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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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에 시립도서관에서 쉽고 재밌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10회차 단편 문학 토론을 진행하게 되었다. 토론할 작품을 선택할 때 제일 먼저 포함시키는 건 도스토옙스키다. 그렇게 아홉 편을 찾게 되는데, 한 작가를 더 고정할 것 같다. 보르헤스. 보르헤스 단편집 픽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었던 게 지난 7월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은 경이로움으로 심화된다. 단편집 전체를 대상으로 서평을 쓰고, 인터넷 서점에서 이 주의 리뷰로 선정되었으나 아쉬움은 남았다. 한 편씩 더 깊이 만나보고 싶다는 갈증이 잦아들지 않았고, 만나보아야 한다는 당위는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먼저 재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의 인장격인 작품 <바벨의 도서관>으로 정했다. 하반기에 토론하게 될 열 작품은 하나같이 선정자의 사심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토론은 누가 뭐래도 보르헤스다. 드디어 며칠 후로 다가왔으니, ‘나 지금 떨고 있니?’ 설레며 자문한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1944 ,2011)중에서 바벨의 도서관은 여섯 장 반, 13면의 짧은 분량으로 도서관이라는 우주를 그려낸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p.97)라는 문장으로 시작할 때 왜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를까 궁금하다. 50대 초반 실명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임명되어 수십만 권의 책 사이에 머물렀던 그, 자신이 책의 사람이며 도서관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도서관의 구조부터 설명한다. 낮은 난간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통풍구, 동일하게 배치된 육각형 진열실, 각 진열실에 배치된 스무 개의 책장, 두 면을 제외하고 네 개의 면은 다섯 개 씩의 책장들이 덮고 있으며, ‘책장의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의 높이와 같고, 보통 키의 사서보다 조금 큰 정도’(p.97)라고 한다. 상상하니까 답답하다. 남은 두 면 중 하나가 일종의 좁은 복도와 연결되고 이 복도는 복사, 붙여넣기 반복한 듯한 진열실과 이어진다. 그리고 복도 좌우로 아주 작은 문간방 두 개, “하나는 선 채로 자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p.98)이 있다. 책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도서관인데 책에 주목하기 전에 도서관 자체가 인간을 압도한다. 책에 접근하는 건 다음 문제다. 이 곳에서 버티기 위해 장착해야 할 기본적이고도 마땅한 자세는 잠도 선 채로 자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에서 피로라고는 느끼지 않고 끝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도서관이 무한하지 않다고 추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복도에 있는 거울을 빌미 삼는다. 대상을 복제하는 거울을 왜 두었겠는가, 실제 무한하다면 복제라는 눈속임을 필요로 했겠는가. 작가를 대변하는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책에서 나는 반대 입장이다. 거울, 그 반짝거리는 거울 표면이 무한함의 형태이며 약속이라고 꿈꾸고 싶다”(p.98)고 간절함을 담는다. 그는 간절할 수밖에 없다. 도서관 안에 있는 누구나 죽음을 불사할 만큼 간절하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젊은 시절 여행을 했던 나, 한 권의 책, 편람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던 나. 이제 나의 눈은 멀어가고 나는 자신이 태어난 육각형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화자는 목적을 달성했나? 젊어서부터 한 권의 책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찾았나? 찾지 못한 채 목전에 죽음이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크게 두 가지 인듯하다. 내가 먼저 찾겠다는 탐욕으로 서로 엉켜 해친 끝에 살해당하거나, 실패를 인정하고 기도하며 죽음을 기다리거나 이다. 기도는 후세에게만은 발견의 축복을 허락해달라는 간곡함으로 점철된다. '‘나머지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p.106)는 분명 있으며, 이 책을 본 사서 즉 책의 사람’(p.105)이 존재하고, 그래서 신과 유사한 이자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순례를 떠나 모든 길을 뒤졌으나 허사였다니. 그를 찾는 소급적 방법은 명확하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고(후략)’, 이어지는 B, C의 되풀이 과정을 수행하는 일. 꽤 익숙한 사이클이다. 그러나 결국은 완벽한 책 찾기에 실패하여 내가 안 된다면 다른 누구라도 영광과 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책을 읽어볼 수 있기를 간구하는 거다. . 영광과 지혜와 기쁨의 자리가 유혹적이다. 여기에 각자가 꼽는 최고의 세 가지를 넣어본다면 과연 덤덤할 수 있을까.

