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
이동연 지음 / 창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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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의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창해)2023, 272쪽』는 부제(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가 설명하듯 고흐의 삶을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고흐에게 그림은 일기였고 자작시였으며, 혼자 부르는 노래, 그러나 청중을 간절히 기다리는 노래였다. 제목인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가 숨을 거둔 후 주머니에서 발견한,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속 문장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p.269)에서 가져왔다. 저자는 KBS 해피FM <그곳에 사랑이 있었네>에 다년간 출연하며 ‘예술가와 뮤즈’를 다루었고, 그때 고흐를 방송한 인연으로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를 출간했다.(출판사 인용) 책은 들판에서 뛰어 놀다 우연히 형의 비석을 발견했던 7세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고흐 삶의 궤적을 전한다.

화가의 길을 선택한 후 10년 동안 “유화 900여 작품과 드로잉 1100여 작품을 완성했으며, 기적같이 딱 한 작품만 팔렸”던,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역사상 최고가를 형성(p.30)하게 된 고흐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책은 총 7장으로 장별 5~11개 소제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각 소제목은 10면 이내 분량이며 고흐가 통과하는 시간이 어떤 작품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림이 삶이고 삶이 그림이었던 순간들은 외제니 로이어부터 마르그리트 가셰까지 기쁨이자 상흔이었던 사랑의 행적을 기록한다. 아를에 화가 공동체를 마련하겠다는 꿈은 아를의 노란 집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으나 이 계획에 호의적이었던 고갱과는 공감보다 갈등하는 일이 더 잦다. “자연스런 풍경”과 “작가의 이미지 속에 잘 정돈된 그림”처럼 고흐와 고갱은 추구하는 스타일이나 화풍 뿐 아니라 성격이나 가치관도 달랐고 이는 고흐에게 특히 아픔으로 남는다. 고흐가 겪어야 했던 경제적 어려움과 동생 테오와 가족들에게 품고 있던 미안함, 어머니와의 관계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구두 한 켤레>를 둘러싼 하이데거와 미술 사학자 마이어 샤피로, 그리고 쟈크 데리다의 논쟁이다. 고흐가 파리에 있던 1년간 그렸던 구두 그림이 5점이나 되고 이후 아를에서 1점, 생레미 요양원에서 그렸던 가죽 나막신까지 고흐가 의미를 부여했던 대상은 시공간을 넘어선다. 그리고 처음이자 유일한 감상자들에게 닿는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는 매개체가 된다.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올리브나무 등 연작 시리즈들은 고흐가 겪는 감정의 고저를 가감 없이 반영하는 듯 보인다. 고흐가 극적으로 활용했던 임파스토 기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회화가 조소처럼 보이는 현장, 입체감에서 오는 깊은 감동이 전율을 안겨준다는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서고 싶어진다.

이제 ‘반 고흐 미술관’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디어 아트를 비롯한 다양한 전시로 그를 만날 수 있다. 고흐 관련서도 동생 테오와 나눈 서한집부터 전기소설, 인문 기행서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흐의 일생을 작품으로 요약하면서도 분량이 부담 없다. 또한 피상적이라거나 부족한 느낌 없이 한 예술가의 내면에 깊이 닿는 충만함을 선사한다. 다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림 사이즈가 너무 작았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서문과 후기 생략에도 본문에 저자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현명하고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본격적으로 고흐를 만나보려는 독자나 전시 관람을 앞두고 있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책 속에서>

고흐가 그리려는 대상은 영웅, 위인, 화려함, 미인이 아니었다. 황량한 대자연과 그곳에서 살기 위해 움직여야만 하는 바로 그 존재들이었다. 고흐는 어떤 것이든 미화하는 것을 싫어했고, 삶의 실체적 진실로만 화폭을 채워 나갔다. 그는 1885년 겨울 파리로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2년 동안 450여 작품을 완성했다.(p.51)

하지만 고흐는 유행 방식을 추종하면서까지 그림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사물을 분석하지 않고 사물에서 솟구치는 느낌을 그대로 그려나갔던 것이다.(p.62)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릴 무렵 클로드 모네는 수련을, 폴 세잔은 사과를 그리고 있었다. 모네가 수련을 자신의 상징처럼 여기고 30년간 그렸다면, 세잔은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며 40년간 사과를 그렸다. 고흐도 10년의 짧은 화가 생활 동안 꾸준히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에게 해바라기는 태양의 항구성과 삶의 무상을 상징했다.(p.121)

