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순한 진심/민음사/2019』은 2004년 등단해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던 조해진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 그의 세 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에 실린 단편 「문주」로부터 시작되었다.(작가의 말) 여기에 ‘생명이 화두인 소설을 쓰고 싶다’(p.258)는 작가 마음이 더해져『단순한 진심』으로 세상에 나왔다. ‘역사적 폭력에 상처를 입은 개인에 주목하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출판사 인용)는 평가를 받는 작가는 상처가 생명으로, 빛과 관심, 결국 사랑과 연대로 치유받고 자유로와지는 과정을 오롯이 그려낸다.

“우주가 내게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된 그날, 서영이라는 한국인 여성에게서 또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p.11) 일주일 전 첫 번째 이메일에서 그녀는 ‘나나 씨의 오래전 이름인 ’문주‘의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 자체’(p.12)가 자신이 찍고 있는 영화라며 한국에서의 영화 작업에 나나를 초대한다. 다시 두 번째 이메일은 “이름은 집이니까요.(중략)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p.17)는 말을 전한다. 이 말은 프랑스로 입양되어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나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채로 비행기에 오르고 지금껏 ‘영원이란 무형의 테두리에 갇힌 암흑’(p.7)을 자신의 ‘근원’이라 여겼던 신조를 내려놓고 어쩌면 찾게 될 지 모를 자기 근원의 온전한 정체를 찾아 떠난다.

나는 누구일까, 나의 기원 찾기는 몸을 움직여 찾아 나서는 능동적 행위와 이름에 담긴 실제 의미 탐색으로 채워진다. 그 과정은 자아 찾기의 주인공 나나(문주)와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내는 인물들과의 만남을 영화라는 틀을 통해 보여준다. 나나를 입양한 프랑스의 부친 앙리가 ‘스크린의 바깥에서 작동하고 있을 또 다른 이야기’(p.56)에 마음을 빼앗겼듯이 그녀 역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서영과 소율, 은이 조금씩 각별해진다. 복희 식당의 주인은 복희가 아닌, 추연희라는 다른 이름의 견디고 지켜내려 했던 사람이다. 누구를? 복희를. 그렇다면 왜 복희일까 이름의 숨은 뜻은 안도와 아픔을 동시에 준다. 문주를 대변하는 공간인 철로에서 자신을 구해낸 정우식 기관사와 그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길도 그렇다.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또는 환대받지 못한 채 삶에 입성했던 자들, 삶에서 너무 일찍 떠난 자와 지금 떠나는 자가 있다. 문주는 자아찾기의 여정에서 관계와 태도, 자기연민의 덫을 차례로 직시하게 된다. 수용의 폭이 넓어지고 단단해진다.

『단순한 진심』에서 ‘이름 찾기’는 작품 전체의 큰 줄기로 책을 관통한다. 인물들은 물론 지명의 유례와 의미, 긴 시간 동안 맛과 어렴풋한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알게 되는 음식인 수수부꾸미까지 반복, 재생된다. 또 마지막까지 이름 불리지 못한 노파에게 이르면 마음은 복잡해지고 독자는 이름의 무게와 소중함을 넘어 내뱉어진 말의 내밀한 의미나 여운을 차근히 생각하게 된다. 힘겨운 시대의 어두운 일면을 기억하는 아픈 이야기지만 잘 기획된 드라마 같은 기시감이 남아 아쉽기도 하다. 그럼에도 후반에 가서 흩어졌던 퍼즐을 식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맞춰넣는 것, 아픔과 상실의 농도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은 일상으로의 회귀가 감정의 과잉 없이 담백하게 그려진 점이 좋았다. 문학평론가 김미정의 추천의 글 마지막 문장은 이 작품을 가장 잘 요약하는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나조차도 온전히 말할 수 없지만, 나를 증거해 줄 타자들로 인해 진실은 확인된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삶의 증인이 된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이면서 소설 밖 우리의 이야기이다.”(p.263) 작품 속 스크린과 스크린 밖, 나아가 책 밖의 독자에게까지 연결되는 증거의 릴레이다.