 

무한한 도서관에서 죽음의 절차는 난간 위로 던져짐이다. 난간이란 첫 장 셋째 줄, 진열실 중심의 커다란 통풍구를 둘러친 그 낮은 난간을 말한다. 죽은자는 무한하게 떨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바람 속에서 분해”(p.98)될 것이다. 무한한 하강은 바벨탑을 지으며 시도했던 무한한 상승의 역과 동일하다. 떨어지면서 분해되고 무로 돌아갈 충분한 깊이가 마치 블랙홀처럼 건축물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니, 발이라도 삐끗하면 어쩌나 맥락 없는 걱정이 밀려온다. 구약에서 바벨탑은 창세기 111~9절까지 기록되었는데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는 4절에서 인간은 욕망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대 피터르 브뤼헐은 바벨탑(1563)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축조와 파괴가 어지럽다.

 

모든 부분을 꼼꼼히 기록하고 싶었으나 한 장을 쓰고 나니 힘에 부친다. 서서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무사안녕한 나의 타협이 못마땅하다. 그래도 끝맺기 전에 빠뜨릴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책의 모든 부분은 놀랍다. 상당히 논리적이라 읽으면서 설득당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에서도 동의표를 던지고 싶어진다. 그 중에서도 두 부분은 전복적이다. 첫째, “존재 가능한 언어에서 n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몇몇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란 상징이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체계라는 정확한 정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이나 피라미드혹은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을 정의 내리고 있는 앞의 일곱 단어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p.108), 작가는 느낌표로 경고하는 대신에 물음표로 넌지시 독자의 허를 찌른다. 게다가 괄호로 묶어서 말이다. 삶의 목적, 생의 존재이유, 추구할 모든 것인 도서관은 누군가에게는 다른 대체물일 수 있겠다는 한 가지 해석은 너무 단세포적이라 취소한다.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나(필자)는 왜 기뻐하는가, 전율이다.

 

두 번째로는, 결말 부분인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라는 해결책 제시다. 나는 진정한 질서를 꿈꾼다. 질서는 반복되는 무질서로부터 도달한다. 마지막 문장, “나의 고독함은 그런 우아한 희망으로 기뻐한다.”(p.109) 당신이 상상하는 무한은 무엇이요? 시간은 반복될 것이요. 라고도 들린다. 빙하기-지구멸망-간빙기-빙하기-지구멸망-간빙기, 태종태세문단세-문단세-문단세, 문닫는 일 없는 돌림노래도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 반복되는 역사도 주기적으로 보인다. 이 마당에 너무도 뛰어난 는 우아한 희망을 품고 기뻐한다.

 