저는 농부들보다 못하지만, 저에게는 캔버스가 밭이에요. 일하는 분들도 쉴 때 책이나 그림이 필요하죠. 그런 그림을 그리겠습니다./이 작품을 끝으로 고흐는 더 이상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p.209)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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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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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난다, 2022)』는 “신형철 시화(詩話)”임을 먼저 밝힌다. “시평(詩評)”이 아니다. 신형철은 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로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을 출간했다. “우리 문학을 향한 ‘정확한 사랑’이자 시대를 읽는 탁월한 문장”이라는 말이 그를 설명한다. 본문에 앞서 “내가 시를 겪으며”라는 머리말은 네 면이다. 이 네 면은 끝나지 않을 페이지처럼 서두를 채운다. 조심하지 않으면 네 번이고 사십 번이고 반복하게 될 서두다.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예술이다.”부터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p.7)까지, 암기, 암송, 뭐라도 좋다. 외워야 하는 문장이다. 이런 만남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4년 만의 신작 『인생의 역사』 머리말은 아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맺는다. 이게 시가 아니면 뭐람! 저자는 시를 읽는 일에 이론보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p.8)는 말로 독자를 초대한다. 경직돼있던 어깨가 어느새 편안히 내려간다.

책은 총 5부에 걸쳐 스물다섯 편의 시를 담고 있다. 부록에서도 다섯 꼭지를 더해 아쉬움을 달랜다. 1부 “고통의 각”은 ‘가장 오래된 인생과 그 고통’을 “공무도하가”로 연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는 인생의 아픈 장면을 잠시 보여준다. 죄 없는 인간이 받는 고통의 절망은 욥기로 살핀다. 카라마조프가의 이반과 알료샤가 치열하게 논하던 밤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p.49) 에밀리 디킨슨 편에서는 “그리고 ‘지옥’이 창조되기 위해서도 단테가 상상한 총 아홉 개의 구역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뜨기만 하면 지금 여기가 지옥이므로.”(p.50)라는 데서 우두커니 멈춘다. 정확한 표현에 절로 나오는 게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선명함으로 거듭 공감을 부른다.

2부 “사랑의 면”에서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 “두이노의 비가”다. 내 스물 언저리에 경이와 절망을 함께 건넸던 릴케의 정점, “두이노의 비가”를 저자는 어떻게 보여줄까.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들“(p.86)로 자리매김한다. 인간의 사랑이 배울 수 있는 최상의 자세를 이해시킨다. 무엇보다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주랴?“(p.88)(서가에서 꺼낸 이미 절판된 두이노의 비가는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로 번역되었다/한기찬 역), 잊히지 않았던 시작만으로도 충만해진다.

놀라운 발견, “허공 한줌”은 단독자인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움켜쥠과 놓아줌은 어떠한지. “성숙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지, 할 의지가 있는지를 말이다. “기러기”에서처럼 어떤 측면에 주목하며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 선택할 수도 있다는 시 읽기의 방법론적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어떤 시 편에서는 눈물을 참아야 한다. 김시습이, 윤동주가, 최승자가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를 향한 하루키의 오랜 애도에는 숙연해진다. 독자는 성찰하는 저자의 눈을 따라가다 그 시선의 끝에 나를 놓아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될 테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혁혁한 업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라. 김수영이 김수영이어서 괴로웠던 것은 김수영뿐이고, 우리에게는 그가 있어 온통 다행인 일들뿐이다.”(p.230), 여운이 진동한다. 특히 이런 감동은 매 장을 맺을 때마다 어김없이 돌아온다. 마지막 문장들을 따로 모아 소지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시선이 지극히 민감하고 세심하다, 엄격하다. 그래서 위안이고 동시에 힘이 된다. 벅차올라 심장 누르며 읽었던 게 얼마 만인가. 신형철은 처음인데요, 자책하던 나를 너그럽게 둔다. 읽어낼 “나날들”(p.232)이 남아있음에 감사하자며. 늘 감정을 부각하지 않는 건조하고 논리적인 글을 쓰고 싶다. 서평은 이런 목적에 얼추 걸맞다. 그런데 흔치 않은 일이 때론 발생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밑도 끝도 없이 고백하고 싶어지는 난감한 상황이 말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그럼에도 한사코 목소리를 내고 마니 “인생의 역사”, 너무 사랑합니다. 모두 읽고 암송합시다! 저와 함께 외워주세요! 라고 말이다. 말리기엔 이미 늦었다. 기록해버린 진심.

