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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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김연수 옮김, 민음사),1974』는 조작과 거짓이 한 인간을 어떤 식으로 몰아가 끝내 추락시킬 수 있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한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제목에 덧붙여진 부제는 주인공이 겪어낼 기승전결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견한다. 작가가 ‘모토’라 칭한 서두의 단서에는 구체적인 이름(빌트지)이 등장하는데 이 세 가지 전제조건을 통해서 작품을 읽어내고 통찰하고, 문제 해결은 다른 차원에 놓더라도 진실에 닿기를 요청한다. 언제나 동시대인의 문제와 현실 인식을 화두로 삼았던 하인리히 뵐은 “우리 눈에 비치는 현실이 폐허라면, 그것을 냉철히 응시하고 묘사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다.”라며 모순과 부조리를 향해 목소리를 냈고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학교에서 교재로 읽히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그렇다면 지금 현실은 어떤가, 미래를 낙관하거나 가늠해 볼 때 하나의 씁쓸한 표본을 제시한다.

“그자들이 이 아가씨를 끝장내고 말 거야. 경찰이 안 그러면 <차이퉁>이 그럴 거예요. <차이퉁>이 그녀에 대한 흥미를 잃으면, 사람들이 그럴 거고요.”(p.45)라는 문장이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블룸을 알고 있는 블로르나 부부는 신문 1면을 장식한 그녀의 기사에 분노를 표하는 동시에 정확히 간파한다. 카타리나 블룸이 지키고, 이루어내고 싶었던 꿈과 희망은 물론 살아있는 자가 마땅히 보장받을 ‘시간’ 또한 빼앗긴 게 현실이다. 카니발 시즌, 댄스 파티에 참석했던 카타리나 블룸은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 강도 용의자였던 그의 도주를 도운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언론에 완전히 노출된다. 경찰과 신문이 카타리나에게 가하는 태도와 행동과 말은 의도된 오류를 증폭시키는 일방향으로만 속도를 낸다.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결국 한계에 이르고 만다. “내내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닐 거야.’ 하고요. 그렇지만 난 잘 알고 있었어요.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요.”(p.151) 누가 비상(飛上) 하고 싶었던 카타리나, 유년의 불행과 매정했던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내었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날개를 빼앗고 끝내 추락하게 만들었나.

소설은 스물일곱 살의 이혼녀 카타리나 블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잃어버리는 과정에 만연했던 폭력과 속수무책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 이 고통이 불러일으킨 폭력의 귀결까지 부조리한 연쇄 과정을 그린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을 전달하는 듯 보이지만 단어는 본래의 의미를 쉽게 왜곡하고 필요에 맞게 변조하며(p.32), 오히려 직업인으로서 도우려는 선의였다 포장(p.114)하면서도 문제의식이라고는 없다. 말이 내포한 진실이 곧이곧대로 수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침묵을 택하기도 한다.(p.120) 소설은 이처럼 언어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일어나는 문제를 때론 위트 있게, 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미 작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에서 반쪽 진리를 담은 주교의 어휘나 고위 장교들의 빈약한 어휘에 주목하며 침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뵐이 독일의 죄의식을 작품으로 구현한 작가였으나 절망에 유쾌함을, 처절한 자기반성과 애교를, 신랄함과 장난기를 함께 묶은 작가였다고 평했다. 또한 그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가 되었으나, 언제까지나 여전히 약자들의 형제요, 그들 중 하나였다며 ‘보통사람’이라는 명칭을 추가한다.(작가의 얼굴,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문학동네 p.300)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이름을 대체할 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전속력으로 질주해오는 이름들이, 사건들이 있기에 1974년 출간된 이 “소설” 또는 작가의 주장대로 “이야기”는 다분히 현재적이며 첨예한 쟁점으로 독자를 각성시킨다.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하인리히 뵐의 작지만 강렬한 소설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이 순간에야 비로소 카타리나는 이틀 치 <차이퉁>을 핸드백에서 꺼내 보고, 국가가(이렇게 그녀는 표현했다.)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그녀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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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어드 - 인류의 역사와 뇌 구조까지 바꿔놓은 문화적 진화의 힘
조지프 헨릭 지음, 유강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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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헨릭의 『위어드(유강은 옮김/21세기북스)』는 인간 사회의 진화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에 깊이 천착해 얻은 최대치의 수확을 꼼꼼하게 펼쳐 보이는 묵직한 저서다. 하버드대학교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위어드(원제: WEIRDest People in the World)”를 위한 연구 중 “호모 사피엔스, 그 성공의 비밀”을 먼저 출간하고 10여 년을 지속해온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제목인 “위어드”는 인간 심리의 주요측면을 대상으로 한 비교문화 연구 전체를 검토해 도달한 결론에서 만들어진다. 즉, 인간 심리에 관해 아는 거의 모든 내용이 “여러 가지 중요한 심리적, 행동적 차원에서 다소 이례적으로 보이는 인구 집단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에 “위어드”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인구 집단은 서구의Western,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 출신이기 때문이다.”(p.18)

