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 주체를 지향하는 서구의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의 독립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러나 한국식 개인주의는 끊임없는 노출을 매개로 타인의 시선으로 평가받고, 증명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타자 의존적 존재입니다. - P331
인정받지 못해 붕괴하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 한국인이 필사적으로 소환하는 무기가 있습니다. ‘피해자 서사‘입니다. 내면이 공허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대신 외부의 적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세상이 잘못되어서 억울하게 당한 것이다!‘라고 믿어버리는 겁니다. 피해자가 되는 순간,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집니다. 피해자는 약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옳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정체성victimhood identity‘이란 ‘피해자는 언제나 옳다!‘라는 서사를 동원합니다. 성취를 통해 얻지 못한 인정을, ‘억울함‘을 통해 얻으려는 슬픈 보상 심리, 이것이 바로 속도전에 지친 한국인이 자신의 공허를 메우는 방식입니다. - P332
억울함이 도덕적 확신과 결합하면, 사건의 복잡한 맥락은 아주 쉽게 이분법 서사로 단순화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놈‘ 의 책임 분배는 과잉 명료화되고, 구조적 문제와 상호작용의 회색지대는 시야 밖으로 밀려납니다. 모든 경계는 본질적으로 회색이지만, 피해자 서사로 인해 아주 굵고 간단한 선이 그 경계에 그어집니다. 피해자 정체성이 반복되면, 정당한 문제 제기조차 경쟁적 피해 서사 속에서 소모됩니다. ‘누가 더 큰 피해자인가‘를. 경쟁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바로 그 구체적 사례입니다. 각종 SNS가 난무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증폭된 억울함은 공감의 속도를 높이기도 하지만, 전후 맥락을 파악하며 사실을 검증하고 숙고하는 시간을 압축해버립니다. 억울함의 에너지는 변화의 촉진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적 양극화와 도덕적 과열을 심화시키는 역설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한국사회에 곧 닥쳐올 미래입니다. - P337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잘못된 믿음(틀린추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 reality‘ 에서 ‘해석된 세계 representation ‘로의 전환이 이뤄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눈앞에 펼쳐진 물리적 사실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던 ‘실재론realism‘을 부수고 나오는 사건입니다. 아이는 내 머릿속의 정보와 타인의 머릿속 정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타인의 행동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그가 믿고 있는 ‘주관적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약 4세부터 그런 능력이 생긴다는 겁니다. 위머와 페르너의 실험은 인간이 타인을 ‘움직이는 사물‘이 아닌 ‘마음을 가진 주체‘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탄생의 순간을 포착해낸 것입니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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