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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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유원지에서 회전 목마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가짜 말과 마차는 바깥에서 보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서 눈이 팽팽 돌 정도로 어지럽지만 정작 자신이 그 기구를 타고 있다면 어떠한 저항감도 느끼지 않는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회전 속에서 우리는 삶에 무디어져 있다. 멈추지 않고서 전진 아닌 유동적인 정지를 계속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러한 '흐름'에서 튕겨져 나온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정체되어 있던 일상이 무너질 때, 인간은 비로소 그 존재와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단지 '그 남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름이 필요없는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에도 녹아 있어서 타인을 독립적인 개개의 존재로써가 아니라 군집으로 인식한다. 그가 취미로 하고있던 곤충 채집도 그러한 연장선 상에 있다. 우리는 곤충을 볼 때, '개미 누구누구씨'라든지 '나비 누구누구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지 전체로써의 개미이며 나비이다. 그의 동료는 교사라고 명명된 인간이라는 종(種)의 아래에 위치한 하나의 무리일 따름이다.

또한 그는 자먀찐의 <우리들>에서 주인공이 타인을 의식할 때 신체적인 특징에 과장스레 주목하는 것처럼 단편적인 이미지로 상대방을 인지한다. 두툼한 입술로, 손으로, 다리로. 조각난 일부는 어떤 사람의 여러 특질 중의 하나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특성 중의 일부가 곧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인간은 곤충과 같이 대표적 명제이거나 잘려나간 손처럼 부분적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는가? 아니다. 타인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자아 역시 제대로 설 수 없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아베 코보는 소설의 첫 장에서 이 화두를 던져 놓았다. 결과가 원인을 우선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고찰이다.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므로 이유가 생기는가? 김춘수는 <꽃>에서,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어 비로소 의미있게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름이 불필요한 공간에 살고있던 그는 인간을 이차원적으로만 받아 들일 수 있었으며 이것은 '살아있고-살아있는'게 아니라 '살아있고-죽어있는' 상태와 같다. 사물에 다름없다.

그는 실존의 이유를 찾기 위해 모래의 땅으로 찾아온다. 그의 세계에서 그 장소는 비웃음 당하기 쉽상인 환상일 따름이다. 그러나 환상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다. 불모의 땅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래의 공간에서 그는 단순 명료한 자연을 체득한다.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인위적인 삶을 영위했기에 처음에는 그 무자비한 폭력에 좌절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하지만 차츰 모래의 속성, 나아가서는 자연의 섭리를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 합일하게 된다.

쏟아져 내리는 모래에 이성으로 숫자를 따져가며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살고있는 그녀처럼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내맡기는 본능을 감지한 것이다. 소금밭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던 그 남자는 죽었다. 거짓 세계에서 실종자로 판결된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 바로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얻게 되었다.

모래의 세계는 불모가 아니다. 모래의 여자는 생명을 잉태했다. 과거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애써 찾아 나서야 하는 허위와 기만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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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알렉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승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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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라는 공간은 오늘날,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굳이 '시티'라는 접미사가 강조하듯 붙지 않아도 ('멕시코 시티' 처럼) 그러한 형식을 지닌 공간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여서 과일 가게의 사과 만큼이나 일상적이다. 삶이 탄생하고 형성되며 소멸하는 곳.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며 개방되어 있는 동시에 폐쇄된, 아니 실체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빽빽하게 치솟은 빌딩과, 소음과 매연을 만드는 자동차의 행렬,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 속에서 생기라고는 없는 곳. 시티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그 속의 생활은, 사과가 주는 일상성과는 달리 쉽게 친화될 수 없는 낯설음이 존재한다. 흔히 '회색'이라고도 표현되는 이것의 이미지는, 형체는 존재하지만 그것에서 발생하는 소속감이 느껴지지 않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박쥐 같은 존재를 '회색 분자'라고 일컫는 것처럼)

시티에 사는 사람들은 헤매고 있다. 행정 상의 번지는 지표로 기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은 사회적 픽션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며 진정한 자아와의 괴리감은 개인을 이방인처럼 표류하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인지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시티의 인간들은 무관심하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검은 하이힐의 여자가 굽이 부러져 넘어져도 모두들 그저 스쳐 지나간 것처럼) 그렇기에 각각은 고독하다. 이 낯선 공간에서 샤츠와 고울드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가상의 타자를 설정한다. 그것은 허구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든가 등의 소망을 넘어서는 자아 발견에 대한 갈망이다.

고독한 그들의 관계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한다. 세상을 멋지게 볼 줄 아는 샤츠와 천재 소년이라는 사회적 픽션을 연기하고 있는 고울드는 CRB사의 <신비한 발론 맥의 모험>에서 마미 제인을 죽여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전화 설문 조사 과정에서 만난다. 전화라는 매체는 홀로 의의를 가지지 못하며 반면에 일방적이기도 하다. 쌍방이 존재해야 기능할 수 있지만 한 쪽이 거부하면 그 관계는 단절된다. 하지만 무관심한 타인들과는 달리, 디즈니를 숭배하는 샤츠는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유일하게 검은 하이힐을 신은 여자에 주목했던 친구들을 가진) 고울드 또한 그것을 맞잡는다.

