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시대정신
최상명 지음 / 푸른숲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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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

 

정치에 문외한이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2012년 그리고 나의 일생, 2012년은 뜻깊은 한해로 추정이 된다. 그 이유는 2012년은 내가 처음으로 대선을 경합하여 투표를 펼친 한 해이고 더군다나 여러 정치적으로 시선을 돌린 역사적사실을 추려본 날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안철수현상에 대한 보답이고 진보냐 보수냐의 정권싸움 대선토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2년 대선을 뒤돌아보면서 정치적인 서적도 우수수 쏟아졌던 한 해였던 것 같다. 2012년에 정치적인 서적을 받은 건 이로인해 총 두 번째가 아닐까 한다. 처음에는 근혜철수뎐 이라는 안철수와 문재인 이 단일화경합을 펼치기 전에 나온 시사적인 서적이였다. 비록, 나의 소망과 나의 희망이였던 안철수가 자진사퇴하면서 대선에 관심이 급 사라지는 현상이 있었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소중한 한표가 무사히 치뤄졌다는데에 의의를 두고 있고 더군다나 그 이전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 이전의 정치에 안목이 없었던 나를 꾸짖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현 실황을 되돌아 보는 상황이였다고 생각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여론이 60% 가 넘었지만 다시 여당이 정권을 잡아간 이 시점에 古人 이 된 김근태 의원은 하늘에서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잘된 일이라고 추궁할 것인가, 아니면 사실상, 진심이 당긴 민주화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구나 라고 허심탄회하게 한숨과 지조섞인 웃음 을 자화내실까 궁금하다. 사실, 맨처음에 이 책을 읽고 나서 김근태 의원 을 어렴풋이 어디서 많이 본 낯이 익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치적인 견해와 안목이 없던 나로써는 사뭇 기억이 가물가물 했으며, 어디서 많이 본 어디서 많이 보았던 이라는 생각을 책장을 넘기면서까지 기억이 나지않아 골머리를 앓았었다. 중간 정도 읽고 있는 도중 어렴풋이 기억이 난 게 있었는데 가장 중요했던 그 고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 2004년 경 복지부장관으로 엮임했을 시 TV 나 언론매체로 인해 얼핏 본 기억이 내 뇌리속에 저장이 되어 있다. 그 이전에 정치적으로 안목이 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엔 지금은 古人이 되신 김근태 의원의 이력과 살아온 여력을 살펴보는 이 서적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는 나에게 가져다 주고 시사해주는 바가 무궁무진 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로, 이 시대에 이런 분 이 우리와 같은 공기 같은 하늘아래 살아 숨쉬지 못하는 세상이 원통하고 비통한 시간이였다. 한달전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이라는 책을 보고 이 책 또한 인권에 대해 힘쓰시고 이 시대의 진정한 민주주의자 국민을 생각하는 그런 분이 서거 하셨다는 이야기를 보게 되니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 과 김근태 의원의 공통점이라면 언제나 자나깨나 국민을 생각하고 특히, 인권에 대해 정말로 혼신을 다해 신경쓰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변화시킬려고 노력하셨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시사하는 점이 많은데 독재정권이 난무하던 시절에 겪었던 우리시대의 아버지 상, 격동의 시절을 보낸 그 시절에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던 수많은 청년들을 대변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얼마전 대선경합에서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한 문재인 후보 또한 독재정권에 맞써 시위를 하고 민주화를 외쳐되던 청년중에 하나 였다. 그리고 김근태 의원 또한 그 시위의 대표가 되어 온갖 고문과 고통을 감내하였으며 그 고통을 비록, 자기자신의 승천의 길을 걷지 못한 일 이였지만 언제나 국민을 생각하고 민주화에 대해 생각하신 지고지순한 그 마음은 영원불멸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古人 이 되신 수많은 민주화 투쟁의 연속선상에 계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 도 그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그러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민주당의 한 핵심적인 인물로써 인권과 민주정치의 핵심선상에 오른 인물중에 그룹이다. 김근태 의원도 마찬가지 였다. 그치만, 유럽의 선행 정치를 습득하고 답습하여 우리나라에 걸맞은 정치를 입각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 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그 꿈은 이 시대에 입각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이러날 것이라는 생각이 자화한다. 우리나라가 한시라도 빨리 이런 고충과 병들어 있는 폐해를 치유할 수 만 있다면 민주화를 외쳤던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지금 같은 하늘아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저 멀리 이 구간을 바라본다면 만세를 부르면서 서로 얼싸안고 부둥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항상 어려움이 동반된 상처가 깊은 나라이다. 20세기에는 갖은 식민지화와 더불어 민족분열의 고통을 겪고 삼팔선이 그어져 남 과 북이 되어 온 지 무려 50년이 지난 세월을 지낸 나라이다. 하루 빨리 진정한 민주화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수 없다는 그런 말 처럼 남과 북이 통일이 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진정한 하나 로 거듭나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민주화를 외치는 모든 사람들과 지금 같은 하늘아래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 그것은 바로 통일 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제목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의 모토는 바로 남 과 북 그리고 인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게 바로 진정한 "하나" 가 아닐까 한다. 내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김근태 의원을 다시한번 추모해 본다. 古人의 명복을 빕니다. 민주화의 꺼진 등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같은 하늘아래 살아숨쉬지 않아도 영원불멸한 그 민주화의 등불 민주화의 씨앗인 김.근.태 라는 이름 삼,석자는 잊지 않을 겁니다. 잊지 못할 겁니다.

