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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올 하반기에 시립도서관에서 ‘쉽고 재밌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10회차 단편 문학 토론을 진행하게 되었다. 토론할 작품을 선택할 때 제일 먼저 포함시키는 건 도스토옙스키다. 그렇게 아홉 편을 찾게 되는데, 한 작가를 더 고정할 것 같다. 보르헤스. 보르헤스 단편집 『픽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었던 게 지난 7월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은 경이로움으로 심화된다. 단편집 전체를 대상으로 서평을 쓰고, 인터넷 서점에서 이 주의 리뷰로 선정되었으나 아쉬움은 남았다. 한 편씩 더 깊이 만나보고 싶다는 갈증이 잦아들지 않았고, 만나보아야 한다는 당위는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먼저 재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의 인장격인 작품 <바벨의 도서관>으로 정했다. 하반기에 토론하게 될 열 작품은 하나같이 선정자의 사심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토론은 누가 뭐래도 보르헤스다. 드디어 며칠 후로 다가왔으니, ‘나 지금 떨고 있니?’ 설레며 자문한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1944 ,2011)』 중에서 『바벨의 도서관』은 여섯 장 반, 13면의 짧은 분량으로 도서관이라는 우주를 그려낸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p.97)라는 문장으로 시작할 때 왜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를까 궁금하다. 50대 초반 실명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임명되어 수십만 권의 책 사이에 머물렀던 그, 자신이 책의 사람이며 도서관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도서관의 구조부터 설명한다. 낮은 난간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통풍구, 동일하게 배치된 육각형 진열실, 각 진열실에 배치된 스무 개의 책장, 두 면을 제외하고 네 개의 면은 다섯 개 씩의 책장들이 덮고 있으며, ‘책장의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의 높이와 같고, 보통 키의 사서보다 조금 큰 정도’(p.97)라고 한다. 상상하니까 답답하다. 남은 두 면 중 하나가 일종의 좁은 복도와 연결되고 이 복도는 복사, 붙여넣기 반복한 듯한 진열실과 이어진다. 그리고 복도 좌우로 아주 작은 문간방 두 개, “하나는 선 채로 자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p.98)이 있다. 책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도서관인데 책에 주목하기 전에 도서관 자체가 인간을 압도한다. 책에 접근하는 건 다음 문제다. 이 곳에서 버티기 위해 장착해야 할 기본적이고도 마땅한 자세는 잠도 선 채로 자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성>에서 피로라고는 느끼지 않고 끝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도서관이 무한하지 않다고 추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복도에 있는 거울을 빌미 삼는다. 대상을 복제하는 거울을 왜 두었겠는가, 실제 무한하다면 복제라는 눈속임을 필요로 했겠는가. 작가를 대변하는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책에서 나는 반대 입장이다. 거울, 그 반짝거리는 거울 표면이 “무한함의 형태이며 약속이라고 꿈꾸고 싶다”(p.98)고 간절함을 담는다. 그는 간절할 수밖에 없다. 도서관 안에 있는 누구나 죽음을 불사할 만큼 간절하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젊은 시절 여행을 했던 나, 한 권의 책, 편람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던 나. 이제 나의 눈은 멀어가고 나는 자신이 태어난 육각형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화자는 목적을 달성했나? 젊어서부터 한 권의 책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찾았나? 찾지 못한 채 목전에 죽음이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크게 두 가지 인듯하다. 내가 먼저 찾겠다는 탐욕으로 서로 엉켜 해친 끝에 살해당하거나, 실패를 인정하고 기도하며 죽음을 기다리거나 이다. 기도는 후세에게만은 발견의 축복을 허락해달라는 간곡함으로 점철된다. '‘나머지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p.106)는 분명 있으며, 이 책을 본 사서 즉 ‘책의 사람’(p.105)이 존재하고, 그래서 신과 유사한 이자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순례를 떠나 모든 길을 뒤졌으나 허사였다니. 그를 찾는 소급적 방법은 명확하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고(후략)’, 이어지는 B, C의 되풀이 과정을 수행하는 일. 꽤 익숙한 사이클이다. 그러나 결국은 완벽한 책 찾기에 실패하여 내가 안 된다면 다른 누구라도 “영광과 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책”을 읽어볼 수 있기를 간구하는 거다. 흠. 영광과 지혜와 기쁨의 자리가 유혹적이다. 여기에 각자가 꼽는 최고의 세 가지를 넣어본다면 과연 덤덤할 수 있을까.
