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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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행간을 훑어 내려가다 보면, 정말 있어야 할 자리에 바로 그 단어가 위치한 경우가 있다. 아무리 기묘하고 낯선 상황에서도, 심지어 바로 몇 초 전까지 전혀 상상도 못했던 단어가 불쑥 난입한다 할지라도, 그렇지만 이 문장의 이 장소에는 이 단어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고 느끼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방식은 헤어릴 수 없이 다양하겠지만, 특별히 적재적소에 꼭 들어맞는 단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있다. 물론 낯선 단어로 친숙하고 친밀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감탄할 만하다 하겠지만 요시다 슈이치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나 자신 또한 늘상 말하고 쓰는 일상어, 너무나 친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단어들이 문득 문득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비슷비슷한 그림들을 주욱 스쳐 지나가다가 우연히 멀리 떨어져서 그것을 보고 새삼 특별한 느낌을 받게되는 때처럼, <파크 라이프> 속의 단어와 독자와의 거리는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들고 앗하는 사이에 또 낯설게 도드라져 어리둥절하며 의미를 더듬고 그 생경함 혹은 위화감에 전율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 빈 공간이 있어 거기에 단어를 채워 넣어야 한다면 이것 밖에 없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끔 하는, 그같은 이중적인 쾌감이 <파크 라이프>를 손에서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기반이 아닐까.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남자가 하나의 '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철 안에서 얼떨결에 낯선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그 후 몇 번의 만남을 거듭하는 '나'가 있고, 회사 상사인 긴토 씨와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나'가 있으며, 별거 중인 부부를 대신해 원숭이를 돌보는 '나'도 있고,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는 분신 여행을 하는 '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나' 이외에도 무수한 '나'들이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인간 및 사물, 동물과 관계를 맺고 각각의 공간을 구축해 간다.

한 인간이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익숙하고 일상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공원을 배경으로 한 이 짤막한 글 속에 타자를 바라보는 '나' 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비친 '나'를 바라보는 또다른 '나'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거리, 관계에서 빚어지는 공간, 그것의 경계가 군더더기 없이 배치되고 어우러져 '나'를 '나'로써 인지하는 친숙하지만 동시에 생경한 감각을 체득케 한다.

초반부의 장기 이야기 또한 '나'에 대한 사고의 연장에 있지 않을까. 죽은 후에도 자신의 장기가 남아 다른 누군가의 몸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스타벅스에 들어오는 모든 여성들이 전부 자신으로 보이는 것, 그렇다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는 요소는 또 무엇일까. 분신 여행으로 타인의 경험을 공유하고, 자신이 태어난 병원이 찍혀있는 사진전을 찾아가고, 별거 중인 부부의 맨션에서 생활하는 등,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허물어진 타자와의 경계에서 '나'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걸까. 여기서 요시다 슈이치는 이러한 현실을 낯설게 하여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공원이라는 공공 장소를 무대로 설정하고, 상대가 없으면 기능이 불완전한 전화와 인터넷 등의 쌍방적인 매체를 도구로 사용하여 '나'를 인지한다, 그 점이 강렬한 원심력을 가지고 전개되는 <파크 라이프>의 즐거움인 것이다. 물론 요시다 슈이치는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드문드문 삽입된 남자의 기억과 주변을 향한 응시, 풍경 등을 한 걸음 뒤떨어져 보여줄 뿐이다. <파크 라이프>라는 어딘지 축제의 느낌이 물씬한 제목과 더불어 행간 사이에 묻어나는 여백은 흡입력이 상당하고 묘사 또한 생기가 있다. 소설 속의 남자와 읽고있는 '나'와의 관계에서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언뜻언뜻 비쳐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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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프랑스 현대문학선 22
조르주 페렉 지음 / 세계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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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곧 죽음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욕망과 인간을 이렇게 설파했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다. 즉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이자 타자에게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다. 타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욕망, 그래서 그것은 사회적인 욕망, 관계 속에서의 욕망이다. 숱한 대중 매체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욕망은 만들어지고 조종된다. 그러나 욕망은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성취되는 순간 새로운 욕망이 찾아든다.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없다.