“나는 우주와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이자 그 존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게 될 전령이며, 동시에 우주가 자라나는 과정을 증언해야 하는 증인이니까.(p.11)

그러나 자기 연민은 생이라는 표면에 군데군데 나 있는 깊고 어두운 굴 같은 것이어서 발을 헛디뎌 그곳에 빠질 수는 있어도 그 누구도, 영원히, 그 굴 안에서만 머물지 못한다.(p.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일 척추
은상수 지음 / 북레시피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상수의 『매일척추(북레시피)』는 척추 전문의가 관련 질환의 근원부터 치료까지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2018년 『정형외과 운동법』에 이어 척추 이상과 통증, 정보 부족 또는 정보의 과잉으로 인한 불안감 해소에 최적화된 책이다. 단편적 사실이나 정보 접근의 용이성이 신뢰를 담보하지 못하지만 이 책은 안전한 지침 역할을 해준다. 저자는 “움직임이 있는 곳에 통증이 있다.”, “허리, 목은 숙이지 말자.”는 말을 짧은 권두언에서 전하는데, 특히 두 번째 제안을 지키기는 어렵다. 스마트폰과 일심동체가 되어버린 일상에서 허리와 목은 어떻게든 각도를 보인다. 그 각도를 꽤 오래 유지하고 통증은 스미듯 시작된다.

『매일척추』는 총 네 개의 장에서 허리디스크, 척추협착증, 그 외 척추 질환들과 목디스크를 다룬다. 원인과 증상, 진단 및 치료, 운동법에 대해서 꼭 필요한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설명한다. 허리디스크 원인과 증상에서는 척추와 골반, 경추부터 요추까지 해부학적 설명으로 이해를 돕고 전만과 후만, 지켜져야 할 중요한 곡선의 의미를 살핀다. 진단 편에서는 검사법과 영상별 특징을 비교해주고, 불편함을 나타내는 환자들의 표현을 실어 필요에 따라 자신이 느끼는 증상 정도와 견주어 보게끔 한다. 이 책의 큰 특징이 환자에 따라, 증상 정도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운동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시작단계부터 정리단계까지 운동의 과정을 잘 전달하고 효과를 나타내는 기전을 알려주기에 조금 더 정확히 숙지하게 된다. 충분한 크기의 삽화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시범자의 역할을 해준다.

다양한 수술법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비수술적 치료로 신경차단술이나 견인치료, 도수치료나 내시경 등도 설명하고 있다. 3부 ‘그 외 척추 질환들’에서 다루는 질환도 다양하다. 척추 측만증이나 골다공증에서도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담겨있다. 4부는 목디스크를 알려주는데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다. 만성 목부위 통증이 어느날 손 발 저림으로,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하나의 진단명으로 훌쩍 다가온다. 고착된 생활 습관이 부지중에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아지고 애쓰고 고생했던 시간들이 더 가혹한 통지서로 되돌아올 때 좌절하기 쉽다. 근래 찾아간 병원에서 자세가 원인이니 읽고 쓰는 일은 당분간 하지 말자고 했을 때 ‘네’라고 자신있게 답하기는 어려웠다. 과장하면 식음전폐에 준하는 처방이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허리, 목은 숙이지 말라는 대원칙을 새길 필요가 있다, 아니 많다. 『매일척추』는 통증 없고 활기찬 일상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적의 개념서다. 영상과 사진, 삽화와 도표의 활용, 활자의 크기 등이 자칫 딱딱해 보이는 정보를 더 주목하게 해준다. 기본에 충실할 때 이 개념서 만으로도 삶의 질을 높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서 마음을 담아 전하는 친절한 지침을 늦지 않게 내것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한홍구 지음 / 돌베개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법부(돌베개)』는 역사학자 한홍구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라는 부제로 “인권의 최후 보루이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였던 ‘법’이 정권의 조력자를 넘어 권력이 되기까지, 대한민국 사법부의 숨겨진 슬픈 역사 70년”(출판사인용)에 대한 기록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이 ‘국정원 과거사위의 보고서 ’사법편‘에 기초하고 있다.’(p.22)고 밝힌다. 저자는 2004년 10월부터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 활동을 했던 때 책의 집필을 마음먹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2016년『사법부』를 출간한다. 프롤로그는 책이 다루는 핵심 줄기를 요약하고 있다. 본문은 “재판일지와 판결문으로 읽는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말이 이해될 만큼 촘촘한 발췌와 인용으로, 충실한 자료 사진과 사진에 버금가는 정밀한 글로 채워진다.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심호흡하게 만든다. “국정원 과거사위 보고서, 특히 「간첩편」과 「사법편」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아프게 써낸 보고서다. 독자 여러분도 우리 주변의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아프게 읽어주기를 바란다.」(p.24)