 

 

 

 

- 작가 소개 -

 

최상명, 정치학 박사.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 소장. 한반도재단 사무총장. 우석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학생운동 시절 당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과 조우한다. 온화하고 따듯하면서도 논리 전개에 있어서는 예리했던 운동권 선배의 정세 분석에 대한 강론을 듣고 감동한다. 1989년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민주동문회를 결성하여 시민사회단체 등과 사회활동을 전개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개혁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현혹할 때 김근태를 찾아간다. 그리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김근태가 세상과 이별할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신자유주의 대안의 정책을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학구파 김근태와 호흡을 같이했던 두 사람의 토론학습은 김근태의 미발표 국민제안문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지속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설계하기 위해 2009년 여름, 김근태와 함께 '동인모임'을 결설한다. 정치인, 언론인, 학자, 전문가 등이 참석한 이 스터디 모임은 김근태 서거 직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2007년 김근태는 대선후보를 사퇴하고 대통합을 위해 매진한다. 그해 민주진영은 대선에서 패배한다. 2008년 4월 김근태는 총선에서 낙선한다. 김근태의 시련이 이어진 것이다. 김근태는 그때부터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반보수, 반신자유주의의 깃발을 새로 세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때 한반도재단 기획회의와 동인연구모임 등을 함께 하며 김근태의 인간적 고뇌와 정치적 사건의 뒷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간 '정치지도자 김근태'를 따르던 후배에서 김근태의 철학과 사상, 인간적인 면모를 기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김근태가 세상을 떠나기 20일 전, 김근태의 딸 병민의 결혼식이 있었다. 가족들 모두가 결혼식장에 가고 혼자 병실의 김근태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인재근의 메모를 발견한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고난의 역사를 기록하고 가르치라. 구약 레위기". 오전 10시쯤 김근태가 순간적으로 의식이 돌아왔다. 기뻤다. 반가워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었다. 김근태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잠시 후 김근태는 다시 깊은 수면에 들어갔다. 그렇게 김근태의 마지막 의식과 교감한 순간 김근태를 기록하는 일이 숙명으로 다가왔다.

 

 

 

 

- 책 속의 밑줄 -

 

김근태는 인권상보다 '진실의힘' 의 존재, 그리고 여러분과의 만남을 귀하게 여겼을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근태는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진심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었습니다. 고문 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고통받았을까를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마음 아파했을 겁니다. 그러고는 고문의 기억이 되살아나 며칠 몸살을 앓았겠지요. 바로 그것이 고문의 트라우마가 주는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스스로 치유와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진실의힘' 아니겠습니까. '진실의힘'의 활동을 보고 직접 체험했다면 김근태는 너무나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했을 겁니다. 김근태의 흐뭇한 미소와 믿음으로 일렁이는 눈빛이 이곳에 한가득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 P 9,10, 우리가 서로에게 때로는 왼발로 때로는 오른발로 -

 

2004년 2월 13일. 국회에서 이라크 추가 파병 결의안이 채택됐다. 반대하던 김근태 원내대표도 찬성표를 던졌다. 본회의장을 나오던 그에게 소회를 물었다. "소신은 다르지만 당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줄 알았다. "미안해." 김근태스러웠다.