책은 네 개 파트, 열 네 개 챕터로 “우리의 심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왜 변화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지”(p.57) 거인의 보폭만큼 넓게, 동시에 촘촘하고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본론의 첫 질문은 “당신은 누구인가?”(p.45)로 어쩌면 위어드일지 모른다고 추정한다. 위어드와 대다수의 비위어드를 나눌 때 위어드가 현대인이 지닌 보편적 특징을 더 잘 함축한다. 수치심이 삶을 지배하는 비위어드와 대비해 위어드들은 헬스장에 가는 대신 낮잠을 자면 죄책감을 느낀다는 항목에서, 이어 계속되는 지점에서 공감을 부른다. 개인의 기준과 자기 평가에 좌우되는 죄책감과 “사회적 기준과 일반적 판단에 좌우”되는 수치심은 심리가 발달하게 된 근저까지 찾아들어갈 때 문화-제도-심리 간 역동, 친족과 가족의 결속, 그리고 종교의 역할을 재정립하도록 이끈다. 책은 인간이 문화적 종이고 여러 세대를 거쳐 발전해온 “누적적인 문화적 진리”(p.100)를 기꺼이 수용하는 지혜를 지녔음을 보여주고 인간 종의 성공 핵심에 신뢰 본능이 자리함을 말한다. 이에 더해 인간의 사회성을 살피기 위해 친족과 결혼에 기반한 제도를 분석한다.

전근대 국가로부터 근대의 위어드 사회로 이행하는 직선 경로는 없으며 위어드 사회는 전혀 다른 제도적 토대 위에서, 밑바닥부터 재건된다. 친족에 기반한 조직을 포기하고 문화적 진화를 이루어낸 토대를 이제 종교에서 발견한다. 가설을 검증하고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저자는 기존의 심리 실험을 끌어오거나 새로 설계한다. 책은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등장한 보편 종교들의 세 가지 특징을 추리고 축적된 데이터를 통계 분석해서 경제 속도와의 연관성,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보여준다. 종교적 배경은 위어드 심리가 등장하는 무대를 마련한다. 책은 질문과 답, 가정과 추적을 반복하며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만족스러운 증명 이후 등장하는 필연적 의문에 또다시 답하는 방식을 되풀이한다. 빼곡한 실험과 축적된 연구 소개는 결론의 증거가 되고 이때 한계와 미진한 점을 밝힘으로 거대한 여정은 독자의 호기심과 지적 추진력을 지속적으로 끌어낸다.

