행나무』 는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은 서간체 작품으로 “가장 중요한 자전적 진술”로 평가받는다. 역자는 이 편지가 “고유한 용도를 갖는 사적인 서한인 동시에 자전적 에세이로서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와 동기를 숱하게 담고 있다.”(p.151)고 전한다. 일면 보편성이 엿보이면서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부자관계다. 이와 같은 편지가 가능했던 이유를 밀레나 예젠스카는 “무척 세심한 양심을 지닌 인간이자 예술가여서 다른 사람, 즉 귀머거리들이 안심하는 경우에도 마음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체하면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p.159)라고 해석한다. 카프카는 고독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실종자』 『소송』 『성』을 비롯해 단편 소설, 일기와 편지 등을 통해 인간에게 엄습하는 부조리와 불안을 포착한다. ‘은행나무’출판사 번역본은 카프카와 가족들, 친필 원고 및 관련 사진을 곁들여 조금 더 가까이 작가가 지나온 시간을 가늠해 보도록 돕는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제게 물어보신 적이 있지요. 제가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요.”(p.70) 라는 첫 문장은 글의 목적을 드러낸다. 카프카의 편지는 응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말이 아닌 글을 선택하고 있다. 카프카는 자기 안에 있으나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차분히 풀어놓는다. “아무튼 아버지와 저는 아주 달랐고, 이렇게 다르다는 점에서는 서로에게 몹시 위험한 존재였어요.”(p.14)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다름”을 하나의 벽, 나아가 견고한 성에 견주며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한다. 말을 건네는 듯한 입말체 문장은 대상이 누구이든, 아버지를 넘어 독자에게 공감의 폭을 넓힌다. 독자는 카프카 부자의 이야기를 자기에게로 대입시켜 상황을 각색하게 된다. 때론 아버지나 아들의 목소리를 독자의 것으로 대체하거나 덧씌우며 그 입장을 발언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개인적이지 않다. 사적인 편지를 넘어 관계를 질문하고 사유로 초대하는 교본처럼 읽힌다. 글쓰기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치유적 글쓰기의 일면도 보인다.

카프카에게 글쓰기의 주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때문에 고통 받았던 작가였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 또는 부정적 주인공들이 대부분 자신의 아버지의 은유하거나 표상한다. 그렇기에 그가 아버지를 고발할 때 예상할 수 있는 톤이 있음에도 편지의 어조는 조금씩 어긋난다. 실랄한 지적이 눈에 띄는 지점도 많지만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화해 또는 아끼는 마음으로 변조해간다. 민감하게 벼린 영혼 카프카에게는 눈감고 넘겨지는 아버지의 허물이 없었을 것이고 그 하나하나는 상처로 흔적을 남겼다. 감각과 반응이 모두 특출하기에 기억에 새겨진 다음 비유와 묘사로 크고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자동반사 같다. “왜냐하면 제가 저에게만 잘못이 있다는 어린 시절의 죄책감에서 부분적으로 벗어나, 이제 우리 두 사람 다 도움이 필요하건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p.37) 카프카의 통찰은 다름, 부당함,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마무리는 서두에서 했던 아버지의 질문에 “지금까지 제가 아버지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p.129)라는 말로 갈무리한다. 이에 더해 아버지 입장을 가정한 “가상 반론과 해명”(p.161)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는 민감한 영혼의 고통이 잘 드러난다. 그에게는 “비뚤어지고 말테다”하며 자신을 던져버리는 자멸이 아닌 “글쓰기”라는 보물이 있었기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고, 훗날 관계에서 상처받는 영혼들, 미래의 독자들에게 위로와 휴식의 자리를 허락한다. 책은 또 한 가지, 아이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경청케 하는 기능도 갖는다. 정신 들게 하는 문장으로 “자, 봐라!” 하고 경고하는듯하다.(p.145) 한때 자신도 연약한 어린아이였던 어른들은 그 사실을 빨리 잊는다. 자기 속에 있는 내면아이도 잊고 태연히 목소리를 내지르고 만다. 카프카의 날선 고발은 애정에 기반 하기에 실랄한 비유들이 통괘함과 때론 위트를 보인다. 곳곳에서 빼어난 비유를 통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역동을 쉽게 분석해서 풀어 쓴 가족 심리서를 연상시킨다. 꼼꼼한 역자해설은 “카프카 자신이 일기에서 ‘전설’이라고 불렀던 <법 앞에서>”(p.168)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 책을 덮으며 카프카 일가의 비극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자신처럼 아꼈던 세 여동생, 특히 셋째 오틀라의 죽음을 비롯해 아들의 죽음을 보고 아들보다 오래 산 아버지도 참혹한 시대의 희생양이다. 카프카 묘비에 적힌 글 중 “존경하는 헨노흐(헤르만) 카프카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시선을 끈다. 삶과 문학의 시작이자 끝점에 함께 착지하는 것만 같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카프카의 주요 저작들과 함께 반드시 빠트리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아버지께선 팔걸이 안락의자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셨죠. 아버지의 생각은 타당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미쳤거나 엉뚱하거나 돌았거나 비정상적이었어요. 그럴 때 아버지의 자기 신뢰는 무척이나 굳건해서 굳이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일관성이 없어도 정당성을 잃지 않으실 정도였지요.(p.24)

