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 책의 의의를 간략하게 적어보았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산책하는 일을 정말로 좋아하니까, 나는 이 취미를 왜그리 좋아하는지와 ‘산책하는 마음‘의 진면목을 내 나름으로 한번쯤 기록해두고 싶었다는 게 훨씬 더 솔직하고 정확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쓰는 이는 보통 자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흠뻑 빠져 있는 소재에 골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마련이다. 이 - P12
책은 그런 책 중에서도 가장 그와 같은 성격에 투철하리라. 나는 이 한 권의 책에서 산책에 관한 내 감정과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일에 충실할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독자 여러분이 책을 잠시 덮을 때마다 ‘아, 그래. 역시 잠깐 집 앞을 한바퀴 걷다 와야겠군.‘이라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만 같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산책 타임‘을 즐기고 계신 독자들이라면, 우리가 함께 또 제각기 경험하고 있는 산책의 묘미를 새삼스레 확인하면서 잠시나마 따뜻한 미소를 지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또 홀로‘ 무언가를 즐긴다는 건 언제나 멋지고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을 테니. - P13
이 무상無常한 그물망 사이를 뚜벅뚜벅 홀로 걸어가는 일은,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내가 내린 닻이, 알고 보니 내 덫‘이었다는 것을 무심하게 깨닫는 일과 같을 것이다. 나의 출발지와목적지들은 알고 보면 모두 나의 ‘닻‘이자 나의 ‘덫‘이었다. 피할 수 없는 덫, 인간의 덫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시 서성거 - P22
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린 모두 한평생을 꿈결처럼 서성거리다떠난다는 것만이 이 허무한 삶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걷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P23
즉, 산책은 ‘영원한 떠남‘과 ‘떠남의 반복‘이며, ‘영원한 되돌아옴‘과 ‘되돌아옴의 반복이다. 산책은 저 바깥의 영토에서내 영혼을 환기하는 원심력을 실천하는 동시에, 우리를 편안함과 익숙함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구심력의 에너지를 신뢰하는일이다. 인간은 원심력만으로도 살 수 없고 구심력만으로도 살수 없다. 앞장에서 이야기한 ‘걷는 이의 영원한 슬픔이란 관점에선 우리 모두 한평생을 배회하는 방랑자에 가깝겠지만, 우리에겐 그 고된 방랑길에서 잠시 멈춰선 채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자 약속한 소중한 존재들이 있다. 그 존재가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내게 그런존재가 있다는 것을 뭉클하게 생각하며, 그와의 관계를 쉽게 포기하거나 놓아버리지 않고 그 곁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일‘. 슬픔의 운명을 역행하면서 그 존재와 함께 오래도록 쌓아가는 시간의 힘을 믿는 일. - P31
네가 겪고 있는 이 시간은 무척 값진 시간이야. 인생이 우리가 딛고 있던 바닥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앗아간 기분이 들 때, 우리는자동적으로 인생의 근원적인 공백과 마주하게 되지. 평소에 우리의 의식은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으면 하는소원과 기대로 막혀 있거든, 너는 지금 이런 것들을 버릴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야.
니콜라 슈테른, 혼자 쉬고 싶다」(박지희 옮김. 책세상) 중에서
이런 면에서 독일의 명상가 니콜라 슈테른이 위와 같이 묘사했던 삶의 근원적인 공백을 나는 ‘산책을 하는 시간‘으로 이해하곤 했다. - P75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용경식 옮김. 까치) 중에서 - P107
산책하는 마음의 핵심이란 그것을 ‘진중한 미덕‘의 알레고리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회적 압력을 단호히거부하는 데 있다는 것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과 잣대를 완강하게 거부하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깃털보다더 투명하고 가볍게 만들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정말로 가볍게 산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겹고 서글픈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 P116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내가 그것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것은 산책하는 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미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 P134
세계 안으로 정답게 스며들기 때문에 존재한다. 나는 닫힌 존재가 아니라 열린 존재다. 사실 우리는 모두 열린 존재이고,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자연의 자식들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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