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작가는 글을 쓴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을 읽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위의 두마디 문장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복잡한 시스템이며, 또한 그 이면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사고의 화학 작용이 끊임없이 유발되고 있다.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에 관해서는 열외로 해두고서, (일단 나는 작가가 낳은 글을 접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 서있으므로) 독자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읽는지에 대해 한번쯤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읽기에 있어서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저 글자를 해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작가가 의도한 대로 글을 읽고있는 지에 대해서도 확연하게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을 내릴 수도 없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자신만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 개인만의 고유한 느낌을 가지고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되는 것이다.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서 그 책은 엄청나게 감동적인 것이 되든지, 아니면 졸렬하기 그지없어 책장 한구석에 쳐박아 두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든지 할 뿐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루키는, 일종의 그리움이랄까.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고. 그가 품에 껴안고 있는 오래된 레코드와 성장이 멈춰버린 동화 속 성의 공주님같은 서른 일곱이라는 사내의 인생이 나와는 동떨어진 저 먼곳의 일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접했던 것은 마지막 대학의 논술시험을 치르고 돌아갔던 97년도의 겨울 기차 안에서였다. 한때 유명했었던 지나간 광고의 한 장면처럼 '상실의 시대'를 손에 들고서 열차에 올랐던 기억은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다. 그 무렵의, 대학생도 아니고 더이상 고등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나의 삶이라는 것은 스폰지가 물을 빨아먹듯 게걸스럽게 하루키의 책을 탐독케 했었고 그러한 상황은 난생 처음 접하는 타지 생활과 더불어 대학 새내기 시절에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서 존재했었다.

이 책,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한껏 열광하고 있던 그 무렵 한양출판사 판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열정적으로 읽어 나갔던 소설이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름에 붕 뜬 듯한 기분이 고스란히 남아, 그 이후 '하루키의 최고 소설은 이것이다!'라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조금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열린책들 판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번역이라든가 그런 문제는 치하한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나는 과거에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아주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부담이 되지않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부분에 이르기까지 많든 적든 누구나가 꿈을 간직하고서 그것을 이루기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꿈은 꿈이기에 그 존재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달성되고 나면 그것은 더이상 꿈이 아니다. 현실은 꿈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다. 바라보고 있을 때에만 그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 소설은 꿈을 꿈으로써 지켜나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현실의 유키코와 꿈속에서 존재하는 시마모토. 현실이 있기에 사람은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며 돌아갈 장소인 현실이 존재해야 비로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살아있고, 나 또한 현재를 탄탄히 밟고서 살아나가고 있다. 그는 변화하고 나 역시 플러스적인 방향이든 마이너스적인 방향이든 변화해가고 있다. 나만의 상상력을 가지고 다양한 촉매제를 통해 현실의 영역과 꿈의 영역을 쉴새없이 조화시키며 한단계 한단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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