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평점 :
매슈 루버리의 『읽지 못하는 사람들(장혜인 옮김, 더퀘스트, 2024, 408면 분량)』은 ‘평범하지 않은 독자들’의 ‘읽기’를 수집하고 분류, 소개한다. 저자는 읽기를 낯설게 하는 것과 자연스럽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 저술 목표 중 하나라고 밝힌다. 읽기는 더 이상 보편적인 행위도 단일한 활동도 아니다. 런던의 대학 영문학과에서 현대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 매슈 루버리는 현대문학, 미디어, 읽기의 관행과 역사를 연구하며 “오늘날 읽기를 연구하는 가장 독창적인 학자”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후기에서 우리가 읽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전하는데,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든 읽어내는 행위와 의지가 얼마나 숭고한지 독자는 감동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책은 총 여섯 개 장으로 친근하고 단순한 ‘읽기’라는 행위를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저자는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여섯 가지 읽기장벽은 읽기 과정이 원활하게 작동할 때는 감춰져 있는 읽기의 여러 가지 측면을 조망한다.”(p.335)고 소개하는데 읽기를 배우는 단계인 아동기에서 시작하여 읽기, 그리고 삶과 이별하는 단계인 노년기에서 맺는다. 1장 <문해력 신화 속 지워진 아이들>에서 저자는 난독증의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낸다. 유명인의 사례와 고전 문학 속 캐릭터 묘사, 연구서와 보고, 증언과 수기 등 생생한 인용의 집적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실재하는지 전달하고, “이런 아이들이 읽기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의 원인과 진짜 본질을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p,72)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한다. 난독증 서사의 주된 감정이 필연적으로 ‘수치심’이며 이 감정이 끌어내는 일상의 고난은 과업을 수행하는 신화속 인물만큼이나 힘겹다. 그럼에도 ”읽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다“(p.112), ”나는 책을 잘 읽지는 못해도 어쨌든 읽는다. 괜찮은 일 아닌가?“(p.114)라는 수기 속 긍정의 목소리로 맺는다.
2장 <한 살에 책을 펼친 아이>에서 저자는 ‘자폐적 읽기’가 책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보이는 표면 읽기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읽기라는 용어에서 배제되거나 “읽기가 아닌 것으로 낙인찍혔던”(p.122) 책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을 만난다. 최초의 과독증 환자, ‘읽기 기계’로 불렸던 기억 천재의 사례부터 세 살 때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어린 시절도 만난다. 책은 읽는 대상이 아닌 ‘의례’를 수행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표면 읽기를 열등한 읽기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반복한다. 활자가 주는 풍부한 자극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책 읽는 사람이 책에 느끼는 애정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장 <하루아침에 읽을 수 없게 된다면>의 부제는 “실독증과 ‘읽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후천적 문맹이라고도 하는 실독증은 글자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특권이다. 병리 의학적 관점에서 뇌의 특정 영역 손상과 실어증 발생, 브로카 영역이라는 명명 등 역사적 사례를 거슬러 올라가고 읽기를 방해하는 여러 질병을 살펴본다. 읽기 장벽은 특히 작가에게 더 잔인하다. 자칭 읽기 중독, 활자 중독이었던 하워드 엥겔은 뇌줄증 후유증으로 실독증을 겪게 되고 수기를 통해 읽기는 곧 정체성이라는 걸 웅변한다. 신경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독자라고 정의하고, 자신이 ‘문맹’이라고 밝힌 뒤에도 계속 책을 사는 그는 의사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고 중단 없이 자기만의 독서 여정을 강행한다. 가장 인상적인 사례 중 하나다.
4장 <모든 글자가 꽃처럼 피어난다면>은 어떤 감각이 다른 감각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는 공감각을 다룬다. 처음 등장한 의학 기록부터 명칭의 변화, 예술과 문학 작품에서 포착하는 공감각적 실험들, 실제 공감각자였던 나보코프의 예를 언급한다. 글이 환하게 빛나 보이거나 집중한 글자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글자에 다양한 색이 덮여있다면 어떨까, 글자에서 맛을 느끼는 미적 공감각자의 읽기는 어떨까, 심지어 글자에 인격적 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 장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 놀랍고 아득하다. 5장 <영원히 꿈속을 헤매는 사람들>은 환각이 주제다. 질환 때문에 발생하는 텍스트 환각에서 현실과 읽기 세계의 경계를 흐리는 환각까지 넘나든다. 이 장은 사후세계의 문해를 상상하는 것으로 맺는데 저자는 생존자의 증언으로부터 “천국에는 읽기를 가로막는 장벽이란 없어 보인다”고 쓴다.