토론을 위해서 만든 논제가 자유 9, 선택 3, 추가 2개인데, 빼먹은 구멍이 몇 군데 더 보인다. 핵심을 간추려야 하는데 더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과도하다. 욕심 부리지 말자. 바벨의 도서관을 봐! 갈망은 마지막까지 꿈을 꾸며 우아한 희망으로 기뻐한다지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일, 욕심이 잉태하는 죄,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1:14~15)다는 경고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탐욕하는가, 나는 무엇을 아끼는가 생각하면서 때가 되면 기꺼이 손 놓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말이다. 목요일 저녁, <바벨의 도서관> 책 들고 만납시다. 여기는 도서관은 아니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사택 내 독서실이다. 간략 서평을 마치며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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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 흔들리는 인생을 감싸줄 일흔일곱 번의 명시 수업
장석주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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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시를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하는 건 맞다.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어떤 시는 생애 어느 시기에 푯대처럼 서있다. 단 몇 행도 괜찮고 분석이 치밀하고 해독이 완벽하지 않아도 발음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감격하기도 하였다. 릴케도 헤세도 나에게는 시인이었다. 두이노의 비가는 푯대 중에서 앞에 박힌 시 대장이었다. ‘를 곰곰이 생각했으나 지금 와서 보면 이유에 논리가 정연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는다. 한 시기에 릴케를 읽었고, 릴케가 보여준 말테에 놀랐고, 로댕과 살로메를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긴다.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포레스트북스, 2024, 308면 분량)는 장석주 시인이 사랑하던 시를 가려내고 모아서 감상과 해석을 곁들인 시 에세이집이다. 나태주 시인은 추천의 말에서 읽어서 마음의 꽃다발이 되고 샘물이 되었던 시 작품들이라고 소개한다. ‘시인들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 시인은 오랫동안 아끼고 품었던 시를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내어놓는다. 5개 테마로 묶인 77편의 시가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기도 하고, 처음 읽는 시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킨다. 시인은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두르는 일 없이 시로, 삶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한 편씩 읽다 보면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이 그랬듯,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시가 있다. 저자의 짧은 첨언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도 만난다. 위로가 필요할 때를 응시하는 1장부터 그래서 모든 날, 모든 순간에 저마다의 시가 있어야 한다는 5장까지 순서대로 읽을 때 시를 교재로 삼은 인생 수업의 방향성에 더욱 수렴하겠으나, 조금 더 마음이 가는 부분을 먼저 읽어도 머물고 누리고 새기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백석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만한 한 편이 실렸는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작은 도서관에서 자기 돌봄 예술 글쓰기 강좌를 진행 중인데 자화상 그림을 보며 나를 생각하는 첫날, 필사할 선물로 드렸던 시다. 개인적으로 백석의 시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가장 좋아한다. 마냥 뭉클해서 한 행에서 다음 행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심정을 매번 경험한다. 어떤 시는 계절을, 하루에 속한 때를, 그 시간에만 들려오는 음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김현승의 고독한 이유에서 오랫동안 고독하다고 울부짖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는 입버릇처럼 고독하다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인한 정신, 자기 단련, 맨손 체조라고 생각했다. , 그렇게 고독하다고 말하는 이를 폄하했던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메마른 사람이었던가.”(p.103)라고 고백한다. 내게도 운동이 필요하구나 생각하며 다시 시를 읽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목적 위의 목적이다.”(p.102) 목적에 넘치도록 부합하는 노래는, 시는 얼마나 이 땅을, 사람을 이롭게 하는지 감탄한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시집은 소금과 빵을 가지고 있다. 종이는 갈변에 이르고 활자로 남은 잉크는 분해 직전이다. 소금빵은 구미를 당기는데 소금과 빵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양식에 담긴 긴박함을 연상케 한다. 바하만을 다시 읽어보겠다고 작정한다. 작정이 너무 많다보니 장작처럼 높이 쌓여만 간다. 저자의 시는 <> 한 편이 담겼다. 그 많은 시 중에서 호명된 <>이기에 더욱 신중하게 읽어본다. 나도 밥을 위해 타협하지 않으며, 밥 값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외면할 수 없는 주제를 받아든다. 밥을 초월한 존재인 천사 이야기로 시작하는 <두이노의 비가>1비가가 실렸다. 여전히 경이롭다.

 

이 책은 시가 거의 모든 것이었던 시인의 추억 앨범과도 같다. 시간을 거슬러 함께 걸어보는 듯하다. 소개하는 시인에 대한 간략한 요약은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시집을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무엇보다 시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의내리고 선언하는 지점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시는 움직이는 생물이고, 우주의 비밀을 새긴 로제타석이라는 것을.”(p.153), “파블로 네루다는 물음 그 자체가 시임을 증명한다. 시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묾음으로 끝나는 것!”(p.158), “쉬운 시가 늘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는 만인의 감정과 조응하는 바가 있어야만 한다.”(p.203) “시는 심상한 것의 심상치 않은 발견이다. 아무 발견도 머금지 못한 시라면 밋밋하고 무의미한 말의 무더기일 테다.”(p.230), 새겨야 할 말은 계속된다.

 

정독 도서관, 서울시내 고전 음악감상실 등 엄마에게 늘 듣던 단어를 읽는 일도 즐거웠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저자로부터 더 많은 소개와 추천과 해석을 듣고 싶어서 이런 책이 2, 3권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시집을 사러, 아니 구하러 나가고 싶다. 시집은 왠지 클릭으로 구입해서는 안될 것 같다. 몸을 이끌고 공기에 부딪히며 발로 나아가서 손에 매만지며 품에 꼭 끌어안고 와야 할 것 같다. 장석주 시인의 책이 그 길에 동행할 것이다. 추워지는 계절에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파블로 네루다는 물음 그 자체가 시임을 증명한다. 시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물음으로 끝나는 것! 물음은 시의 첫 징조요, 첫걸음이고, 곧 피어날 꽃봉오리다. 물음보다 더 강력한 시의 촉배제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그것은 시의 알파이고 오메가다. 물음을 품지 않은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진한 물음은 좋은 시의 새싹이다. (p.158)