이기수, <경향신문> '아침을 열며 - 내 기억 속의 김근태'(2012.1.1)

- P 24,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김근태에게 파병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런 우리가 평화가 아닌 전쟁 세력의 편에 서게 되면, 유사시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할 명분을 잃게 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김근태는 파병반대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찬성표를 던진 후 수개월간 자책감에 빠져 지냈고, 고문 후유증을 앓을 때와 똑같은 건강 악화에 시달렸다.

- P 26,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이 헌번 1조의 깃발을 분명히 높이 들어야 한다. 지금 바로 그렇게 해야 한다.

- P 29, 민주주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1985년 12월 19일 모두진술

- P 32,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수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군사독재 당시 많은 사람이 붙잡혀 가고, 고문당하고, 불법 처형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문을 한 후, "어디 가서 고문당했다는 얘기를 하면 다시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조용히 살면 풀어주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대부분은 조용히 산다. 그러나 김근태는 달랐다. 그는 그런 식의 제재에 맞섰다. 그런 고문이불법이고 비도덕적이고 자신의 조국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런 식의 제재에 맞서는 것이 자신의 안전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사람이다. 그렇게 군사독재 정권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 최경준 기자, <오마이뉴스>(2012. 2. 25)

- P 38, 민주주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김근태는 그렇게 늘 현장에 있었다. 그는 '소외된 사람 없는 사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회'를 향한 희망을 계속 꿈꾸었다.

- P 46,47,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민청련의 상징인 두꺼비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두꺼비가 뱀한테 잡아먹히면 자기는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서 죽는데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 삼아 새롭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탄압을 받아서 죽겠지만 이것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는 데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희생을 결단하자는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세웠습니다.

- P 47,48,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인재근에게는 김근태의 바깥사람이란 별명이 있다. 예전 인재근 의원이 민가협 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가끔 영등포 교도소에 있는 김근태와의 면회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인 의원은 영등포 교도소 주변 아파트 담벼락에 서서 '김근태! 인재근 왔어, 면회 못해서 미안해!' 라고 소리치곤 했다. 그러면 안에서 김근태가 '어이'하고 대답했다. 감옥 안의 김근태와 김근태의 바깥사람 인재근은 그렇게 통방하면서 민주화 투쟁의 나날을 보낸 부부이자 동지였다. 인재근 의원은 이 에피소드를 말할 때마다 눈물을 훔친다.

- P 49,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2년 전 최고위원 경선 때 실세인 권노갑 씨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을 받았다."

"2008년 8.30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 당시 5억 3천 8백 72만 원을 썼다."

"그때 쓴 돈 중 2억 4천 5백만 원을 신고하지 않았다."

"민주당 국민경선이 돈을 매개로 한 조직 선거 양상을 보이고 있어 내 발등을 찍는 심정으로 고백성사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

- P 55,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11일 경선 결과가 언론에 발표되자 김근태의 홈페이지는 수 천명이 동시 접속해 이메일을 띄우는 바람에 서버가 여러 번 다운됐다. 하루 동안 쏟아진 이메일이 무려 1천여통(...) 새로 가입한 후원회와 팬클럽 회원도 수백 명을 넘어섰다.(...) 이처럼 김 고문의 정치자금 고백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뜨겁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정치 현실에 비춰 볼 때 지나치게 순수하다"고 비판론을 제기하며 경선 후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면 쇠고랑을 차는 비운의 정치인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 조수진 기자, <국민일보>(2002.3.12)

- P 58,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그의 사퇴 후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또 한 번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그때 김수영의 시 <풀>이 위로가 되었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라는 시 구절이 김근태에게는 유일한 위로였고, '풀'은 김근태가 늘 믿은 국민이었다.

- P 60,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부질없는 망상인 줄 알면서도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 너무깊어져 정치 없는 세상에 살기를 바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탁류 속에서도 맑은 물줄기를 향해 외롭게 몸부림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깨끗한 정치'를 위해 양심선언을 한 김근태 의원이다. 그가 당내 최고위원 선거에서 자신이 쓴 불법 자금을 고백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 놀라움은 '저런 정치인도 다 있나!'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이 김근태인 것을 확인하고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박수는 자신의 과오를 국민 앞에 고백한 양심과 용기에 보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김 의원 한 사람을 넘어서서 모든 정치인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 앞에 그렇게 고백성사를 하고 거듭 태어나라는 요구이고 바람이었다. - 조정래, <중앙일보> 시론, -'김근태 양심선언 헛되게 말라'(2002.5.23)

- P 60,61,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후일 김근태는 "내가 정치자금 문제를 처음 고백할 때만 해도 왜 도움을 준 사람을 파느냐고들 했지만, 썩은 상태로 정권 교체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 자신부터 고백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P 64,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김근태가 큰 역할을 해야 후배들도 할 일이 많고, 또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데"라고 말하면서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의 "청렴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은 이제 힘 있는 지인들한테 후배들을 부탁하고 싶은데 정치인이 그러면 안 되니까 인재근 여사한테 정치를 하라는 의미 같았다.

