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알렉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승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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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라는 공간은 오늘날,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굳이 '시티'라는 접미사가 강조하듯 붙지 않아도 ('멕시코 시티' 처럼) 그러한 형식을 지닌 공간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여서 과일 가게의 사과 만큼이나 일상적이다. 삶이 탄생하고 형성되며 소멸하는 곳.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며 개방되어 있는 동시에 폐쇄된, 아니 실체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빽빽하게 치솟은 빌딩과, 소음과 매연을 만드는 자동차의 행렬,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 속에서 생기라고는 없는 곳. 시티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그 속의 생활은, 사과가 주는 일상성과는 달리 쉽게 친화될 수 없는 낯설음이 존재한다. 흔히 '회색'이라고도 표현되는 이것의 이미지는, 형체는 존재하지만 그것에서 발생하는 소속감이 느껴지지 않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박쥐 같은 존재를 '회색 분자'라고 일컫는 것처럼)

시티에 사는 사람들은 헤매고 있다. 행정 상의 번지는 지표로 기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은 사회적 픽션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며 진정한 자아와의 괴리감은 개인을 이방인처럼 표류하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인지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시티의 인간들은 무관심하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검은 하이힐의 여자가 굽이 부러져 넘어져도 모두들 그저 스쳐 지나간 것처럼) 그렇기에 각각은 고독하다. 이 낯선 공간에서 샤츠와 고울드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가상의 타자를 설정한다. 그것은 허구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든가 등의 소망을 넘어서는 자아 발견에 대한 갈망이다.

고독한 그들의 관계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한다. 세상을 멋지게 볼 줄 아는 샤츠와 천재 소년이라는 사회적 픽션을 연기하고 있는 고울드는 CRB사의 <신비한 발론 맥의 모험>에서 마미 제인을 죽여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전화 설문 조사 과정에서 만난다. 전화라는 매체는 홀로 의의를 가지지 못하며 반면에 일방적이기도 하다. 쌍방이 존재해야 기능할 수 있지만 한 쪽이 거부하면 그 관계는 단절된다. 하지만 무관심한 타인들과는 달리, 디즈니를 숭배하는 샤츠는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유일하게 검은 하이힐을 신은 여자에 주목했던 친구들을 가진) 고울드 또한 그것을 맞잡는다.

이 소설은 샤츠와 고울드를 축으로 하여 샤츠가 말하는 서부극과 고울드가 화장실에서 생산하는 권투 선수 래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작가 바리코 특유의 서술 기법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샤츠의 입을 통해 서부극을 말로써 시도한다는 것이다.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몰리가 영화를 말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서부극이라는 입체 영상적인 매체를 단지 말로만 그려내고 있다. 또한 고울드는 라디오라는 형식을 통해 친구인 부메랑, 디젤과 합심하여 (라디오 중계 방송과는 다른) 권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세 스토리가 어우러져 두 곁가지는 본편 속에 녹아 있거나 심지어 능가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인간 관계를 산출해 내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허위적인 (교수들의 이성과 논리만 앞세운 이론이나, CRB사의 작위적인 스토리 전개 등의) 현실을 타파하고 인간의 실존과 자아 발견을 향해 열정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전통적으로 작가들에 의해 구사된 내적 독백이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단지 보여지고만 있을 뿐이며 그들의 생각이나 사상은 나무 줄기처럼 곁들여진 서부극과 권투 이야기를 통해서 유추하게끔 되어 있다. 그 외에도 '벙어리'인 부메랑의 (입을 통하지 않은) 대화라든지 탈토머 교수와의 가상 축구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인생이 그런 거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던 초반부의 고독한 고울드가 어떻게 변화했는 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허구이다. 단지 읽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현실에 발을 내딛고 타인과의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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