(신간서평단_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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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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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면 지는거다, 나는 침착하다, 라고 거듭 새기며 읽기 시작하였는데 제목을 볼 때마다 초조해지는 거다. 본문 첫 장인 17페이지에 처음 나온 초조한 마음27페이지에 두 번째로 등장하였고, 제목이 반복되는 게 특이해서 번호를 매기며 읽다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작가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동어반복하며 경종을 울린다. 시작부터 끝까지. 초조한 마음(이유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939, 479면 분량)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생전에 완성한 유일한 장편 소설로 25세 현역장교 호프밀러의 심리에 현미경을 대로 인간의 보편적 욕구와 관계 맺기의 역학을 분석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최고의 전기 작가이자 심리소설의 대가로 <마리 앙트와네트>, <발자크>등을 썼으며 시, .단편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유럽 정신의 대표라고 불린 츠바이크는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이민을 떠난지 4년 만에 나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시대는 내게 불쾌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기병대 현역 장교인 안톤 호프밀러의 소대가 헝가리 국경의 주둔지가 위치한 소도시에 정착하고 몇 개월이 지나서다. 그는 모든 것이 익숙해지자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케케스팔바의 가족이 궁금하다. 만찬에 초청받아 낯선이들 가운데 앉기까지도 수습해야 할 일들이 돌출했으나 멋진 저택의 호사스런 환대는 다른 세상에 입성한 듯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황홀한 시간은 살같이 흐르고 일어나야 할 때가 되어서야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가 기억난 그는 마지막 춤을 청한다. 곧이어 경악하는 눈빛, 경련과 울음이 터지며 소란이 이어지고 사촌 언니인 일로나는 그녀가 걷지 못한다며 그 가엾은 아이에게 춤을 청했다고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p.36)하고 질책한다. ‘마법의 성’(p.31)저주스러운 집’(p.37)으로 변하였고 도망치듯 저택을 나서는 그에게는 첫 번째 탈출이 된다.

 

모든 일은 어리석은 행동에서 비롯되었다.”(p.19)는 본문의 첫 문장이 첫 번째 사건을 지칭한다. 민감한 그는 어리석은 행동이 잊히지 않고 회자되며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사과하는 의미로 꽃을 보낸다. 다시 화해의 초청을 받으며 관계는 진척을 보인다. 날듯이 달리던 딸이 기구에 묶인 몸이 되던 날부터 아버지는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에디트의 사촌 언니 일로나를 곁으로 불렀고, 콘도어 박사를 주치의로 모셨다. 케케스팔바는 소위가 제 3자 입장에서 박사에게 에디트의 치료 가능성과 완치 시기를 확답 받아 달라는 특별한 청을 하고 호프밀러 소위는 거절하지 못한다.

 

소위의 배웅을 받으며 콘도어 박사는 케케스팔바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레오폴드 카니츠라는 유대인 소년, ‘착한 카니츠라 불리던 그가 귀족 라요스 폰 케케스팔바가 되었는지의 짧고도 긴 역사다. 투철한 목적과 속임수로 한 번의 서명으로 성을 빼앗데 성공한 유대인 카니츠는 느닷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신의 상황과 닮아있는 그녀를 아내로 맞는다. 그 후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향한 두 번의 비극이 차례로 케케스팔바를 강타한다. “케케스팔바의 우울한 눈빛이 헝가리 귀족의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비극적인 투쟁을 치르면서 강렬해진 동시에 지쳐버린 유대 민족의 눈빛임을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p.187)라고 소위는 뒤늦게 일가의 비밀을 알아차린다. 케케스팔바 가족을 통해 유대인 문제를 짚고 있다. 소위는 치료 가능성에 매달리는 케케스팔바를 보면서 매번 그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 저주스러운 뜨거운 물결’(p.203)인 연민을 느끼고 책임질 수 있는 선을 넘고 만다. 의사의 경고를 무시한 행동은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연민에서 비롯된 거짓말 때문에 에디트가 행복해하지 않았던가 라며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결코 죄나 불의가 될 수 없었다!”(p.216)는 자기만의 결론은 책임회피와 만났을 때 불행의 전조일 뿐이다.