이 점에 대해선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각 단의 높이가 낮은 다섯 단의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겨우 한 단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자기에게는 앞서의 다섯 계단을 다 합한 것만큼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전자는 그 다섯 계단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수백 수천 계단을 능히 오를 것입니다. 그는 무척 힘겹지만 위대한 삶을 영위하다가 마감하겠죠. 하지만 그가 오른 계단의 그 어떤 한 단도 후자에게 최초의 높은 한 단이 갖는 의미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온 힘을 다해도 부족해서 디디고 올라서지 못한 한 계단, 그 계단을 넘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에는 물론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사람의 첫 계단, 그 계단의 의미는 지닐 수 없다는 말입니다.(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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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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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정창 옮김/열린책들/2001』은 루이스 세풀베다(1949~2020)의 첫 작품으로 베스트셀러가 됨과 동시에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가 최고의 환경소설로 일컬어지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 권두에 열대우림을 지키고 브라질 소작농과 토착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다가 암살당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기린다. 태어난 곳 칠레로부터 망명 이후 작가는 여러 나라와 직업을 거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이자 “행동하는 지성”(p.172)으로 역할한다. 역자는 그의 문학이 “기존의 라틴 아메리카 소설 문학이 추구해 온, 적어도 그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에서 탈피하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p.173)고 전한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특히 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중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가장 많이 읽힌다(p.173)고 하는데, 그를 읽고 난 독자는 아마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동화부터 소설까지 뛰어난 가독성은 그의 문학에 편안히 다가서게 한다. 또한 깊은 울림으로 잊혀 지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간직한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우기에 접어든 날씨였다.”(p.11) 소설의 첫문장은 앞으로 있을 불안한 여정을 암시한다. 마을 부락민들은 엘 이딜리오를 찾는 외지인이 거의 없음에도 1년에 두 번씩 들르는 치과의사를 기다린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노인은 생리적 이유보다는 정신적으로 그의 방문이 더 각별하다. 육개월마다 한 번씩 노인의 독서취향에 맞는 두 권의 연애소설을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은 나중에 노인이 난가리트사 강 앞에 있는 그의 오두막에서 고독을 달래며 읽고 또 읽게 될 텍스트였다.”(p.41) 하지만 노인의 소망은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이 카누에 실려 떠내려 오며 저지당한다.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공격당한 자와 공격한 자의 실체를 밝히게 되면 처참한 번복을 막을 수 있을까, 엘 이딜리오의 유일한 공무원인 뚱보 읍장은 암살쾡이 추적단을 꾸리고 노인은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미지의 밀림을 향한다.

이기적이고 무분별한 인간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환경파괴를 자행한다. 밀림의 주인인 동물도 원주민도 더 깊은 곳으로 끝없이 쫓기고 ‘양키’로 상징되는 권력은 폭력의 흔적을 남기고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입힌다. 노인이 밀림 생활을 배워가던 시절에도 지식과 경험이 쌓여갈지언정 “수아르족은 될 수 없었다”(p.60)고 고백한다. 수아르족의 특별한 의식들을 포함해서 밀림의 생태는 생생하면서도 놀라워서 작가가 어떻게 자료수집을 했을까 궁금할 정도다. 열린 감각, 깨어있는 의식으로 다가갔던 작가의 모든 여행과 정착의 흔적은 온전히 문학으로 구체화되었다. 암살쾡이로 인한 숨은 위협과 쫓는 과정은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해결해야 할 위협적인 존재, 적과의 결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생명이 죽어가는 장면은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소설의 특별한 매력은 제목이기도 한 “연애 소설 읽는 노인”에게 있다. 유창하지 않기에 노인의 “읽기”는 더 정성과 애정이 깃든다. 노인이 책을 매개로 의사와, 신부와, 여선생과 만나게 되는 장면, 책을 구하기 위해 궁리하고 원숭이 포획이라든지 댓가를 지불하는 방식도 간절함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작년 이맘때였다. 2020년 4월 세풀베다의 사망소식을 기사로 접하고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꾸준히 신간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귀한 동시대 작가와의 돌연한 이별이 코로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아이러니했다. 환경과 자연을 지키고 돌이키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마지막까지 웅변한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 다채로운 질문과 즐거움, 경각심을 일깨우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책 속에서>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나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p.45)

그는 인디오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자신이 가톨릭을 믿는 농부라는 사실을 훌훌 떨쳐 버렸다. 새로 이주해 온 개간자들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쳐다보았지만 원주민인 인디오들처럼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녔다. 자유라는 말은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밀림에서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그사이 차츰 밀림의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에 매료되어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증오심을 잊었다.(p.53)

다시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노인의 뇌리에는 어떤 결론이 스쳐가고 있었다.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중략)다시 말해서 뚱보의 떳떳지 못한 제안에 대해서 노인이 결론처럼 내린 대답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읍장 같은 인간들이 선택할 수 없는 싸움이자 죽음이었다.

“좋소.” 이윽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담배와 성냥과 실탄은 남겨 두고 가시오.“(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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