『사법부』는 그 역사를 5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미군정과 이승만 시절의 ‘권력을 불편하게 만든 사법부’부터 ‘유신, 겨울공화국의 사법부’, ‘군사정권, -회환과 오욕-의 사법부’, ‘정보기관의 간첩조작과 고문, 조정당하는 사법부’, ‘민주화 이후의 사법부, 과거는 청산되었는가?’까지, 1945년부터 1997년의 노정을 담고 있다. 자료화면으로 스쳤던, 어딘가에서 읽었던,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건명들이 본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다는게 반복되는 느낌이다. 촌철살인 소제목은 독자를 그때 그 시간으로 데리고 간다. 참혹함의 가운데에서 아픈 마음과 답답함을 견디는 일이 사법부를 읽는 일이다. ‘유신정권은 이렇게 수십 명의 목을 치며 사법부를 장악해갔다. 유혈이 낭자해진 사법부에서 목이 잘리는 변을 당한 사람과 살아남아 욕을 보아야 했던 사람 중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p.89),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p.113) 고문과 미행, 보복과 협박이 끊이지 않던 시간도 똑같이 흐른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은 ‘보고서의 성격이 강하며 기본적으로 중앙정보부-안기부가 행한 사법권 침해와 판결에 대한 개입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이 보고서에서 사법부는 피해자로 기록되어 있다.’(p.11)고 밝혔듯이 중정-안기부의 역학, 또는 제3, 제4의 추가 개입된 손을 추적한다. “중앙정보부(중정)-안기부는 자신들은 재판에 개입하거나 부당하게 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조정’했을 뿐이란다.”(p.210) ‘조정관’ 또는 ‘관선기자’(p.210)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목적’과 이를 위한 그들의 ‘역할’, ‘일상화된’ 존재의 명백함은 진술과 보고서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암흑시대에도 빛나는 판결을 내린 판사들도 마찬가지로 실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동시에 차기 ‘대법원장 재목’이었던 이들이 ‘소수의견’을 제출했기 때문에, 반갑지 않은 ‘무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탈락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소문’(p.257)으로 일단락된다.