 

작가는 콘도어 박사의 입을 빌어 양날의 칼을 가진 연민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통찰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다. 두 가지 종류의 연민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진정한 연민은 감상적인 것과 거리가 먼 창조적 연민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고 어떤 비참한 최후도 기꺼이 동행할 끈기를 동반한다.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로 콘도어는 치료 실패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환자와 결혼함으로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극단에 있는 연민의 증거인 호프밀러와 콘도어 박사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은 장악력 최고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줌으로 작가의 기량에 감탄케 한다. 장편 소설이 부나 장 구분도 없이 연속되고 있음에도 한 장면의 마지막 문장과 호흡이 전환되는 첫 문장은 드라마의 다음 편처럼 독자를 빠져들게 만든다. 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이 고조되어 인물에, 사건에, 위기와 갈등에 긴장하고, 잠깐씩 맞는 화해 분위기에 함께 젖어들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심리소설의 대가라는 칭호에 걸맞게 작중 인물의 감정 변화를 뭉뚱그리는 일 없이 세밀하게 파고들고 낱낱이 분해한다. 호프밀러는 그리움이나 상심보다도 더 쓰디쓴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바로 원치 않는 사랑을 받는 고통, 그 집요한 열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p.281)이다. 불행한 사람이란, 하고 자문할 때 성별에 따라 차이를 두는 관점은 동의하기 어려우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수용되는 부분이다.

 

작가가 살아냈던 시대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소설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기에 한편으로는 페이지 터너 급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어떤 의미를 감추었을지를 더 묻게 된다. 당연히 흥미가 주는 아니었고 가독성까지 탁월하게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임을 발견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몇 달은 소설 후반에 전쟁 발발로 이어지고 주인공은 개인의 잘못과 그로인한 죄책감을 집단적 고통이라는 더 큰 비극 아래에 묻지만 결국은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을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p.463)로 소설을 맺는다. 불리한 증언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하여도 마음의 짐’(p.461)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깨달음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조로 작가가 우연히 만나게 된 주인공 호프 밀러의 과거 회상을 책 속 이야기로 전달하는 형식이다. 그는 온몸으로 경험한 끝에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집단적 용기의 본질을 깨닫는다.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무력한 개인의 분투, 위선과 허상이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들어가는 아이러니를 숙고하게 한다. 작가가 쏟아내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매끄러운 문장으로 펼쳐내는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나는 전쟁에서 주로 집단적 용기만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대오 속에서 나오는 용기 말입니다. 이 용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요소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허영심, 경솔함, 심지어는 무료함에서까지.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렇습니다. 낙오될 것에 대한 두려움, 조롱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단독행동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단적으로 고취되어 있는 이들과 반대 입장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p.13)

 

하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그 거짓 배려로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여기고 심지어 그 빌어먹을 배려가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중략) 당신들이 나를 짐승의 시체처럼 침대에 눕혀놓고 방을 나서면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저 불쌍한 것!’ 이라고 하면서 한숨을 짓겠죠. 그러면서 당신들이 한 시간, 두 시간을 불쌍하고 아픈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겠죠. 하지만 나는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고요! 나는 당신들이 날마다 나를 동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싫단 말이에요. 연민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연민은 거부하겠어요! 오고 싶으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마세요! 하지만 군마 심사 같은 엉터리 이야기를 꾸며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에요! 나는······나는 당신들의 거짓말, 당신들의 그 끔찍한 배려심은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p.102)

 

그 일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그가 어릴 때부터 신봉하던 이라는 신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오로지 자식뿐이었습니다.(중략) 그동안 돈을 모으는 데 쏟은 열정을 그때부터는 돈을 쓰는 데 쏟았습니다. 어쩌면 소위님이 그를 점잖은 귀족이라고 말한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그때부터 놀라울 정도로 금전적 이익이나 손실에 무관심해졌거든요.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아내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돈을 경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p.184~185)

 

