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글라이더 능력과 비행기 능력이 있다. 수동적으로 지식을 얻는 것이 전자, 스스로 사물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이 후자다. 이 두 가지가 한 명의 인간에게서 공존한다. 글라이더 능력이 전혀 없으면 기본적인 지식도 습득할 수 없다. 또 아무것도 모르면서 혼자 힘으로 날아보려고 하면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 따라서 두 가지 능력을 적절히 키워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는 글라이더 능력이 압도적이고, 비행기 능력은 전혀 없는 ‘우수한 인간이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도 비상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교는 글라이더형 인간을 만들기에 적합할 뿐, 비행기형 인간을 만드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학교 교육이 정비되면서 점점 더 글라이더형 인간을 늘리는 결과를 낳았고 서로가 비슷한 글라이더형 인간이 되자 글라이더의 결점을 잊어버렸다. 자신이 날고 있다고 착각한다. - P19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는 이렇게 발효된 주제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다. "무르익은 테마는 제 발로 찾아온다." 제 발로 찾아오니까 우리는 쉽사리 주제를 얻을 수 있다. 그래도 계획이라는 게 있으니 언제쯤 찾아오는지 미리 어림짐작이라도 하고 싶을 테다. 먼저 재료와 효소의 힌트를 혼합한 날짜를 메모로 적어 둔다. 그리고 주제가 떠오르기 시작한 날짜를 적는다. 두 날짜의 차이가 재우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정도 재워야 발효가 진행되는지 알 수 있다. 논문을 쓸 때 그 스케줄에 맞춰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면 매우 편리하지만 처음부터 기대하기는 어렵다. 역시 신의 가호를 비는 수밖에 없다. - P42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잠들어 있던 주제는 눈을 뜨면 엄청난 활동을 한다. 무슨 일이든 무턱대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게 있다. 자연 속에서, 의식을 초월한 곳에서 쉬게 해줘야 한다. 노력하면 어떤 일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럴 때는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다. 행운은 자면서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때로는 하룻밤 사이에 뚝딱 만들어지기도 하고 수십 년 동안잠들어 있다가 비로소 모습을 갖추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이런 무의식의 시간을 활용하여 생각을 만들어내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 P48
앞서 말한 윌리엄 엠프슨이 그러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에도 예로부터 수많은 해석이 쏟아졌다. 그는 그중 어느 것이 옳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괄한 세계가 이 대사의의미라고 했다. 생각과 착상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제에 대해 A에서 D까지의 설이 있다. 자신이 새롭게 X설을 얻었다고 해서 이것만을 귀하게 여기고 다른 것은 모두 무시해 버리면 만용으로 타락하기쉽다. X에 가장 가까운 B만을 긍정하려는 것도 여전히 아전인수격의 원한을 살 수 있다. A에서 D는 물론, X까지를 모두 인정하고 이를 조화롭게 절충해야 한다. 이렇게 써야 진짜 칵테일 논문이 완성된다. 훌륭한 학술 논문은 사람을 취하게 하면서도 독단에 빠지지 않는 견실함을 가지고 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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