인간의 심리가 집단 간 경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기 위해 전쟁의 영향을 확인하는데 전쟁 경험 참가자들 인터뷰와 전투 및 포위전 분포도 등을 활용한다. 전쟁은 도시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경제적 번영을 창출했음이 드러난다. 또한 길들여진 형태의 집단 간 경쟁이 위어드 체제에서 경제, 정치, 사회 영역에 길드로부터 합자회사의 출발점으로, 정당 결성으로, 스포츠 연맹으로 발전한다. 저자는 집단적 경쟁이 “종종 이기심과 제로섬적 사고, 공모, 족벌주의를 선호하는 집단 내부의 문화적 진화의 힘을 밀어낸다.”(p.458)며 위어드한 제도적 틀이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로 꼽는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것”의 등장과 확산을 다룬 장이다. “그것”은 “최초의 기계식 시계”, “시계”(p.460)다. 저자는 공중 시계의 확산을 WEIRD시간 심리의 등장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시간 절약에 대한 강박”(P.461)이 위어드 시간 심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며 저자 역시 항상 ‘시간을 아끼거나’, ‘시간을 내거나’, ‘시간을 찾으려고’ 애쓴다고 적는다. 이 강박은 흔들리는 예민한 추를 장착하고 잠들지 않는 눈으로 지켜보다 즉결심판하거나 심판을 지연시킴으로 더 옥죄는 효과를 낳기에 시간 측정의 근거이자 도구의 발전사는 매력적이다. 시간에 대한 심리적 인식 변화도 그 기원을 추적하고 통합한다. 마지막 챕터에서 <총, 균, 쇠>와 비교해 이 책은 "전 지구적 불평등"(P.596)과 관련하여 다이아몬드가 설명하지 않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서 제도와 심리의 공진화에 집중했으며 이 불평등의 양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교회가 가족 제도를 재편하면서 시작된 사회적, 심리적 변화를 검토할 때만”(P.597)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최재천 교수는 추천사를 “놀라운 책이다.”로 시작한다. 수 많은 찬사들 중 “담대한 시각으로 밀어붙인 기념비적 저서는 근대의 기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필독서가 될 만하다.”(발터 샤이델)는 평가처럼 저자는 종횡무진 인류의 시공간을 누비며 흩어진 금맥을 정연하게 추려낸다. 독자는 책 속에서 이제는 익숙하고도 평균적으로 감지되는 위어드의 마인드부터 섬의 외딴 지역 씨족사회의 흔적을 간직한 소수의 공동체까지 만나며 실로 축지법과 타임머신 여행에 동참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물론이고 흥미진진하다. “위어드”는 책장을 넘기는 동시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와, 정말? 대단해···오오! 등의 추임새가 이어지는 이유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구 분량과 이론을 정립해갈 때의 밀도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이 만들어내는 균형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위어드”는 독자를 끝까지 여행에 동참시키려는 친절한 책이기도 하다. 이토록 수많은 심리 실험, 이토록 현란한 통계 분석, 투명한 한계 명시 및 제언을 따라갈때 중심 주제를 놓쳤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요점을 정리해보면” 등의 청유형 정리문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또한 저자가 “궁금해요? 궁금하면 다음장으로!” 라는 깃발을 들고 전진할 때 발췌독은 불가능하다. 그저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낱말과 숫자, 그림과 각종 그래프, 지도의 영역과 경계선을 ‘알고 싶다, 알아야 한다’며 간절해진 눈으로 응시케 된다. “위어드”는 지금 이 순간까지 도달케 한 인류의 흔적과 그 안에 숨은 의미를 거시적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하는 책이다. 헌신하는 거인들 어깨 위에서 인류를 조망하게 하는 지적 안내서를 추천한다.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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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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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잡아라(김진준 옮김,문학동네,2022』는 솔 벨로의 초기작으로 1956년 출간되었다. 솔 벨로는 포크너와 헤밍웨이를 잇는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이자 필립 로스와 함께 유대 문학 작가다. 『오기 마치의 모험』(1947), 『허조그』(1964), 『샘러 씨의 행성』(1970)으로 세 차례 전미도서상 수상 기록은 여전히 깨어지지 않았고 이후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솔 벨로는 현대인의 고립과 소외를 주로 다루었고 유려한 문체와 날카로운 언어 감각을 지닌 지성파 실존주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평론가들은 특히 『오늘을 잡아라』를 “작은 회색의 걸작”, “솔 벨로의 가장 큰 업적이자, 축복받은 소설”이라 칭한다. 원제목 “Seize the Day”는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가져왔다. 작품에서 제목은 긴장을 고조시키는 전개와 더불어 다양한 함의로 부각된다.