무한한 도서관에서 죽음의 절차는 난간 위로 던져짐이다. 난간이란 첫 장 셋째 줄, 진열실 중심의 커다란 통풍구를 둘러친 그 낮은 난간을 말한다. 죽은자는 “무한하게 떨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바람 속에서 분해”(p.98)될 것이다. 무한한 하강은 바벨탑을 지으며 시도했던 무한한 상승의 역과 동일하다. 떨어지면서 분해되고 무로 돌아갈 충분한 깊이가 마치 블랙홀처럼 건축물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니, 발이라도 삐끗하면 어쩌나 맥락 없는 걱정이 밀려온다. 구약에서 바벨탑은 창세기 11장 1절~9절까지 기록되었는데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는 4절에서 인간은 욕망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대 피터르 브뤼헐은 바벨탑(1563)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축조와 파괴가 어지럽다.
모든 부분을 꼼꼼히 기록하고 싶었으나 한 장을 쓰고 나니 힘에 부친다. 서서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무사안녕한 나의 타협이 못마땅하다. 그래도 끝맺기 전에 빠뜨릴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책의 모든 부분은 놀랍다. 상당히 논리적이라 읽으면서 설득당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에서도 동의표를 던지고 싶어진다. 그 중에서도 두 부분은 전복적이다. 첫째, “존재 가능한 언어에서 n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몇몇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란 상징이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체계’라는 정확한 정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은 ‘빵’이나 ‘피라미드’ 혹은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을 정의 내리고 있는 앞의 일곱 단어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p.108), 작가는 느낌표로 경고하는 대신에 물음표로 넌지시 독자의 허를 찌른다. 게다가 괄호로 묶어서 말이다. 삶의 목적, 생의 존재이유, 추구할 모든 것인 도서관은 누군가에게는 다른 대체물일 수 있겠다는 한 가지 해석은 너무 단세포적이라 취소한다.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나(필자)는 왜 기뻐하는가, 전율이다.
두 번째로는, 결말 부분인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라는 해결책 제시다. 나는 진정한 질서를 꿈꾼다. 질서는 반복되는 무질서로부터 도달한다. 마지막 문장, “나의 고독함은 그런 우아한 희망으로 기뻐한다.”(p.109) 당신이 상상하는 무한은 무엇이요? 시간은 반복될 것이요. 라고도 들린다. 빙하기-지구멸망-간빙기-빙하기-지구멸망-간빙기, 태종태세문단세-문단세-문단세, 문닫는 일 없는 돌림노래도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 반복되는 역사도 주기적으로 보인다. 이 마당에 너무도 뛰어난 ‘나’는 우아한 희망을 품고 기뻐한다.
토론을 위해서 만든 논제가 자유 9개, 선택 3, 추가 2개인데, 빼먹은 구멍이 몇 군데 더 보인다. 핵심을 간추려야 하는데 더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과도하다. 욕심 부리지 말자. 바벨의 도서관을 봐! 갈망은 마지막까지 꿈을 꾸며 우아한 희망으로 기뻐한다지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일, 욕심이 잉태하는 죄,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약 1:14~15)다는 경고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탐욕하는가, 나는 무엇을 아끼는가 생각하면서 때가 되면 기꺼이 손 놓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말이다. 목요일 저녁, <바벨의 도서관> 책 들고 만납시다. 여기는 도서관은 아니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사택 내 독서실이다. 간략 서평을 마치며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