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언어
김겨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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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권의 단독 저서를 펴낸 작가이자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 운영자 김겨울의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몇 년간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유려한 산문과 책을 위해 새로 쓴 글을 담은 것으로, 그동안 피아노, 책, 유튜브 등이 주제였던 것과 달리 오로지 자신이 주인공인 책이다. 이 책은 여러 해 동안 쓰인 글이 모인 만큼 한 사람의 사색과 애호가 어떻게 글이 되고, 말이 되고, 콘텐츠가 되고,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끝내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겨울의 나이테다.

작가는 책 서두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오로지 김겨울로 쓰는 첫 책”이라고. 작가는 각지고 아픈 언어 사이에서 시를 찾던 학창 시절, 진은영의 시 ⌜대학 시절⌟을 닳도록 읽으며 지긋지긋한 아르바이트를 버티던 스물의 어느 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하던 10여 년”을 보내며 “읽고 쓰는 것밖에” 자신을 구할 도리가 없어 필사적으로 책과 글에 매달린 겨울의 날들을 꺼내어놓는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나는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쓴다. 더 이상 세상을 생각하며 울지 않지만 세상의 무한함에 여전히 매료된다. 세상을 보는 안경들은 내내 흥미롭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땅을 더듬어가며 짐작해본다. 나의 쓰임이 이곳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어림해보면 삶에 저울이 있다면, 저울이 이있어서 불안이며 열정이며 경력 같은 것을 놓고 셈이라는 것을 할 할수 있다면, 내 삶의 저울은 큰 바다를 향해 힘껏 기울었다. 아무도 쓸모를 묻지 않으나 인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찬 바다로. 이곳에 잠겨 질식하더라도, 나보다 큰 이곳에서 나는 기꺼이 웅크린다. 몹시 행복하다. p38

바라건대 진심으로 경청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판단을 잠시 멈추는 사람들의 세계, 상대방의 삶에 자신의 상을 욱여넣으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 복잡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세계. 세 줄 요약만 듣고 홀연히 사라지지 않는 이들의 장황한 말을 듣고 싶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물화되지 않는 소중한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므로 우리는 고전 다이제스트와 ‘결말 포함 줄거리’와 ‘후렴구 모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다못해 친구의 말조차 세 시간 이상 듣는 일이 적은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 자신을 톱니바퀴로만 두지 않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예술 경험일 것이다. p51~52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작게 틀어둔 채 눈을 감고 내일 아침 요거트에 뭘 넣어 먹을지 생각하다가, 문득 터무니없는 행복을 느꼈다. 울며 자해를 하거나, 자다가 환청을 듣고 깨거나, 다시 잠들지 못해 새벽을 뒤척이거나,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내일 아침의 요거트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영원처럼 반복되던 긴 시간을 버텨서 이런 날이 오기로 했다는 것이. 이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모르고도 울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이 왔다는 사실을 오늘의 나는 알고 있다. p91

모두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어떤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나의 여러 특질들은 나를 바닥까지 끌고 갈 만한 것들이었지만 그만큼 다시 끌어올릴 힘을 지닌 것들이기도 했다. 이슬아와 이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이것이 '무인의 성정'이라는 점에 합의했다. 나는 뒷산을 뛰어다니고 창을 멀리 던지는 무인처럼 버텼다. 복수를 다짐하는 무인처럼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밥을 챙겨 먹고 커피를 몸에 부어서 운 좋게 터널을 빠져나왔다. 어쨋든 살아내는 모든 사람은 결국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p92

졸업 후에 나는 알려져 있듯 책을 소개하는 유튜버가 됐다. 유튜브에서 나는 문학 책도 과학 책도 인문학 책도 소개한다. 유튜브에서는 책을 소개하고 출판인들에게는 유튜브 강연을 한다. 내가 책과 유튜브라는 각각의 경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혼란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책의 저자 소개에 이렇게 썼다. “유튜브와 책 사이, 글과 음악 사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서서 세계의 넓음을 기뻐하는 사람.” 이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것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영역이 실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 모든 게 인간이라는 것이 아주 기쁘다. p140

나는 내가 신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우리가 변화해가는 모습 역시 그렇게 남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고기를 줄이고 일회용품을 줄일지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성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각자의 일을 응원하고, 나이 마흔의 삶을 그려본다. 그 즈음에는 꼭 근처에 살자고 말한다. 이렇게 곁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우리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저 이렇게 죽 사는 것이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든든한 친구와 10년 뒤, 또 10년 뒤를 그리며 바지런히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삶은 아름답게 마감되겠구나, 하는 그런 예감이다. p217

바스라지는 낙엽과 함께 짧기만했던 가을이 지나가고

갑자기 겨울이 찾아오던 날

난 왠지 슬프고 불안해졌다.

'겨울의 언어'

어느해 겨울에 읽었던 '책의 말들'이 넘 좋았던 기억에

겨울과 함께 찾아온 그녀의 신작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고

별다방 구석자리에 앉아 늘 마시던 아아 대신

따뜻한 커피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밀려있는 책들을 뒤로하고 또 구매버튼을 누르며 일말의 망서림이 있었지만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바로 구입하길 잘했다는 마음으로 바뀌었으니

이 따끈한 신간이 주는 위로와 즐거움은

그럼에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피아노'에서도 익히 느꼈던 음악에 대한 깊이

거기에 더해,

철학과

유튜브와 책 사이,

글과 음악 사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서서 세계의 넓음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저자의 문장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어 더 좋았던 책이다.

창밖에 비는 내리고

오랜만에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으며

조금은 힘들었던 시간을 뒤로 하고

딸아이가 먹고 싶다는 김밥을 싸고

오븐에 군고구마를 굽고 있다.

엄마라는 이유만으로도 다시 힘을 내어야할 시간...

그만 투덜대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겠다.

혼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ㅠ.ㅠ

통제밖의 세계.

의미가 없는 삶.

그렇기에 겸손하게 노력하는 마음.

그것은 어느 순간 우리를 해방시킨다.

내가 자기혐오에 빠질 때마다,

나의 못남을 탓할 때마다,

나의 삶에 구멍이 나고 균열이 생긴다고 느낄때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가 나의 못남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그만 투덜대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 한다.

혼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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