이 소설은 샤츠와 고울드를 축으로 하여 샤츠가 말하는 서부극과 고울드가 화장실에서 생산하는 권투 선수 래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작가 바리코 특유의 서술 기법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샤츠의 입을 통해 서부극을 말로써 시도한다는 것이다.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몰리가 영화를 말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서부극이라는 입체 영상적인 매체를 단지 말로만 그려내고 있다. 또한 고울드는 라디오라는 형식을 통해 친구인 부메랑, 디젤과 합심하여 (라디오 중계 방송과는 다른) 권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세 스토리가 어우러져 두 곁가지는 본편 속에 녹아 있거나 심지어 능가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인간 관계를 산출해 내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허위적인 (교수들의 이성과 논리만 앞세운 이론이나, CRB사의 작위적인 스토리 전개 등의) 현실을 타파하고 인간의 실존과 자아 발견을 향해 열정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전통적으로 작가들에 의해 구사된 내적 독백이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단지 보여지고만 있을 뿐이며 그들의 생각이나 사상은 나무 줄기처럼 곁들여진 서부극과 권투 이야기를 통해서 유추하게끔 되어 있다. 그 외에도 '벙어리'인 부메랑의 (입을 통하지 않은) 대화라든지 탈토머 교수와의 가상 축구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인생이 그런 거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던 초반부의 고독한 고울드가 어떻게 변화했는 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허구이다. 단지 읽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현실에 발을 내딛고 타인과의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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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날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9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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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글을 읽고서 그것을 이해한다. 이 간단한 문장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인 단순함을 훨씬 넘어서는 실로 복잡 다단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사건을 접할 때에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과 감정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젼에서 동일한 뉴스를 목격했을 때에도, 각각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몸담은 공간에 의거하여 견해라는 것을 나타내기 마련인 것이다.

자, 당신이 텔레비젼에서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쏜살같이 질주하고 있는 개 한마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하자. 당신은 볼품없는 털을 가진 그 갈빛(혹은 잿빛이거나 다른 색깔일 수도 있다.)의 개가 바싹 마른 몸(혹은 터질 듯이 살찐 것일 수도 있다.)으로 무언가를 향해서 (혹은 목적없이) 쉴새없이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떠한 생각을 할까? 당신이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고있다는 사실로써도 이미 '체'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고있는 각도에 의해, 그 당시의 빛의 반사 정도에 의해, 아니면 기자가 전하는 말에 의해서, 일정하게 걸러진 사실에다가 더불어 당신의 입장이라는 또 하나의 체로써 걸러서 받아 들이게 된다.

이 짤막한 소설, 카롤린 라마르슈의 <개의 날>에서는 여섯명의 목격자가 그 사건을 전하고 있다. '버림 받음'이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서. 떠나버린 아내를 대신해서 끊임없이 가상의 가족을 상상해 내는 트럭 운전수, 떠나버린 여신자를 찾아 헤매는 노신부, 어릴 적 버림받은 기억으로 모든 사람들을 버릴 수 밖에 없는 미녀, 호모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절연 당하고 직업에도 외면당한 청년, 남편의 죽음으로 버림받은 과부, 어머니의 사랑을 잃고서 폭식증에 걸린 처녀. 그들은 자신들의 '버림 받은' 기억으로 맹렬히 질주하는 개를 바라본다. 그 개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이들처럼 그 개가 '버림 받아' 달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섯명의 목소리는 작가인 라마르슈를 통해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어 전개되고 있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한명의 작가가 여섯가지 에피소드를 총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리즘을 통해서 개개의 삶의 단면을 보여줄 뿐더러 일종의 결론에까지 이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타인에 의해 강제된, 그 타인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간에 상처 입어 고독하게 된 각각은 그 개를 통해 자신을 돌아다보고, 어떤 이는 진단하기만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등의 다양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프리즘을 들어 햇빛에 비춰보자.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빛깔은 확연하게 달리 나타날 것이다.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다르게 받아 들였던 등장 인물들처럼, 우리 또한 이 소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감싸안을 것이다. 인생을 자신만의 것으로 꾸려 나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타인의 삶의 단면에 관해서 경직되지 않은 자세를 가지는 것 또한 자신을 윤택하게 하는 방향이 아닐까? 또다른 '버림 받아 고독한' 존재가 생기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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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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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글을 쓴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을 읽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위의 두마디 문장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복잡한 시스템이며, 또한 그 이면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사고의 화학 작용이 끊임없이 유발되고 있다.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에 관해서는 열외로 해두고서, (일단 나는 작가가 낳은 글을 접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 서있으므로) 독자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읽는지에 대해 한번쯤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읽기에 있어서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저 글자를 해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작가가 의도한 대로 글을 읽고있는 지에 대해서도 확연하게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을 내릴 수도 없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자신만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 개인만의 고유한 느낌을 가지고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되는 것이다.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서 그 책은 엄청나게 감동적인 것이 되든지, 아니면 졸렬하기 그지없어 책장 한구석에 쳐박아 두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든지 할 뿐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루키는, 일종의 그리움이랄까.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고. 그가 품에 껴안고 있는 오래된 레코드와 성장이 멈춰버린 동화 속 성의 공주님같은 서른 일곱이라는 사내의 인생이 나와는 동떨어진 저 먼곳의 일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접했던 것은 마지막 대학의 논술시험을 치르고 돌아갔던 97년도의 겨울 기차 안에서였다. 한때 유명했었던 지나간 광고의 한 장면처럼 '상실의 시대'를 손에 들고서 열차에 올랐던 기억은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다. 그 무렵의, 대학생도 아니고 더이상 고등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나의 삶이라는 것은 스폰지가 물을 빨아먹듯 게걸스럽게 하루키의 책을 탐독케 했었고 그러한 상황은 난생 처음 접하는 타지 생활과 더불어 대학 새내기 시절에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서 존재했었다.