뉴욕의 글로리아나 호텔에 주인공 토미 윌헬름과 은퇴한 의사인 그의 아버지 애들러 박사는 각각 다른 방에 묵고 있다. 다른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다른 세계에 머무는 그들이다. 환자에게 하듯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가 윌헬름에게는 큰 슬픔이다. “아버지는 알아차리지도 못하실까, 느끼지도 못하실까? 가족의식마저 잃어버리셨나? 윌헬름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p.20)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하는 지지와 관심을 윌헬름은 템킨 박사에게서 구한다. 템킨 박사는 신뢰를 보장할 수 없는 여러 직함으로 윌헬름에게 그럴듯한 ‘오늘’지상주의를 설파한다. “할리우드로 가는 것은 크나큰 실수라는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결국 그곳으로 향했다.”(p.36)투의 일들이 세 번쯤 반복되다보니 정신 차리기 힘든 오늘이 되버렸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적극적 거리두기 기조를 유지한다. 세대간, 부자간에 갈등과 트라우마, 관계 회복의 간절함만큼 높은 단절의 벽은 너무 익숙해 시공간을 초월한 인류 보편의 과제임이 다시 증명된다.

현재는 무수한 과거 순간의 총합이고 살아남았기에 가능한 시간이다. 즉, 과거와 생존의 결합이 현재고 이는 미래를 향하는 주춧돌이다. 평균만 찍어도, 실패만 없어도 성공이라 볼 수 있을까. 남루할지언정 무난한 하루, 사건 사고 없이 일몰을 맞고 내일이라는 출발선을 가지런히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최악의 오늘을 겨루는 콘테스트가 있어 자기만의 오늘을 무대 위에 진열한다면 비극의 색체 만연한 윌헬름의 ‘오늘’이야말로 그랑프리감이다. 과거 모든 실패의 결정적 장면이면서 동시에 빼도 박도 못할 동작 그만의 미래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심쩍었다. 내 그럴줄 알았기로서니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인복 없는 것도 습관인가? 이는 트리거가 되어 이미 무너지고 있던 모래성을 주저앉힌다. 아버지마저도 자신에게 십자가를 지우지 말라며 분명히 선을 그으니 이토록 비정할 수가. 윌헬름의 ‘오늘’이 모래처럼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은 밀도 높은 살과 근육, 혈관과 세포에 틈을 낸다. 회한과 자책, 분노와 공포, 땀과 눈물이. 눈물 흘리다 소리내어 울다 결국 통곡한다. 스스로 달랜다, 달래진다. 다시 돌아가도 어제의 선택을 했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내일은. 각성한 윌헬름이 해방되고 세 번째 이름을 가지게 될지도. 도처에 윌헬름들은 출몰한다.

『오늘을 잡아라』는 트루먼 쇼처럼 윌헬름의 하루를 생중계한다. 그의 고통, 어리석음, 위태로움이 속도감있는 문장으로 발사에 가깝게 그려진다.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윌헬름의 감정이 독자에게 생생하게 닿기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또한 거칠것없이 실랄하게 속내를 드러내니 안타까운 동시에 실소가 터진다. 현실밀착형 고민은 생의 주기 어디쯤에서 어떤 실수가 더 치명적인가를 재어보게도 만든다. 마흔이 넘은 윌헬름 안에 있는 어른아이는 결국 성장하게 될 것인지. 그럼에도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다. 대낮 브로드웨이의 번쩍거리는 길 한가운데를 거쳐 또다른 공간을 허락한다.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비극을 이토록 경쾌하고 선명하게 남길수 있다니 놀랍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오늘을 잡아라』는 솔 벨로 세계에 입성하는 첫 작품으로도 손색없을 것이다.