조르주 페렉의 짤막한 소설 <사물들>은 바로 이 욕망의 대표적인 발현인 '소비'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되고 있다. 제롬과 실비라는 두 인물은 쉴새없이 타인을, 타인의 욕망을 흉내내며 살아간다.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인 마냥 우월적인 위치에 서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소설을 읽고있는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본인들 또한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파고 들어가면 그들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찌꺼기에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욕망은 껍데기만 남아 타인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관계가 제거된 욕망은 어떠한 동기도 유발하지 않는다.

욕망의 달성은 필연적으로 노동을 수반한다. 소비는 노동에 뒤따르는 성과물이다. 그러나 제롬과 실비는 노동하지 않으며 욕망의 달성이라는 그 결과만을 바라고 있다. 일확천금을 얻는다든가 백만장자가 된 자신들을 상상할 뿐, 아무 것도 하지않는다. 그렇기에 그러한 지위를 나타내주는 '사물들'에 집착하며 정작 자신들은 거기서 어떠한 느낌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그 가치를 맹신하는 것이다. 영국 제품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동경하면서 정작 근면 노동하는 영국적 삶을 비웃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건전하게 일하는 친구들을 야유의 눈길로 바라본다.

도시 속의 인간은 타인과 혹은 자기 안의 또다른 자신과 관계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러나 제롬과 실비는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파리의 거리에서도, 인간의 삶이 뒤엉켜 있는 스팍스의 거리에서도 어느 누구(심지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할 자아)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의사소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롬과 실비는 특징을 지닌, 혹여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뚜렷한 성격적인 형상화도 없을 뿐더러 그들 자신이 단순한 '사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제롬과 실비에게는 아이덴티티가 결핍, 붕괴되어 있다. 즉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 또한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비교를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이 바람직하게 그려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목적없는 소비는 소비가 아니다. 이것은 무차별적이고 충동적인 소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자신들이 믿지도 않는 '사물들'에 대한 가치가 존재할 리 없다. 그렇기에 '사물들'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은 허망하고 거짓되며 그것은 또한 죽음이다. 욕망을 가지는 것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가치판단적인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욕망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능력, 바꿔 말하면 자아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아이덴티티의 정립,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욕망에로의 정당한 노력이 바로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시제일 것이다. 제롬과 실비의 불가능한 욕망의 달성을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페렉은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아무런 교감도 가지지 못한 채 언급되기만 한 '사물들'의 나열을 통해 저자는 죽음에 이른 '사물들', 아무런 동기 유발도 자아내지 못하는 욕망에 대해 그것은 참된 욕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인용된 마르크스의 말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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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해 열림원 이삭줍기 5
보리스 필냐크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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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무슨 이유로, 기록을 남기는 것일까? 법정 기록, 판례법, 일기, 민요, 연대기 등의 다양한 기록들이 녹아들어 하나의 얼굴을 형성한 이 글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문이다. 위에 언급한 피상적인 물음 이외에도, 독자라는 위치에 선 내가 기본적으로 묻고 싶었던 것은 작가인 필냐크는 대체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며 어째서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냐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필냐크의 <벌거벗은 해>는 상당히 읽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에는 등장 인물과 플롯에 중점을 두기 마련이다.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그의 시선으로 사건을 경험하고 느끼며 책장을 덮었을 무렵에는 좋은 쪽이든 그렇지 않은 간에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쉽게 몰입되거나 자신을 투영시킬 수가 없다. 작가가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등장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어떠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레 낯선 인물이 난입하는 등 시간의 흐름이 일정치 않으며 장 마다의 표현 방식이 틀리다. 필냐크는 수동적인 독자를 거부하고, 따라서 독자는 글 속에 나타난 관점들을 스스로 재구성해야만 한다.