책 속에서>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주관적으로 확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p.67)

왜 릴케인가. ˝릴케의 시에는 답이 없다. 인간의 언어로 제기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질문이 있을 뿐이다.˝ 어디엔가 이렇게 쓴 적이 있는데 이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답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이 있기는 하되 그것이 질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렇다.(중략)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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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 - 단숨에 술술 읽는
드니 랭동.가브리엘 라부아 지음, 손윤지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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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랭동과 가브리엘 라부아의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손윤지 옮김,BH(balance harmony),2022)』는 그리스 신화 덕후들을 또 한 번 유혹할 만한 책이다. <소설로 읽는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소설로 읽는 그리스 로마신화>등 역사와 철학 관련 저작을 출간했던 드니 랭동이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로 독자를 만난다. “단숨에 술술 읽는”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형식은 산뜻한 그래픽 노블이며 이 작업에 룰루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의 만평가이자 카투니스트 가브리엘 라부아가 힘을 보탠다. 그는 드니 랭동의 저서 『신들은 신난다』를 각색해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신들의 특징을 정리해 주는데 잘 안다고 여겼던 게 착각이었을까, 또 한 번의 지루한 반복일지 모른다는 우려는 이내 떨치고 호기심만 장착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요점만 정확히 담아낸다. 속도감 있는 전개가 페이지 터너 역할을 하며 시선을 붙잡는다. 티탄족과 기간테스족의 충돌부터 크로노스, 제우스를 비롯한 유명한 신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제우스, 권력을 가지다”부터 “아테네의 창설”까지 총 9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은 몇 개의 소제목을 포함하고 소제목별로 1~4면을 할애해 상황과 분위기, 사건과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최초의 인간 여자 판도라가 가진 단 하나의 결함인 호기심은 결국 금지된 상자를 열게 만든다. 작가는 프로메테우스가 숨겨둔 유일한 해독제 “희망”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인간이 살면서 겪을 모든 고통스러운 일에 대한 해독제로, 모든 질병에 대한 보편적인 치료제이자 온갖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위안”(p.42)이라고. 지혜의 여신 아테나 편에서는 “숨기지 않겠다. 아테나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여신이며, 그녀는 제우스가 가장 사랑하던 딸이기도 했다.”(p.108)고 애정을 드러낸다.


책은 서구문화의 기원이면서 철학과 예술 등 분야를 넘나들며 영향을 끼쳐온 그리스 신화를 재 소개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학습용 시리즈물부터 테마별로 묶은 이윤기의 저서를 비롯해 근래까지도 지속적으로 출간되어 선택지가 상당하다. 그 폭이 넓어 오히려 적절한 결정을 지연시키는 수도 있겠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세련되고 때론 유머러스한 그림은 등장인물의 성격적 특징도 반영한다. 경쾌한 문체는 비극의 색조는 낮추나 어리석음이나 실패는 간과하지 않는 거울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일러스트와 텍스트가 서로를 보완하고 강조하는 그래픽 노블이 지닌 직관적 아름다움이 즐거운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결국 행간과 여백에 숨은 서사를 한껏 캐내고 싶도록 동기부여 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는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신화의 매력을 일깨울 책이며 본격적인 완역 읽기에 앞선 가이드북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어쩌면 다양한 버전의 그리스 로마 신화 수집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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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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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정지인 옮김,곰출판) 2021』는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헌정된 룰루 밀러의 논픽션 데뷔작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향한 인간의 고투를 담는다. 빛을 발하는 것은 별이나 식물일 수도, 물고기일 수도, 고향이나 안식처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는 모호한 꿈일 수도 있다. 제목의 물고기는 어류인 물고기 자체다. 그래서 결국엔 더 큰 놀라움을 안긴다. 동시에 다양하게 변용 가능한 은유로도 해석할 수 있다. 빛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다. 타협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p.146)한 결과 인간은 어떻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치밀하게 고발하는 이 책은 위험은 늘,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경고한다.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찬사 일색의 평가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다. 여기에 밑줄에서 밑줄로 옮겨가기 어려운, 하나의 밑줄에 오래 묶어두는 책이라는 평을 더한다. 또한 삽화만 보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도 좋을 것이다.