저자는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판결했던 이들의 회상과 고통 받았던 이들의 눈물어린 육성을 들려준다. “사람은 참 가지가지다. 문귀동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문귀동을 써먹어 출세하려던 자가 있고, 문귀동의 죄악을 덮어버려야 정권이 산다고 생각한 자가 있고, 문귀동을 잡아넣는 것이 오히려 체제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자도 있다. 검찰과 사법부가 성고문 은폐의 공범이 될 때 거기에 기꺼이 협력한 자도 있고, 부끄러워한 자도 있고, 분해서 눈물을 흘린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인숙의 고통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자도 있다.”(p.356) 멈춰 있게 만드는 문장들이 여러 지점에서 돌출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최근의 상황’(p.411)을 인용하며 ‘사법부의 권위를, 사법부의 독립을 갉아먹는 가장 무서운 적은 사법부 안에 있다.“(p.412)고 관심을 환기한다. ’대한민국 사법사 70년‘ 연대표로 시작해서 미주와 참고문헌, 찾아보기까지 저자의 의지가 독자의 읽는 행위에 온전히 전달되리라 생각된다. ’뒤돌아 본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수적이다. 결코 미래의 걸림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름을 부르고 글로 기록하는 것 만으로도 슬픈 ’과거‘에 예(禮)를 표하는 꼭 필요한 행동이다. 변화의 시동(始動)으로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패싱(문학동네/박경희 옮김)』은 할렘 르네상스 대표 여성 작가 중 한 명인 넬라 라슨의 1929년 작품이다. 할렘 르네상스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 무렵까지 할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예부흥운동으로 신흑인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p.161 해설) 작품의 제목인 “패싱”은 ‘미국 문학 내에서 ’패싱 소설‘이라는 별도의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졌으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갈등‘을 전하는 작품들(p.163해설)은 오랜 시간 면면히 이어져왔다. 올해(2021년) 레베카 홀 감독의 동명 영화로 개봉되는 『패싱』은 현대의 관객과 독자에게 범주와 영역을 넓히며 다가온다. 태생과 환경, ‘문학적 백인 행세를 한다는 비난’(p.164)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홀로 감내했던 시간 등 작가의 삶은 작품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듯하다.

『패싱』은 ‘뜻밖의 만남’, ‘재회’, ‘피날레’의 3부 구성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린 레드필드는 학창시절에 클레어 켄드리와 가깝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뚜렷했다. 클레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클레어의 가출, 행적에 대한 소문보다도 클레어 자신이 휘발되지 않는 기억의 본체다. “그 시절에도 이미 클레어 켄드리의 삶에 대한 개념 안에는 희생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자기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기적이고, 차갑고, 끈질겼다. 그럼에도 가끔은 연극이 아닌가 싶을 만큼, 상대의 마음에 따스함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p.15) 거리낌 없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태도’(p.28)는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는 특징으로 남아있다. 십 이년만에 우연히 만난 클레어. 그녀의 선택 ‘패싱’은 아이린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익숙하고 친근했던 모든 것을 끊어내고, 아마 전적으로 낯설지는 않더라도 분명 전적으로 우호적이지는 않을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시도”(p.35)에 대해 클레어는 오히려 너무나 쉬운 일이고, 작은 용기만을 필요로 함에도 왜 더 많은 사람이 결코 ‘백인 행세’를 하지 않는지 되묻는다.