6장 <읽기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다시 읽기와 정체성을 묻는다. 치매와 노화로 인한 기억상실은 더 이상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의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여기서 ‘치매도 무너뜨리지 못한 책의 위안’ 중 읽기와 치매를 다루는 두 부류의 접근법이 인상 깊다. 성인 문학의 정교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에 근거한 ‘제2의 유년기’ 접근법과 유아화를 거부하고 성인 문학과 고전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치매 친화적’인 각색은 허용한다. 이 부분은 논제로 만들어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저자는 ‘서사를 통해 기쁨을 얻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이 책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전히 읽기다.”(p.331)라는 문장으로 긴 여정을 마친다.
책은 장 별 서두에 인용문을 갖추고 있는데 서문의 제사는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독서다.”라는 올리버 색스의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색스를 비롯하여 읽기는 무엇인가 규명하려는 지성들의 자취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구축되거나 배제된 읽기를 드러냄으로써 저자는 표준적인 읽기 방식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더 이상 읽기는 이것이다, 라는 또렷한 정의는 필요치 않다. 숭고하기까지 한 자기만의 읽기는 직전의 내가 해내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애쓰는 일은 천국의 모습도 이에 걸맞게 상상해낸다.
“읽기”를 다루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단 매력적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읽어야 하는데,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어떡하나 하는 조급증도 일상 감정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순간은 다가온다. ‘읽는 시간’에서 어떻게 더는 ‘읽지 않는 시간’으로 내려서게 될까, 읽지 않는 또는 읽지 못하는 나는 그래도 괜찮을까, 무사할까, 읽은 날들을 어떻게 뒤돌아볼까 스치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정리해본다. 상당한 분량의 사례와 수기를 수집하고 연구 분석하여 집대성한 저자 덕분에 꼭 필요한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한 문학작품 인용이다. 특별히 절판 도서인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를 빨리 찾아보고 싶어진다.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던 중에 이 책을 시작하였다. 여섯 명의 뛰어난 작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실에서 인간 정신의 깊은 부분이 읽고 쓰기에 의해 날카롭게 다듬어지는 현장을 감탄하다가 춤추는 활자를 붙잡기 위해 경주하는 전투장에 들어온 듯하여 극과 극의 읽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바벨의 도서관에 입성하는 것만으로도, 새롭고도 놀라웠던 기억만으로도 접근 불가 표지는 무용해진다. 오늘도 읽는 이들, 또 읽으려 애쓰는 이들을 지지하며 예외일 수 없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엥겔이 가볍게 설명하긴 했지만 읽기는 그저 어떤 행위가 아니다. 읽기는 정체성이다. 엥겔에게 뇌졸중은 무작위로 일어난 생물학적 사고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비뚤어진 표적으로 삼은 ‘인간적인’ 사건이다.(그는 의사가 뇌손상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상해’라는 단어에 모욕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금세 때달았다.) 엥겔은 신경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독자라고 정의한다. 그만큼 읽기라는 말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문맹’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뒤에도 계속 책을 산다. 작가로서 또 다른 자아를 상상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도 문해력 상실인이라는 정체성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독자였다. 뇌가 터져버렸지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읽기는 내 안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심장을 멈출 수 없듯 읽기도 멈출 수 없었다. 읽기는 내게 뼈, 골수, 림프, 피였다.(p.187)
이런 부정은 문해력 상실 상태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자칭 독자’보다 읽기와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더 잘 드러내는 표현이 있을까? 물론 신경학자는 엥겔의 진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뇌가 터져버리면 사람이 분명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엥겔은 읽기와 관련된 뇌 영역만 추적하는 학자들에게 반격하며 대뇌피질이라는 좌표를 넘어 이상적인 읽기로 뻗어나간다. 엥겔은 신체적 은유를 통해 읽기란 신경학적으로 축소하거나 생리학적 용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감각을 표현해낸다.(p.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