“(전략)성인이라면 어떤 일에 관여하기 전에 자신이 어디까지 함께 갈 건지부터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죠! 물론 당신이 좋은 의도로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 건 압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강경책을 쓰건 회유책을 쓰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입니다! 연민이라······좋죠! 하지만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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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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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 루버리의 읽지 못하는 사람들(장혜인 옮김, 더퀘스트, 2024, 408면 분량)평범하지 않은 독자들읽기를 수집하고 분류, 소개한다. 저자는 읽기를 낯설게 하는 것과 자연스럽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 저술 목표 중 하나라고 밝힌다. 읽기는 더 이상 보편적인 행위도 단일한 활동도 아니다. 런던의 대학 영문학과에서 현대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 매슈 루버리는 현대문학, 미디어, 읽기의 관행과 역사를 연구하며 오늘날 읽기를 연구하는 가장 독창적인 학자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후기에서 우리가 읽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전하는데,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든 읽어내는 행위와 의지가 얼마나 숭고한지 독자는 감동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책은 총 여섯 개 장으로 친근하고 단순한 읽기라는 행위를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저자는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여섯 가지 읽기장벽은 읽기 과정이 원활하게 작동할 때는 감춰져 있는 읽기의 여러 가지 측면을 조망한다.”(p.335)고 소개하는데 읽기를 배우는 단계인 아동기에서 시작하여 읽기, 그리고 삶과 이별하는 단계인 노년기에서 맺는다. 1<문해력 신화 속 지워진 아이들>에서 저자는 난독증의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낸다. 유명인의 사례와 고전 문학 속 캐릭터 묘사, 연구서와 보고, 증언과 수기 등 생생한 인용의 집적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실재하는지 전달하고, “이런 아이들이 읽기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의 원인과 진짜 본질을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p,72)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한다. 난독증 서사의 주된 감정이 필연적으로 수치심이며 이 감정이 끌어내는 일상의 고난은 과업을 수행하는 신화속 인물만큼이나 힘겹다. 그럼에도 읽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다“(p.112), ”나는 책을 잘 읽지는 못해도 어쨌든 읽는다. 괜찮은 일 아닌가?“(p.114)라는 수기 속 긍정의 목소리로 맺는다.

 

2<한 살에 책을 펼친 아이>에서 저자는 자폐적 읽기가 책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보이는 표면 읽기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읽기라는 용어에서 배제되거나 읽기가 아닌 것으로 낙인찍혔던”(p.122) 책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을 만난다. 최초의 과독증 환자, ‘읽기 기계로 불렸던 기억 천재의 사례부터 세 살 때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어린 시절도 만난다. 책은 읽는 대상이 아닌 의례를 수행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표면 읽기를 열등한 읽기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반복한다. 활자가 주는 풍부한 자극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책 읽는 사람이 책에 느끼는 애정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하루아침에 읽을 수 없게 된다면>의 부제는 실독증과 읽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후천적 문맹이라고도 하는 실독증은 글자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특권이다. 병리 의학적 관점에서 뇌의 특정 영역 손상과 실어증 발생, 브로카 영역이라는 명명 등 역사적 사례를 거슬러 올라가고 읽기를 방해하는 여러 질병을 살펴본다. 읽기 장벽은 특히 작가에게 더 잔인하다. 자칭 읽기 중독, 활자 중독이었던 하워드 엥겔은 뇌줄증 후유증으로 실독증을 겪게 되고 수기를 통해 읽기는 곧 정체성이라는 걸 웅변한다. 신경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독자라고 정의하고, 자신이 문맹이라고 밝힌 뒤에도 계속 책을 사는 그는 의사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고 중단 없이 자기만의 독서 여정을 강행한다. 가장 인상적인 사례 중 하나다.

 

4<모든 글자가 꽃처럼 피어난다면>은 어떤 감각이 다른 감각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는 공감각을 다룬다. 처음 등장한 의학 기록부터 명칭의 변화, 예술과 문학 작품에서 포착하는 공감각적 실험들, 실제 공감각자였던 나보코프의 예를 언급한다. 글이 환하게 빛나 보이거나 집중한 글자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글자에 다양한 색이 덮여있다면 어떨까, 글자에서 맛을 느끼는 미적 공감각자의 읽기는 어떨까, 심지어 글자에 인격적 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 장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 놀랍고 아득하다. 5<영원히 꿈속을 헤매는 사람들>은 환각이 주제다. 질환 때문에 발생하는 텍스트 환각에서 현실과 읽기 세계의 경계를 흐리는 환각까지 넘나든다. 이 장은 사후세계의 문해를 상상하는 것으로 맺는데 저자는 생존자의 증언으로부터 천국에는 읽기를 가로막는 장벽이란 없어 보인다고 쓴다.

 

6<읽기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다시 읽기와 정체성을 묻는다. 치매와 노화로 인한 기억상실은 더 이상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의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여기서 치매도 무너뜨리지 못한 책의 위안중 읽기와 치매를 다루는 두 부류의 접근법이 인상 깊다. 성인 문학의 정교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에 근거한 2의 유년기접근법과 유아화를 거부하고 성인 문학과 고전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치매 친화적인 각색은 허용한다. 이 부분은 논제로 만들어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저자는 서사를 통해 기쁨을 얻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이 책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전히 읽기다.”(p.331)라는 문장으로 긴 여정을 마친다.