그날의 만남 후, 클레어는 조금씩 아이린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클레어가 이룬 가정은 거짓 또는 속임을 기반으로 하기에 불안보다 위험에 가까운 형국이다. 아이린은 ‘안전’을 유일하고 중요한 가치로 삼고 그 터전 위에서 그녀의 가정은 요새처럼 굳건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는 ‘안전’은 자신이 마련한 훌륭한 기반을 버리고 브라질로 가고싶다는 남편의 소강상태인 바램으로 한 번, 클레어의 개입으로 다시 한 번 강렬하게 흔들린다. 클레어는 질주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채우려는 공격성을 띈 인물이고 아이린은 한껏 방어하려는 의지를 간직한다. “그녀는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지만, 그가 주어진 것들과 더불어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리고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단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자기가 그를 위해 세워놓은 계획에 따라서만 그렇게 되길 원한다는 점은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p.83) 하지만 안전을 위한 아이린의 방어 역시 비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시종일관 클레어를 전형화시킨다. 비슷한 유형의 문구가 의도적인 듯 반복된다. “그게 바로 클레어 켄드리지, 아이린이 지적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감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p.61) 이런 특징과 더불어 ‘그녀는 너무 예뻤다.’(p.125) 예쁘고 예뻤으며 지나치게 예뻤더라 투의 강조는 거의 남발 수준인데 아이린을 비롯한 타자의 시선으로 언급되면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일종의 지위 또는 권력으로까지 자격을 부여한다. ‘한 방울의 법칙’이라는 가혹함에 맞서는 패싱이라면 면죄부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작품은 흑백 인종과 패싱의 문제를 기조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이린과 클레어 두 인물이 선택하는 삶의 방향성과 인간의 욕구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둘은 계속 엇나가고 충돌하는데 이 불협화음에 가세하는 주변 인물들의 개입은 불을 붙이는 부싯돌이자 잘 조련된 장치로서 작가의 의도를 입체적으로 부각시킨다. 관계와 소통의 실패는 선의와 악의를 해석해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될까? ‘작정한 인간의 악의’는 해석으로 희석시킬 수 있는 것일까? 클레어가 “난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만큼 못됐어.(중략) 정말, 린, 난 안전하지 않아.”(p.111)할 때 그 말의 확고함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곧 이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할 때의 감춰진 비언어적 의미를 살펴야 할까. 후자를 취하기에는 시간도 여유도 없고 기울어진 각도기를 유지하는게 일반적이며 편하다. 간헐적으로 이어지지만 문답은 꼬리를 문다. 『패싱』의 가장 빼어난 점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있다.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표현은 ‘불안’, ‘질투’, ‘선망’, ‘미움’ 등의 인간 보편의 감정을 다양한 층위에서 펼쳐낸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지점부터 독자를 옥죄고 긴장시키는 장면, 파국이다 싶은 순간까지 빠르게 질주하며 극한으로 밀어 붙힌다. 분위기의 점진적 고조, 포화에서 폭발로 치닫는 조용한 움직임은 훌륭하다. 리듬감 있는 문장이 긴장과 기대를 한껏 높이며 묘사는 눈앞에 영상을 보는 듯 시각적이고 생생하다. 흔들리는 인간들의 초상을 솜씨껏 완성한 이 매력적인 작품을 영화로 어떻게 구현했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상관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 상관이 있었다. 얼마나 쓰라린지! 그녀가 가졌던 단 하나의 두려움, 단 하나의 불안,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길 원하는 브라이언의 충동이 그렇게 유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쪼그라들다니! 더불어 그에 맞섰던 자신의 용기와 결의까지도 품위를 잃었다.(p.130)

안전. 그것은 그저 단어에 불과했던가?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행복, 사랑 또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거친 전율 같은 것을 희생하는 대가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안전과 지속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지나친 노력은 그런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STONER)/RHK/김승욱 옮김』는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작품’이었다가 50년 후,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되었다.(출판사소개) 초판이 출간 1년 만에 절판되었지만 2010년대에 와서 유럽 전역에서 재출간되며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출판사 소개)를 일으킨 작품이라는 특이점은 비현실적이다. 이 비현실성이 저자인 존 윌리엄스를, 그리고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를 사라진 흔적으로써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숨쉬는 인물로 불러낸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p.8) 작품의 첫 문장은 책의 줄거리이자 그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작은 농가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던 스토너는 ‘집에서 하는 어드렛일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서 공부’(p.10)를 한다. 날로 척박해가는 땅의 수확에 도움받기 원하던 아버지는 그를 컬럼비아의 농과대학으로 보낸다. 그는 처음 캠퍼스에 들어섰던 때를 잊지 못하듯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개론 시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질문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후, “모르겠나, 스토너 군?”(p.31)하고 물었던 슬론 교수는 스토너를 새로운 세계, 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문학은 이제 그에게 새로운 소명이 된다. 슬론 교수 덕분에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출발’(p.42)하는 기회를 잡고 ‘땅’에 메였던 부모의 기대와 행로로부터 다른 길로 들어선다.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고독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p.79)던 이디스 보스트윅을 향한 스토너의 구애와 결혼은 자연스럽게 진행된 듯 보였다. 이디스의 어머니 보스트윅 부인을 보았을 때 스토너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다.’(p.85) 습관적 불만과 앙심과 절망이 베어나오는 목소리까지. 그날 밤 ‘그는 어둠 속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삶이 왠지 낯설고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p.88) 자신의 행동이 현명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그가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닫는데는 한 달이 걸리지 않는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고 낯설고 두려운 무엇으로 변해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것은 딸 그레이스 스토너, 태어나 처음 1년동안 오직 아버지의 손길과 목소리, 사랑으로만 자랐던 아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얼굴에 ‘그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성이 드러나’던 아이, 스토너의 서재에서 온전한 충만함으로 서로에게 기쁨이었던 아이와의 분리다. 이디스는 두 부녀를 있는 힘껏 떼어낸다, 전략적으로, 철저히.