이 책,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한껏 열광하고 있던 그 무렵 한양출판사 판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열정적으로 읽어 나갔던 소설이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름에 붕 뜬 듯한 기분이 고스란히 남아, 그 이후 '하루키의 최고 소설은 이것이다!'라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조금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열린책들 판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번역이라든가 그런 문제는 치하한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나는 과거에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아주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부담이 되지않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부분에 이르기까지 많든 적든 누구나가 꿈을 간직하고서 그것을 이루기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꿈은 꿈이기에 그 존재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달성되고 나면 그것은 더이상 꿈이 아니다. 현실은 꿈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다. 바라보고 있을 때에만 그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 소설은 꿈을 꿈으로써 지켜나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현실의 유키코와 꿈속에서 존재하는 시마모토. 현실이 있기에 사람은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며 돌아갈 장소인 현실이 존재해야 비로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살아있고, 나 또한 현재를 탄탄히 밟고서 살아나가고 있다. 그는 변화하고 나 역시 플러스적인 방향이든 마이너스적인 방향이든 변화해가고 있다. 나만의 상상력을 가지고 다양한 촉매제를 통해 현실의 영역과 꿈의 영역을 쉴새없이 조화시키며 한단계 한단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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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상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혜원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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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무끄래한 새벽, 태양조차 늑장부리며 어영부영 발걸음하는 그 무렵. 야수처럼 포효하며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늦가을 바람을 애써 물리치고 빠알간 머플러를 단단히 감고서 버스 정류장에서 초조히 제자리 걸음할 찰나, 나는 그녀를 보았다.

어둑어둑한 밤,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최대한 크게 플레이시켜 흥얼거리며 지친 얼굴로 지하철 역을 빠져 나왔을 때 그녀는 역시나 그곳에 있었다.

검은 베일을 쓰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내비치며 길목에서 서성대는 그녀는, 바로 안나였다. 목적없이 바쁘게 그저 오가기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목마른 눈동자로 강렬하게 삶을 뒤쭟고 있던 안나.

이것은, 살아가고 싶은 그녀의 이야기이다. 삶을 너무도 원했기에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세상에 대한 조그맣지만 강렬한 항변의 몸부림이다.

'행복한 가정은 가정마다 모두 서로 비슷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은 가정 나름대로의 불행이 있는 법이다.'

이것은 가정의 이야기이다. 살아가는 관성으로 생활을 유지해 가는 오블론스키 일가에서 시작해서 카레닌이라든지 수많은 가정들이 나름대로의 행·불행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어떠한 한 가정의 일원인 동시에 또다른 가정의 구성원이다. 부모로써, 자식으로써, 그리고 배우자로써. 새로운 약품이 제조되는 것마냥 인간이라는 존재는 땅에서 그저 홀연히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안나는 부모의 역할도, 배우자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왜?

결국, 이 이야기는 삶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전체에 걸쳐 안나보다는 레빈이 더 자주 언급된다.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는 것도 레빈이고. 또 시작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비로소 주인공 안나가 등장하고 있다. 톨스토이 자신조차 이것을 한참 쓰고 있을 무렵, 안나와 키치를 대비시켜 <두 여인> 등의 제목을 붙이려고 고민 했었으며 실제로도 안나와 키치(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레빈)의 대조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안나일까?

'단지 살아가고 싶을 따름이에요.'

그녀는 그저 삶을 원했을 뿐이었지만, 결국 가정에서 소외된 채 세상 끝까지 내몰려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소설 초반부에서 똑같이 고독했던 안나와 레빈의 결말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가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레빈은 내적인 변화를 추구했고 대조적으로 안나는 외적인 변화에 치중했던 것이다. 의사소통 과정 없이 형성된 외적 세계는 결국 붕괴해 버렸고, 이러한 접점 없는 두 세계를 통해 작가 톨스토이는 가정과 삶에 대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빨려 들어갈 듯한 아름다운 정경 묘사와 수식이 엄청나게 많은 길다란 문장, 금방이라도 생생하게 튀어나올 것 같은 인물 설정은 빠뜨릴 수 없는 묘미이다.

어찌 되었건, 이 작품이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이라는 제목이었다면 그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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