이것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 이후의, '죽음이 삶이나 출생보다 더 자연스러운' 시절인 1920년의 이야기이다. 제정 러시아가 참전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고 나서 2년 반, 1917년의 2월 혁명이 일어났고 300년 간 이어져 온 러시아 왕조는 붕괴되었다.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고 가치관이 혼란되는 등, 이전의 시간이 가속화한 그 즈음에 살던 인간들은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제정 시대에 귀족이었던 사람, 무정부주의자, 집시, 분리파 교도, 볼셰비끼, 그리고 이름없는 민중들이 수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필냐크는 혁명에 대한 여러 관점만을 보여줄 뿐 성급히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하나의 관점, 즉 볼셰비끼가 주가 되는 그간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혁명이라는 사건을, 민중 그 자체를 통해서 바라본다. 왕조의 타파를 주장하며 봉기한 볼셰비끼와 민중의 유리. 작가는, 인간의 본능과 에너지를 역사의 구심점으로 보았다. 민중은 혁명과 무관하게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태고적부터 러시아 땅에 살았으며 계속 그 터전 위에서 생활해 갈 것이다.
러시아는 독특한 나라다. 본격적으로 문학 작품이 씌어진 것은 17세기 말부터이다.

똘스또이나 도스또옙스끼, 고골 등이 같은 시대에 등장하고 러시아 정교와 민간 신앙이 혼합되어 있는 러시아인의 정신 세계는 냉전동안 닫혀 있었던 만큼, 매력적이다. <벌거벗은 해>는 그러한 다양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빛에 비친 얼굴은 음영이 진다. 그것은 단순히 매끄럽지 않다. 결국 필냐크는, 혁명이라는 얼굴에 비친 주름살 하나하나를 뒤적여 보고 얼굴 전체를 조망하고 러시아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 것이 아닐까.한 마디 덧붙이자면, 번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책에서는 러시아의 민요가 자주 등장하며 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가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번역이라는 작업의 체에 걸려 이 음악적인 소설이 퇴색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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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브루더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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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았다. 공기는 후끈했다. 방사선 모양의 도시는 수많은 다리를 껴안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를 풍기며 건물들은 이야기를 건네왔다. 그것이 파리였다. 땀이 쉴새없이 흐르던 작년 여름, 파리에서 보았던 건 바로 교차로였다.

소설 속의 '나'는 '우연히' 도라 브루더라 불렸던 어떤 소녀의 실종 기사를 읽고 그녀를 뒤쫓게 된다.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 살았을, 유태인이었던 열 다섯살 난 여자 아이.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단지 내가 알고있는 거리에 오십 여년 전에 존재했던 그녀의 흔적을 쫓으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어째서 그녀인가? 아니, 무엇보다 그는 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고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문학이 그렇듯, 소설의 화자는 작가의 분신이다. 모디아노의 경우, 글 속에 나타난 자전적 성향은 더욱 짙어 여기저기서 드문드문 빼꼼히 그가 얼굴을 내민다. 도라 브루더에서 화자는 작가인 '나'이다. 그러나, 모디아노와 동일 인물은 아니다. '나'는 도라와 함께 사라져 버린 그 시대의 이름없는 어떤 사람이다.