이디스는 적의 얼굴을 하고 스토너를 공략한다. 그의 거처를 서재에서 일광욕실로, 결국 학교의 좁은 공동 연구실로 몰아내기까지 수위를 높여가는 행동은 충격적이다. 결국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p.180)고 생각하는 스토너의 포기와 수용과 합리화의 단계들은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적의 얼굴이 이쯤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스토너의 세미나 추가 수강을 요청하던 찰스 워커, 그의 지도교수이자 노골적으로 워커를 변호하면서 기이할 정도로 스토너에게 적대적이던 로맥스 박사까지 스토너를 이중 삼중으로 애워싼다. 부모님의 쓸쓸한 죽음 또한 물론이다. ‘이제마흔 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p.254) 그런 가운데 그의 세미나를 들었던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만남은 위안이고 다행이고 슬픔이며 그럼에도 다시 다행이 아니었나 하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p.274) 캐서린과의 마지막 선택 또한 서로에게 최선이었고 다른 여지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p.301) 스토너는 ‘일이 망가질 것’을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만큼 어느날 그에게 다가왔던 문학은 모든 것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이자 유일한 삶의 의미다. 그는 공격을 회피하는 법이 없다. 고통을 호소하는 법 없이 시선을 고정하고는 묵묵히 견뎌낸다. 그의 딸 그레이스 또한 그녀가 될 수 있었을 모든 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듯한 삶을 감수한다. 인간이 인간을 해롭게 하는데는 이유도 끝간데도 없어보인다. 작품의 마지막, 작가는 ‘죽음’을 묘사한다. 노쇠와 쇠약, 병과 죽음으로의 긴밀한 바통터치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경로를 보여주면서도 특별한 대단원의 막을 그려낸다. 이 마지막 장면들, 그 먹먹함은 『타타르인의 사막(디노 부차티/문학동네)』‘ 의 끝 페이지들을 연상시킨다. 조반니 드로고가 ’인류 공동의 적‘을 대면하는 순간의 밀폐된 공간, 드로고의 마지막 몫인 ’별들‘처럼 스토너는 ’그 자신의 책‘에 손을 뻗는다.

작가가 그려낸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은 무엇보다 ‘투명하다’는 단어의 인간화처럼 보인다. 그가 열정적으로 소망하는 순간이나 무기력하게 구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나 스토너는 외부의 것들을 투명하게 통과시킨다. 스토너를 통과해 곧바로 독자에게 닿는 충격은 그래서 더 이상 캐릭터의 것, 작중 인물의 것이 아니고 아림과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증폭된다. 왜 이런 일이,이럴때는 어떻게 등의 대안과 처방과 방책을 끌어모으다가도 기대했지만 헛될 수 있고 헛되리라는 ‘인간 조건’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p.388)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의 마지막 성찰은 시처럼 노래처럼 유연하게 흐른다. 어쩌면 그를 처음 이끌었던 ‘소네트’만큼이나 완벽하다. 역자가 인용한 작가 인터뷰에처럼 스토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다(p.395)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는 그를 ‘진짜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밝힌다. ‘진짜 영웅’,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랑이었건 고난이었건 불평도 핑계도 없이 감당했던 스토너는 그런 면에서 영웅이었음은 분명하다. 또 한 편의 시처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적절한 인사인지 모르겠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p.159)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p.390)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p.3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