- P 65,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우리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

 

김근태는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복지 정책을 펼치는 수장으로서 마주하는 사안 하나하나마다 무엇이 서민들을 생존의 공포로부터 구하는 길인지를 고민했다. 젊은 실업자들을 걱정하고, 직장, 결혼, 아이를 포기한 '3포 세대'에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비정규직, 그리고 한국에만 유독 많은 자영업자를 걱정했다.

- P 72,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잘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협력을 하고, 노동자와 사용자, 정부가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대보자. 불만스럽더라도 조금씩 양보해가면서 경제를 살리고 복지를 확보하자. 당신도 어렵지만 나도 어렵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패한 사람들의 부담을 나누어 갖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 P 75,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평화가 유지돼야 경제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분단국가이자, 정전협정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곧 밥'입니다. 평화가 깨지면 경제가 흔들립니다. 밥그릇이 깨지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던 2006년 10월 20일, 김근태는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개성공단을 방문해서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2011년 초여름 어느 날, 여의도에서 도봉지역사무실으로 가던 중에 갑자기 말했다."최상명, 2006년 10월에 개성 갔었잖아? 그때 30초 정도 연단에 올라가서 인사한 것 가지고 춤판이라고 많이들 비판했잖아? 그때 내가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국민들에게 오해를 사서 유감이다' 이렇게 얘기했잖아?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그때 이렇게 얘기했어야 했던 거 아니었나? 춤췄다. 어쩔래? 평화를 위해서라면 수백 번이라도 춤출 수 있다. 어때, 멋있지 않아?"

- P 83,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영리 의료법인을 허용하면 환자들에게 어떤 피해가 가게 될까. 민주당 전혜숙 의원은 "영리 병원은 고가 서비스를 환자에게 적극 권하고, 의학 지식이 없는 환자는 이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전반적인 의료비가 상승하는 것이고, 이는 미국의 사례에서 검증됐다" 고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발언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2007)의 한 장면은 이를우리에게 섬뜩한 현실로 알려준다. 기타 연주가 취미인 릭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다가 왼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가 응급실에 실려 간다. 의료보험이 없던 그에게 병원은 협상안을 내놓는다. 완전히 잘린 중지를 붙이는 데만 6만 불이지만 중지 접합 수술을 받으면 약지는 '할인가'를 적용해 1만 2천 불에 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고민하던 릭은 약지 하나만 1만 2천 불에 붙이기로 한다. 나머지 '비싼' 중지는 수거함에 담겨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진다.

- P 90,91,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국민에게 다시 무지개를 볼 수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정치권의 임무입니다.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는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추장스럽고 소모적인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 P 93,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김근태는 FTA 이후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했다. FTA를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서민 대책 없이 무리하게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 P 96,97,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관료로 입신하는 데 미국에서 공부한 학위가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권위를 외부에서 찾는 게 단기간에 더욱 극단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교조적으로 추구하게 만든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조건 글로벌 스탠다드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관료들의 행동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원인인 듯합니다.

- P 99, 이제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

 

1978년 결혼 이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 상담역으로 활동하던 김근태는 1983년 대중운동가로 나서게 된다. 민청련은 그가 우리나라 민주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결성한 대중운동 단체로, 김근태 식 '민주대연합론'의 시작이었다.

- P 103, 김근태의 시대정신 -

 

정치가 국민에게 어떤 제안을 할 경우에는 보통 선거공약의 형태로 국민에게 다가간다. 돌아보면 김근태는 선거에 나가지 않았던 때에도 참 많은 성명을 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비주류 정치인의 태생적 한계였을 수도 있다. 공당의 공약을 주도하려면 당의 주류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김근태에게 주류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에는 경제 관료들의 견제가 지속적으로 그를 비주류에 머물게 했다. 물론 타협했다면 김근태의 정치 경로는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믿는 국민들에게 직접 그의 생각을 알리려 했다. 김근태의 묘비에는 "나는 정직과 진실이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께 가고 싶다"라고 적혀 있다.

