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프랑스 현대문학선 22
조르주 페렉 지음 / 세계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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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곧 죽음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욕망과 인간을 이렇게 설파했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다. 즉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이자 타자에게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다. 타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욕망, 그래서 그것은 사회적인 욕망, 관계 속에서의 욕망이다. 숱한 대중 매체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욕망은 만들어지고 조종된다. 그러나 욕망은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성취되는 순간 새로운 욕망이 찾아든다.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없다.

조르주 페렉의 짤막한 소설 <사물들>은 바로 이 욕망의 대표적인 발현인 '소비'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되고 있다. 제롬과 실비라는 두 인물은 쉴새없이 타인을, 타인의 욕망을 흉내내며 살아간다.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인 마냥 우월적인 위치에 서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소설을 읽고있는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본인들 또한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파고 들어가면 그들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찌꺼기에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욕망은 껍데기만 남아 타인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관계가 제거된 욕망은 어떠한 동기도 유발하지 않는다.

욕망의 달성은 필연적으로 노동을 수반한다. 소비는 노동에 뒤따르는 성과물이다. 그러나 제롬과 실비는 노동하지 않으며 욕망의 달성이라는 그 결과만을 바라고 있다. 일확천금을 얻는다든가 백만장자가 된 자신들을 상상할 뿐, 아무 것도 하지않는다. 그렇기에 그러한 지위를 나타내주는 '사물들'에 집착하며 정작 자신들은 거기서 어떠한 느낌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그 가치를 맹신하는 것이다. 영국 제품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동경하면서 정작 근면 노동하는 영국적 삶을 비웃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건전하게 일하는 친구들을 야유의 눈길로 바라본다.

도시 속의 인간은 타인과 혹은 자기 안의 또다른 자신과 관계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러나 제롬과 실비는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파리의 거리에서도, 인간의 삶이 뒤엉켜 있는 스팍스의 거리에서도 어느 누구(심지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할 자아)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의사소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롬과 실비는 특징을 지닌, 혹여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뚜렷한 성격적인 형상화도 없을 뿐더러 그들 자신이 단순한 '사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제롬과 실비에게는 아이덴티티가 결핍, 붕괴되어 있다. 즉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 또한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비교를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이 바람직하게 그려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목적없는 소비는 소비가 아니다. 이것은 무차별적이고 충동적인 소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자신들이 믿지도 않는 '사물들'에 대한 가치가 존재할 리 없다. 그렇기에 '사물들'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은 허망하고 거짓되며 그것은 또한 죽음이다. 욕망을 가지는 것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가치판단적인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욕망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능력, 바꿔 말하면 자아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아이덴티티의 정립,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욕망에로의 정당한 노력이 바로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시제일 것이다. 제롬과 실비의 불가능한 욕망의 달성을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페렉은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아무런 교감도 가지지 못한 채 언급되기만 한 '사물들'의 나열을 통해 저자는 죽음에 이른 '사물들', 아무런 동기 유발도 자아내지 못하는 욕망에 대해 그것은 참된 욕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인용된 마르크스의 말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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