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상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혜원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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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희무끄래한 새벽, 태양조차 늑장부리며 어영부영 발걸음하는 그 무렵. 야수처럼 포효하며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늦가을 바람을 애써 물리치고 빠알간 머플러를 단단히 감고서 버스 정류장에서 초조히 제자리 걸음할 찰나, 나는 그녀를 보았다.

어둑어둑한 밤,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최대한 크게 플레이시켜 흥얼거리며 지친 얼굴로 지하철 역을 빠져 나왔을 때 그녀는 역시나 그곳에 있었다.

검은 베일을 쓰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내비치며 길목에서 서성대는 그녀는, 바로 안나였다. 목적없이 바쁘게 그저 오가기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목마른 눈동자로 강렬하게 삶을 뒤쭟고 있던 안나.

이것은, 살아가고 싶은 그녀의 이야기이다. 삶을 너무도 원했기에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세상에 대한 조그맣지만 강렬한 항변의 몸부림이다.

'행복한 가정은 가정마다 모두 서로 비슷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은 가정 나름대로의 불행이 있는 법이다.'

이것은 가정의 이야기이다. 살아가는 관성으로 생활을 유지해 가는 오블론스키 일가에서 시작해서 카레닌이라든지 수많은 가정들이 나름대로의 행·불행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어떠한 한 가정의 일원인 동시에 또다른 가정의 구성원이다. 부모로써, 자식으로써, 그리고 배우자로써. 새로운 약품이 제조되는 것마냥 인간이라는 존재는 땅에서 그저 홀연히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안나는 부모의 역할도, 배우자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왜?

결국, 이 이야기는 삶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전체에 걸쳐 안나보다는 레빈이 더 자주 언급된다.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는 것도 레빈이고. 또 시작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비로소 주인공 안나가 등장하고 있다. 톨스토이 자신조차 이것을 한참 쓰고 있을 무렵, 안나와 키치를 대비시켜 <두 여인> 등의 제목을 붙이려고 고민 했었으며 실제로도 안나와 키치(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레빈)의 대조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안나일까?

'단지 살아가고 싶을 따름이에요.'

그녀는 그저 삶을 원했을 뿐이었지만, 결국 가정에서 소외된 채 세상 끝까지 내몰려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소설 초반부에서 똑같이 고독했던 안나와 레빈의 결말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가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레빈은 내적인 변화를 추구했고 대조적으로 안나는 외적인 변화에 치중했던 것이다. 의사소통 과정 없이 형성된 외적 세계는 결국 붕괴해 버렸고, 이러한 접점 없는 두 세계를 통해 작가 톨스토이는 가정과 삶에 대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빨려 들어갈 듯한 아름다운 정경 묘사와 수식이 엄청나게 많은 길다란 문장, 금방이라도 생생하게 튀어나올 것 같은 인물 설정은 빠뜨릴 수 없는 묘미이다.

어찌 되었건, 이 작품이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이라는 제목이었다면 그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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