- P 105,106, 김근태의 시대 정신 -

 

김근태는 반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와 복지 안전망의 구축을 강조했다. 시장도 '따뜻한 시장경제' 여야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작은 미국(Small U.S.A)'이 아닌, '큰 스웨덴(Big Sweden)'의 모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사회적 대타협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 사회적 대타협이 경제 민주화의 방법인 셈이다.

- P 107, 김근태의 시대 정신 -

 

김근태는 민주주의 안에서 모든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가 그의 큰 희망 하나를 안타까운 미망으로 접게 한 것은 아닐까? 1995년 정치에 입문하면서 김근태는 스스로 네루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세상에는 네루의 길을 가는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을 벌일 때, 현실주의자 네루는 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다. '네루의 길'과 '희망'은 김근태 권력의지의 칼과 성경이었다. 하지만 민주대연합이라는 그의 희망은 또 다른 희망 하나를 묻어야 하는 길이었다. 대연합의 국면에서 권력을 내려놓으면서 네루의 길을 펼치려던 그의 희망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곁에서 희망을 배우고 설계하던 나는 반복되는 미망을 기록해야 했다.

- P 108, 김근태의 시대 정신 -

 

1987년 김근태는 옥중에서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수상한다. 이날 로버트 케네디 재단은 존 F.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의 조카이자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딸인 미국 인권운동가 캐리케네디를 한국에 보내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보는 가운데 시상식을 열었다. 김근태 대신 어린 아들 병준과 딸 병민이 함께하면서 참석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사진은 김근태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그의 명패를 기념 촬영한 것이다.

- P 109, 김근태의 시대 정신 -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로 가는 길은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미국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처럼 경선에 뛰어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해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정치 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전자가 쉽고 확률도 높다. 비호감일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 P 112, 2012년을 점령하라 -

 

하늘에 쓰는 편지, 나의 짝, 민주주의자 김근태, 잘 지내고 있는지요. 오랜만에 비가 옵니다. 가을이 한 겹 더 깊어지려나 봅니다. 가을비처럼 소리 없이 깊어지는 그리움으로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남영동 영화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극장이 온통 눈물바다였습니다. 남영동 영화 얘기만 나오면 당신 친구들과 후배들이 웁니다. 당신의 친구들이 말합니다. 보기 힘든 영화지만 보고 나면 힘이 나는 영화라고 합니다. 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영화의 주인공이 당신이기 때문이랍니다. 당신이 이겨냈듯이 우리도 이겨낼수 있다는 믿음, 우리도 이겨내야겠다는 용기가 생긴다고 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이근안 씨 얘기를 했습니다. 너무 솜씨 좋은 기술자라 그토록 고문을 하고도 김근태를 죽이지 않아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랬냐고 묻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의 고통이 가슴 아팠지만 이근안 씨라도 좋고 기적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작년의 위기를 넘기고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당신이 얼마나 따뜻하고 속 깊게 가족과 친구들을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문의 고통만큼 따뜻한 영혼이 되었던 것 같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짝 김근태 씨, 정말로 고생했습니다. 고문을 참느라 고생했고 그 트라우마를 사랑과 희망으로 녹이느라 고생했습니다. 남영동에서 받은 모욕과 고통을 분노로 돌려주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버린 당신, 당신은 강했고, 아름다웠습니다. 나의 짝, 민주주의자 김근태, 당신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남몰래 지옥처럼 아팠던 가을이 당신의 이름으로 치유의 가을이 되었습니다. '김근태 치유센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함세웅 신부님과 많은 분들의 마음을 모아 만든 고문치유센터입니다. 하늘의 당신, 당신의 하늘에서 구름 아래 인재근의 땅이 잘 보이십니까. 당신의 인재근, 잘할 겁니다. 그리움만큼 죽을힘을 다할 겁니다. 당신의 고통이 치유가 되고, 당신의 용기가 연대가되고, 당신의 미소가 승리가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마지막 호소가 역사가 되게 하겠습니다. 보고 싶은 당신, 사랑합니다. - 2012년 10월 대한민국 국회의원 인재근 올림 -

- P 114~118 , 하늘에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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