“(중략)그때는 정신적 보상을 추구할 뿐이지. 사람들을 ‘지금 여기’로 이끌어주면서. 현실 세계로. 지금 이 순간 말이야. 우리한테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미래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고.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p.97)

내심 이렇게 다짐했다. 저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않겠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저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어린애처럼 울지 않는다. 안 돼! 안 돼! 그러나 흘리지 못한 눈물이 자꾸 치밀어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한 기분이었다.(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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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뮤지컬 - 전율의 기억, 명작 뮤지컬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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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의 『방구석 뮤지컬(리텍콘텐츠,2022)』 은 뮤지컬 입문자를 위한 안내서이자 애호가를 위한 컬렉션이다. 저자가 전작 “어쩌면 동화는 어른을 위한 것”과 “200가지 고민에 대한 마법의 명언”에서 힘과 위로가 되는 문장들을 간추렸다면 이번에는 뮤지컬이라는 종합예술이 대상이다. 지금 나의 처지가 뮤지컬 볼 땐가 싶다면 그 무의식에는 나도 격렬하게 보고 싶다가 감춰져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리고 꿈꾼 적 없다면 꿈꾸게 될 것이고 사랑했다면 더 사랑하게 해 줄 것이다. 책은 뮤지컬의 거의 모든 것, 줄거리는 물론 무대장치와 조명, 의상과 안무, 연출 등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부분을 설명한다. 인터넷 검색으로 수집하는 자료와 비교할 수 없는 정선된 내용은 오롯이 저자의 진심에서 비롯되고 이는 일대일 강좌처럼 친절하다.

『방구석 뮤지컬』은 다섯 가지 주제로 30편의 작품을 담고 있는데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명 뮤지컬부터 낯선 제목까지 고루 망라하고 있다. 순서대로 주제를 생각하며 읽어나가도 되지만 이와 상관없이 제목만으로 더 궁금했던 또는 추억 돋는 작품을 먼저 펼쳐도 좋겠다. 작품 배경과 줄거리 소개로 시작해 몇 곡의 가사가, 특히 마지막에 ‘넘버’까지 실려 독자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닥터 지바고”에서 ‘은은한 흰 조명은 관객을 인물들과 함께 눈밭에 서게 만들며, 섬세한 선율의 노래는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p.157)라는 설명이 설레게 한다. 원작을 어떻게 해석했을지, 끝없는 눈의 이미지가 영화와는 어떻게 다를지, 라라의 테마도 있다면 하고 하나의 작품은 궁금증과 선망을 낳고 버킷 리스트를 늘린다.

『방구석 뮤지컬』은 하나의 체험판이기도 하다. QR코드로 제공하는 대표 넘버를 감상하도록 구성해 설명을 들은 후 실시간 무대를 감상할 수 있다. 이 뮤지컬이 낯설더라도 아래 열광하는 댓글까지 읽다 보면 나도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할 것 같은 열기를 전달받는다. 엄마가 사랑하는, 어린 우리를 극장에 데려가서 보여주셨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 싶다. “오페라의 유령”과 “지킬 앤 하이드”도 아직 못 봤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뮤지컬이라면 중학생 때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았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기에 받았던 충격과 혼란과 매력은 두 장짜리 LP 판을 사고 영어 가사를 외우고 잘 때마다 반복해서 꿈꾸는 폭풍 시기를 지나게 했다. 막달라 마리아의 청아한 고백과 겟세마네의 기도는 물론이고 고 추송웅의 유다에 놀라웠던 날들이었다.(유다가 멋져보여서 회개기도도 많이 했다는.) 『방구석 뮤지컬』은 저자의 간결한 총평 부분이 특히 인상 깊다. 여운을 간직한 채 독자 역시 자신만의 글을 보태고 싶어질 것이다. 효용이 많은 책으로 책 만으로도 공연 관람 동반서로도 추천한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림자를 떨쳐내고 지나간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이들의 운명과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지나간 시간과 찾아올 미래 사이의 선명한 대비는 뮤지컬

<레베카>를 오래도록 뇌리에 남게 합니다.(p.310)



