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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ㅣ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평점 :
'벽이 있었다.'
르 귄의 헤인 시리즈, 그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두 작품의 하나인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르상 'SF(Sicient Fiction)'로 분류되는 이 글은, 단지 외계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뿐이지 여타의 공상과학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흉칙한 외계 생물체나 전혀 생소한 과학적 지식이 쉴새없이 등장하는 공간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인간이 꿈꾸며 바랐던 장소, 이상향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인간 존재에 대한 끝없는 탐구의 연장. 바로 인간과 그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쌍둥이 행성인 우라스와 아나레스. 이 소설은 우라스에서의 현재와 아나레스에서의 과거가 한 장씩 교대로 전개되어 우라스의 장에서 끝을 맺는다. 글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평등주의로 점철된 아나레스'에서 '비로소 동등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불평등의 왕국인 우라스'로 오게 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과연 '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을 것인가?
첫 줄부터 르 귄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쉐백'이 전면에 등장하기까지는 이미 몇 장이 지나간 뒤이다. 갑작스런 사건의 전개 속에서 이름 모를 그는 독자와 더불어 당황하며 '백신'을 투여 받는다. '이해할 수 없어!'라고 줄곧 외치며. 아나레스 출신인 그는 우라스의 어떠한 질병에도 '저항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로 항체를 투여받게 되는데, 이 '백신'이 바로 소설의 초반부를 아우르는 화두이다. 쌍둥이 행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부정하고 있던 시대에, 최초로 교류의 발걸음을 내딛은 그는 우라스의 개념으로 조합된 '백신'으로 무장된 채 포장되어 입성한다. 과거 아나레스에서의 고통스러웠던 삶, 감기에 걸려 주사와 알약 처방을 받았을 때처럼 참고 받아 들인다. 무균의 공간에서 보여지는 것만을 보며 그는 또다른 높은 벽 속으로 격리되고 만다.
이 책의 제목인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는 다른 의미로 '추방된 자들'이라고도 해석 가능하다. 쉐백은 아나레스에서도, 우라스에서도 추방된 이방인이다. 순수성과 독단성을 지니며 상아탑 속에 스스로 격리된 학자인 동시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 삼자로써 대립하고 있는 두 사회를 화해시키는 책임을 떠맡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시간을 다루는 물리학자인 이유는 어째서일까?
과거가 없는 존재란 없다. 현재는 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현재가 있어야 비로소 미래가 생겨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연구하는 그는 넓은 의미로 역사학자이며, 그의 이론이 완성됨으로써 결국 전 우주가 상호 교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이 저주로 치부되는 아나레스의 사회와 순수한 지식을 나누기 위해 옮겨온 우라스 사회에 대한 묘사는 언어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소유격을 쓰지않는 아나레스인과 비교급을 많이 쓰는 우라스인.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어긋나 있고 쌍방은 이해할 수 없다. 글의 도입부에서 고립된 채 우왕좌왕 하던 그는 여러 사람과의 거듭된 대화를 통해 자신이 직접 화합의 기반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교류가 있어야만 역사는 전진할 수 있다. 인간의 따스한 무게와 체온, 대화를 촉구하는 르 귄의 관점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