 

책은 장 별 서두에 인용문을 갖추고 있는데 서문의 제사는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독서다.”라는 올리버 색스의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색스를 비롯하여 읽기는 무엇인가 규명하려는 지성들의 자취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구축되거나 배제된 읽기를 드러냄으로써 저자는 표준적인 읽기 방식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더 이상 읽기는 이것이다, 라는 또렷한 정의는 필요치 않다. 숭고하기까지 한 자기만의 읽기는 직전의 내가 해내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애쓰는 일은 천국의 모습도 이에 걸맞게 상상해낸다.

 

읽기를 다루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단 매력적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읽어야 하는데,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어떡하나 하는 조급증도 일상 감정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순간은 다가온다. ‘읽는 시간에서 어떻게 더는 읽지 않는 시간으로 내려서게 될까, 읽지 않는 또는 읽지 못하는 나는 그래도 괜찮을까, 무사할까, 읽은 날들을 어떻게 뒤돌아볼까 스치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정리해본다. 상당한 분량의 사례와 수기를 수집하고 연구 분석하여 집대성한 저자 덕분에 꼭 필요한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한 문학작품 인용이다. 특별히 절판 도서인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를 빨리 찾아보고 싶어진다.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던 중에 이 책을 시작하였다. 여섯 명의 뛰어난 작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실에서 인간 정신의 깊은 부분이 읽고 쓰기에 의해 날카롭게 다듬어지는 현장을 감탄하다가 춤추는 활자를 붙잡기 위해 경주하는 전투장에 들어온 듯하여 극과 극의 읽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바벨의 도서관에 입성하는 것만으로도, 새롭고도 놀라웠던 기억만으로도 접근 불가 표지는 무용해진다. 오늘도 읽는 이들, 또 읽으려 애쓰는 이들을 지지하며 예외일 수 없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엥겔이 가볍게 설명하긴 했지만 읽기는 그저 어떤 행위가 아니다. 읽기는 정체성이다. 엥겔에게 뇌졸중은 무작위로 일어난 생물학적 사고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비뚤어진 표적으로 삼은 인간적인사건이다.(그는 의사가 뇌손상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상해라는 단어에 모욕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금세 때달았다.) 엥겔은 신경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독자라고 정의한다. 그만큼 읽기라는 말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문맹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뒤에도 계속 책을 산다. 작가로서 또 다른 자아를 상상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도 문해력 상실인이라는 정체성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독자였다. 뇌가 터져버렸지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읽기는 내 안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심장을 멈출 수 없듯 읽기도 멈출 수 없었다. 읽기는 내게 뼈, 골수, 림프, 피였다.(p.187)

 

이런 부정은 문해력 상실 상태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자칭 독자보다 읽기와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더 잘 드러내는 표현이 있을까? 물론 신경학자는 엥겔의 진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뇌가 터져버리면 사람이 분명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엥겔은 읽기와 관련된 뇌 영역만 추적하는 학자들에게 반격하며 대뇌피질이라는 좌표를 넘어 이상적인 읽기로 뻗어나간다. 엥겔은 신체적 은유를 통해 읽기란 신경학적으로 축소하거나 생리학적 용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감각을 표현해낸다.(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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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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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낭만적인 제목이라니. 밤으로의 긴 여로, 제목이 보여주는 서정적인 이미지는 사랑과 설렘, 기대를 간직한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행복한 연인의 한 때도 상상케 하듯, 길지 않은 분량을 아름다움으로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제목은 변주되고 마침내 선명해진다. 작품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인 인생을 아침부터 깊은 밤, 하루라는 시간으로 요약한다. 타이론 일가의 일상적인 하루가 가져본 적 없는 집 대신 잠시 머무는 용도의 여름 별장에서 펼쳐진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삶, 부유하는 삶이 끝없이 피로를 누적한다. 평범한 듯 맞은 아침은 시간이 흐르며 전조와 복선을 쌓고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 고통스럽게 전진한다. 작가는 자기 삶의 맨얼굴을 기꺼이 직면한다. 감히 엄두내기 어려운 치열한 기록으로 작가는 애도의 서를 완성한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민승남 옮김, 민음사, 2002, 1956, 244면 분량)는 죽음으로 향하는 길고 고단한 여행길을 압축한다. 선택한 적 없는 여행이나 그 끝에 놓인 건 밤, 불통, 절망, 죽음이다. 침몰하는 배에 앉아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결기도 보인다. 두려움에 맞서며 나아져야 한다고, 잘못을 번복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애원한다. 그들은 폭발하듯 분노를 내지르다가도 이내 자신이 더 상처받으며 사과한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을 눈앞에서 잃어가는 고통을 작품은 처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희곡은 총 4막으로 타이론의 여름 별장 거실에서 시작한다. 가장인 제임스 타이론과 아내 메리, 맏아들 제임스와 막내아들 에드먼드가 보내는 하루는 가족이 통과해 온 과거와 짐작 가능한 미래를 동시에 비춘다. 타이론은 아내가 다시 돌아와 사랑스런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며 한 마디 더 보탠다. “그러니 계속 노력해 줘요.”(p.19)라고. 일상적인 말, 사소한 언급에도 메리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에드먼드를 낳고 진통제로 몰핀을 투여받은 후 중독자가 된 메리는 집에 돌아왔으나 염려하고 의심에 사로잡힌 가족들의 시선을 받는다.