무질서도는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알려진 이 명제는 이미 질문이 아니라 법칙이다. 혼돈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고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p.16)이다. 저자는 과학자인 아버지의 이런 주장에 반하는 인물을 알게 된다.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재난에 가까운 혼란을 대하는 방식은 가히 놀랍다. 저자는 조던의 자서전을 통해 그를 추적하게 되는데 형의 죽음과 이 시기 식물의 수집, “승리의 선언이자 통찰의 선언”(p.31)인 라틴어 학명들, 이름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며 무력함을 넘어서는 페이지들이 지나간다. 페니키스 섬에서 만나는 박물학자 루이 아가시로부터 “신성한 사다리” 개념(p.44)을 배운 조던은 평생 맞춰야 할 퍼즐이자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인 물고기를 처음으로 만난다. 그는 혼돈과 맞서는 자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라는 일곱 살 아이의 질문에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p.54)라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설명하고 재차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녀에게 혼돈만이 지배자인 이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아버지처럼 단단하기가 어렵고 가족들이 감당하는 아픔도 상처로만 새겨진다. 그때 인생의 선물과도 같은 만남으로 그녀는 안식처를 찾은 느낌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를 잃고 그를 되찾고 싶다는 간절함만 남는다. 이 여정의 끝은 기대와는 다른 결말이지만 그녀는 이미 성장한 이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빛과 그림자로부터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결과, 끊임없이 고민하고 진실에 닿고자 움직인 결론이다. 아프지만 다행스럽기도, 충격적이지만 귀 기울이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하나의 마침, 해방에 이른다.

저자는 자전적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혁신적 인물을 배치한다. 후회와 고통으로 자책하던 자신에게 실패에도 머뭇거리지 않는 돌진의 아이콘인 ‘조던으로부터 배우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스탠퍼드대학 총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19세기에 활동한 생물학자(분류학자)로 개인적 아픔도 오로지 ‘일’로 이겨낸 “그릿”의 대표주자다. “어느 생물이 어느 생물을 낳았는지에 관한 실마리, 생명이 흘러가는 방향에 관한 실마리, 인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실험에 관한 실마리,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한 비결에 관한 실마리를.”(p.105) 찾는데 온 힘을 쏟았으며 그 생물의 이름을 발음하는 행위는 “새로운 종의 탄생”(p.106) 의식이 된다. 자신이 발견한 포획물들을 전리품처럼 높이 쌓아 전시하는 그는 이미 경계를 넘는다. 또 하나의 바벨탑을 세우며 결국 “우생학”이라는 악의 지대까지 확대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다음 이야기를 곧바로 듣거나 하고 싶게 만든다. 계속 몰입하게 되는 흡인력이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책 속 이야기의 연결과 전환이 매끄럽고 미지의 것을 향한 항해에 동승하는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문장은 명확해서 이해하기 용이하다. 동시에 비유와 묘사가 아름답고 때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문하는 책이다. 인물에 이입하는 읽기가 어느 시점부터 틀어지고 선망이 실망으로, 오싹한 두려움으로,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안타까움으로, 다른 선택과 경우의 수는 없었을까 하는 두리번거림으로 번져간다. 미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관심이 덜했던 학문의 일면, 슬픈 역사의 한 장을 엿볼 수 있었고 이는 수많은 인용과 주석에서도 짐작 가능한 저자의 열정에 빚진다. 진심은 역시 독자의 가슴도 뛰게 한다. 다만, 결말에 이르자 저자의 탐구 여정과 “혼돈을 이길 방법”이라는 개인적 추구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며 뜻밖의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저자의 환희와 감격이 가히 폭발적이라 독자는 오히려 한 발 뒤로 빼며 박수라도 쳐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잘못된 일들을 저작으로 인해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이면서 커다란 성과다. 가능성과 희망, 겸허함과 공존에의 의지, 불확실성의 허용, 불확실성의 확실성을 사유하게끔 하는 책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p.189)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p.227)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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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 사회적 재난 시대의 고전 읽기
로버트 자레츠키 지음, 윤종은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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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자레츠키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Victories Never Last(윤종은 옮김,휴머니스트), 2022』는 “사회적 재난 시대의 고전 읽기”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고전을 거울삼아 현실을 비추는 책이다. 3년여 전 맞닥뜨린 코로나 19라는 현실은 두렵고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를 뚝뚝 떨어뜨렸던 팬데믹은 과거의 예를 거슬러 올라가고 문학의 상징을 들여다볼수록 예외적 현상이 아닌 또 한 번의 반복임을 일깨운다. 또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역사학자이면서 근대 고전 언어학자인 로버트 자레츠키는 유럽의 문화사와 지성사를 연구해 왔으며 카뮈 관련서들을 출간했다. 2020년 초 코로나 19가 미 전역을 휩쓸고 대면 강의가 중단된 시기에 저자는 요양병원 봉사를 자원해 재난에 처한 위기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는 활자로 기록된 고전 속 인물들과 예기치 못했던 환경에서 힘겨운 숨을 내쉬는 현실의 사람들을 교차시킨다. 어떤 뜨거움과 감동이 있다면 이는 학자의 책상을 벗어나 고통 받는 이들에게로 섞여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페스트”의 두 주인공, 리외와 타루의 대화에서 책의 제목을 가져왔다. 들어가기에 앞서 “하지만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에요.”라는 문장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전염병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 가능한 대처 방법으로 <페스트>의 장 타루가 강조하는 “주의력”과 아이리스 머독이 말하는 “삶의 밀도”에 집중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철학과 문학 탐색인데 본문에서 다섯 명, 후기에서 다시 두 작품을 살핀다. 1장 “투키디데스와 아테네 대역병”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내전인 스타시스의 기원과 의미, 투키디데스가 히포크라테스의 후계자라기보다 홉스의 선구자에 가까운 이유, “희망과 거리를 둘지언정 절망에 빠질 여지는 더더욱 남기지 않는”(p.63) 태도와 그로 인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길이 소장할 고전임을 전한다. 이쯤 되면 읽어야 할 다음 책으로 순서를 바꿔 명단에 올라오고도 남는다. 2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안토니누스 역병”은 전쟁과 역병이 한창이던 때 <명상록>을 집필하며 “내려다보는 시각”, 곧 “추상하는 시각”을 추구했던 철학자이자 로마 최고 통수권자를 만나본다.