(출판사 도서 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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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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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문학동네)』은 최고의 문장가이자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김훈이 올해 여름(2022년 8월)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출간 당시 작가는 대학시절 만난 두 권의 책이 인생에 미쳤던 지대한 영향을 밝혔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안중근의 “신문조서”다. 그로부터 200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칼의 노래”가, 다시 훌쩍 시간이 흘러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작가는 “2021년에 나는 몸이 아팠고, 2022년 봄에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 나는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배우고 들었던 역사책 속 위인 안중근은 작가의 연필 끝에서 스스로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p.306)음을 실현해낸다.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p.17) 이토 히로부미는 기뻐서 스스로 따른다는 뜻의 ‘열복’이 “문명개화의 입구이고 동양 평화와 조선 독립의 기초”(p.84)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의 열복을 요구한다.

스물 일곱 청년 안중근은 “지금 당장과 연결되지 않는 백 년 앞을 이해할 수 없”(p.24)다. 그는 집안의 장남이고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세례 받은 신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첫 아이를 안았을 때 산야에 시체가 쌓여가는데도 그 많은 목숨보다 자식의 목숨 하나가 유독 안쓰러운 이유를 자문할 뿐 답을 구하지 못한다. 빌렘 신부는 “악을 무찌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p.66)는 말을 도마 안중근에게 하지 않고, 동생 안정근은 형이 가려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안중근은 어쩔 수 없는 일을 자꾸 얘기하지 말 것을,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 찾아가겠다고 당부한다.

안중근은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를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 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p.89)으로 본다. 그에게 푯대는 하나다. 제어하기 어려운 경우의 수,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성시킨다. 형 집행 전 그는 빌렘 신부에게 하느님께 감사할 일들을 고한다. 도우심의 영역으로.

소설은 차례에 앞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이동 경로”지도에 한 페이지를 할애한다. 안중근은 권총 한 자루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성공한다. 절정에서 드러난 결과는 선명하지만 감당해야 할 여파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 까닭이 그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소설은 불안하고 격동하는 장면들에서 감정을 최대한 제한다. 특히 법정 장면에서 재판장 마나베의 질문에 답하는 우덕순, 안중근의 진술은 질문과 답변 간의 역동, 힘의 우위, 가두려는 틀을 떨치는 순전한 진실을 보여준다.

“북태평양과 바이칼이 하얼빈에서 연결되었고 철도는 하얼빈으로 모여서 하얼빈에서 흩어졌다. 하얼빈역에서는 옴과 감이 같았고 만남과 흩어짐이 같았다.”(p.137) 하얼빈에서 멈추지 않았다면 이미 죽고 죽임 당하던 이 땅에 훨씬 혹독한 날들이 기다렸을 것이다. 동양 평화라는 대의를 향한 의지가 결실했지만 촉박히 남은 시간을 정리하고 만다. 슬픔이 얼얼한 채 후기를 펴면 이는 더 짙어지기만 한다. 특히 “김아려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김아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p.289)는 설명에서 그녀의 일생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또한 ‘포수, 무직, 담배팔이’라는 부제의 후기에서 젊은 날의 소망을 이룬 작가의 여정에, 특히 한 문장 앞에서 감정이 북받친다. 김훈의 독자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생 텍쥐페리는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벽함이 성취된다.”고 했는데 이에 속하는 글임은 물론이다. 작가 특유의 정교하고 간결한 문체, 되풀이 읽고 따라 쓰고 암송해야 할 것만 같은 그의 문장은 얼음냉수처럼 속을 달랜다. 동시에 깨끗이 태워 미련이라고는 남지 않을 만큼 뜨겁다. 그렇게 청년 안중근은 다시 독자 곁에 선다. 세계문학전집에 작품을 올린 문호들, 시간에 새긴듯한 작품들이 무수하지만 우리에게는 김훈이 있다. 축복이다.


우리는 강토를 모두 잃고 어디로 가려는가. 이번에 한 번 싸워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승패와 유불리를 돌아보지 말고 싸워야 한다.(p.91)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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