 

그녀는 남편을 원망한다. 사랑에 빠져 이른 나이에 시작한 결혼생활은 순회공연을 다니는 남편을 따라 호텔을 전전하며 이동하는 삶이었고, 병으로 한 아이를 잃고 중독이 되는 등 불행은 연거푸 다가왔다. 타이론의 돈에 대한 집착, 극단적 인색함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자식으로 혼자만 되돌아간 아버지 때문에 고생했던 어린 시절 기억의 상처에서 비롯했다. 결핵에 걸린 에드먼드를 위해서도 그는 최대한 치료비용을 아끼고 싶다.

 

형인 제임스는 무력하고 방탕하지만 에드먼드의 우상이다. 내세울 것 없이 술에 의지하지만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한결같다. 그러나 스스로 한결같은 사랑의 베일을 벗기고 진심을 노출한다. 넌 나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내가 너를 만들었다고 하던 제임스는 내가 너를 타락시켰다고, 일부러 그랬다고 밝힌다. 읽고 또 읽은 흔적을 간직한 책들 곁에서 시를 간직하고, 시를 쓰고, 시로 말하던 에드먼드는 그 밤, 병에 갉아 먹히고 있는 그 밤, 애증의 가족과 함께다. 질투, 원망, 분노가 한없는 사랑 아래에서 들끓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유가 있다. 언제부터 잘못되었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는지 아연하다. 대적하는 동시에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마약이, 술이, 돈이나 또 다른 대상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도피처가 된다. 패배를 인정하듯 운명을 생각한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p.72)라고.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가 인장과도 같은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작가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p.72)이 어떻게 일어나고 말았는지 기록으로 남긴다. 작가 자신과 가족을 일대일로 대응시킨 인물들은 영원히 상영되는 활동사진처럼 끝없이 고통 받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서 밀러는 작가의 마지막 희곡이자 리얼리즘이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작품이 가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위대한 용서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미국 현대 연극의 아버지라 불린 유진 오닐은 새로운 극작 기법과 끊임없는 실험으로 후배 극작가들의 영원한 영감과 영향력의 원천이 되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미국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이자 사후 3년째 되던 해에 수상한 것을 포함하여 총 4회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다.

 

책에서 안개의 비유는 특히 인상 깊다. 어머니 메리는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길이 안 보이는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도 모르겠어. 항상 이랬으면 좋겠다. 벌써 어두워지고 있어. 곧 밤이 될 거야. 다행히도.”(p.120)라고 안개와 밤을 구한다. 작가의 대변자인 에드먼드는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p.158)라고 말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탈고한 작가는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은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하는데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데 필요한 시간을 그렇게 산정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책은 인물의 눈빛과 표정, 몸짓과 떨림까지 마치 눈앞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전달하기에 아름다운 은유와 적확한 문학 인용문들까지 더해 비극의 색조를 짙게 만든다. 작품을 읽고 작품 설명을 마치고 나면 비극을 두 번 읽은 듯 마음이 아프다. 마침내 작품은 고통을 고통으로 승화시켜 비로소 편안하게 놓아주고 달래는 애도가 된다. “빌어먹을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 방에서 죽는군.”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탄식은 삶 자체가 연극과도 같았던 거장의 대사로 들린다. 밤이 다가오기 전에 읽어야 할 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에드먼드 (앞을 응시하며)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 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 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 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 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 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아버지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 조롱하듯 히죽거린다.)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맞는 말이니 까.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생은 고르곤 셋을 하나 로 합쳐놓은 것과 같아요.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해 버린다는 그 괴물들 말예요. 아니면 판 이거나, 판을 보면 죽게 되고-영혼이 말예요-유령처럼 살아가게 되죠.(p.15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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