출발은 한 소녀였다. '나'는 도라가 걸었을 거리를 걷고 살았을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생각을 가늠해 보며 나름의 가설을 만들어 간다. 사진 몇 장과 문서 상에 기록된 몇 줄 만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짤막한 신문 기사 속의 소녀는 점점더 불어나는 정보와 더불어 아버지로, 다른 소녀들로, 여인들로, 작가들로 분열해 간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자신의 유년 시절과 조우하며 그 기억은 얽히고 설켜든다. 하지만, 사실 찾고 싶었던 건 정말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모디아노의 주인공들은 항상 누군가를 찾고있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현재는 부재한다. 그들은 기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소설 역시 제일 앞 장에 파리 지도가 나와있다. 무수한 길로 이루어진 공간, 그들은 길을 잃었다. 유태인인 도라, 그리고 '나'. 나치 하의 파리, 숫자로 헤아려질 뿐인 유태인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연행되어 아우슈비츠로 사라졌다. 지금 '나'의 아버지는 없다. 과거, 그 존재의 근원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모디아노의 작품이 꾸준히 추구하는 테마는 바로 그 부재를 채워가는 과정이다. 불가능한 작업, 막연한 가설 속에서 그럴싸한 도라의 행적이 탄생한다. 그 속에서 '나'는 자신의 과거 또한 얼마간 찾게되며 드디어, 방황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밟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는 것,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실종된 개개인을 찾아가는 게 그의 문학적 목표라는 것은 그다지 무리한 생각은 아닐 터이다. 그것이 진정한 작가의 임무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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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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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있었다.'

르 귄의 헤인 시리즈, 그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두 작품의 하나인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르상 'SF(Sicient Fiction)'로 분류되는 이 글은, 단지 외계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뿐이지 여타의 공상과학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흉칙한 외계 생물체나 전혀 생소한 과학적 지식이 쉴새없이 등장하는 공간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인간이 꿈꾸며 바랐던 장소, 이상향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인간 존재에 대한 끝없는 탐구의 연장. 바로 인간과 그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쌍둥이 행성인 우라스와 아나레스. 이 소설은 우라스에서의 현재와 아나레스에서의 과거가 한 장씩 교대로 전개되어 우라스의 장에서 끝을 맺는다. 글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평등주의로 점철된 아나레스'에서 '비로소 동등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불평등의 왕국인 우라스'로 오게 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과연 '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을 것인가?

첫 줄부터 르 귄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쉐백'이 전면에 등장하기까지는 이미 몇 장이 지나간 뒤이다. 갑작스런 사건의 전개 속에서 이름 모를 그는 독자와 더불어 당황하며 '백신'을 투여 받는다. '이해할 수 없어!'라고 줄곧 외치며. 아나레스 출신인 그는 우라스의 어떠한 질병에도 '저항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로 항체를 투여받게 되는데, 이 '백신'이 바로 소설의 초반부를 아우르는 화두이다. 쌍둥이 행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부정하고 있던 시대에, 최초로 교류의 발걸음을 내딛은 그는 우라스의 개념으로 조합된 '백신'으로 무장된 채 포장되어 입성한다. 과거 아나레스에서의 고통스러웠던 삶, 감기에 걸려 주사와 알약 처방을 받았을 때처럼 참고 받아 들인다. 무균의 공간에서 보여지는 것만을 보며 그는 또다른 높은 벽 속으로 격리되고 만다.

이 책의 제목인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는 다른 의미로 '추방된 자들'이라고도 해석 가능하다. 쉐백은 아나레스에서도, 우라스에서도 추방된 이방인이다. 순수성과 독단성을 지니며 상아탑 속에 스스로 격리된 학자인 동시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 삼자로써 대립하고 있는 두 사회를 화해시키는 책임을 떠맡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시간을 다루는 물리학자인 이유는 어째서일까?

과거가 없는 존재란 없다. 현재는 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현재가 있어야 비로소 미래가 생겨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연구하는 그는 넓은 의미로 역사학자이며, 그의 이론이 완성됨으로써 결국 전 우주가 상호 교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이 저주로 치부되는 아나레스의 사회와 순수한 지식을 나누기 위해 옮겨온 우라스 사회에 대한 묘사는 언어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소유격을 쓰지않는 아나레스인과 비교급을 많이 쓰는 우라스인.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어긋나 있고 쌍방은 이해할 수 없다. 글의 도입부에서 고립된 채 우왕좌왕 하던 그는 여러 사람과의 거듭된 대화를 통해 자신이 직접 화합의 기반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교류가 있어야만 역사는 전진할 수 있다. 인간의 따스한 무게와 체온, 대화를 촉구하는 르 귄의 관점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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