3장 “미셸 드 몽테뉴와 가래톳 페스트”에서 역병을 피해 영지를 버리고 방랑자가 되었던 몽테뉴는 참혹했던 6개월 이후 마흔도 되기 전 은퇴하며 철학적 사색에 매진키로 결정한다. “자기 존재를 충실히 누릴 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완벽하며 신성하기까지 한 일”(p.152)이라고 했던 그는 세 권의 <수상록>으로 모든 순간의 정직한 기록자가 된다. 4장 “대니얼 디포와 런던 대역병”은 17세기 영국에서 통계의 의미와 이점을 찾아본다. 즉, “겉으로 보기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위안을 줬으며, 미래를 수량화함으로써 두려움을 억눌렀고, 과거에서 일정한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했다.”(p.175)는 통계의 기능이다. 하지만 디포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는 데 통계를 활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숫자가 의도에 의해 편집되는 일은 그 역사가 꽤 오래 되었다. 5장 “알베르 카뮈와 갈색 페스트”는 카뮈의 부조리 론과 이를 드러내기 적합한 장소, 알제리의 오랑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페스트는 사건을 넘어 나치즘을 뜻한다고 훗날 밝힌다. 타루의 입을 빌린 “인간의 모든 문제는 꾸밈없고 명쾌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말이나, 랑베르의 예에서 “도덕은 봐야할 것을 똑똑히 보는 일“(p.227)이라는 지적은 여운을 남긴다. <후기>에서는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과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나란히 놓는다. 결국 사랑이 부조리를 치유한다.

이 책은 범 유행 전염병, 팬데믹이라는 재난을 경험하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서가의 고전 몇 권을 처방한다. 그들의 행보가 우리와 다른 듯 닮았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취할 수 있을지 힌트를 마련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고전이 특별히 추려진 양보할 수 없는 작품임은 바로 알 수 있다. 로쟈 이현우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가 서평 겸 비평의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거나 한 번 읽게 하는 서평의 역할과 작품 속 인물에게 재해석의 여지를 줌으로 다시 읽게 하는 비평의 역할을 언급한다. 자연히 책장을 덮은 후 제2, 제3의 독서가 그물처럼 이어지게 된다. 또한 여기에 머물지 않는 저자의 행보가, 스러지는 이들과 눈 마주쳤던 순간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한 인간이 받아 마땅한 예우를 저자가 대표로 표한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각자 더욱 궁금한 작품은 다르겠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탁월한 저자 투키디데스를, 자기만의 성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수상록(에세)>의 몽테뉴를 먼저 만나보고 싶다. <수상록>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마지막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했던 우정을 어느 시대, 어느 독자가 되었건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문장이 의미로 가득 차서 한 줄도 제외할 수 없는 이 책은 느리게 아껴 읽을 만하다.


책 속에서>

그랑은 카뮈가 <페스트>를 구상하며 쓴 노트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보잘것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그러나 훗날 카뮈가 <보잘것없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말했듯, 보잘것없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을 아니다. 오히려 그랑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다른 인물과 달리,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알고 있다.(p.238)

내가 보기에 요양원의 현실은 고대 그리스 극작가들이 고안하고 카뮈가 받아들인 비극적 상황에 속했다. 1943년, 카뮈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비극은 대립하는 두 세력이 동등하게 정당하고 동등하게 존재할 자격을 갖추고 있을 때 성립한다.” 요양원은 <오이디푸스 왕>의 테베는 물론, <페스트>의 오랑과 비교해도 전혀 방대한 무대가 아니었지만, 충분히 비극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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