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알아듣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듣는 것이다. 특정 언어의 구사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 말은 사람을 통해 나오고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말은 그 사람이다. 지금한 그 말은 지금 그 사람이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때때로 생존의 문제가 여기에 걸쳐 있다. - P99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서, 누구인지 모른 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인간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00

식민 지배는 말을 옮긴다. 말을 옮겨 심는 이식의 과정이 식민주의의 실천에 포함된다. 정복자의 언어가 식민지에 옮겨온다. 식민지의 언어는 정복자의 언어로 대체된다. 땅을 정복한 자는 그 땅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복자의 정신을 이식 한다. 언어는 정신을 실어나르는 수레와 같다. 땅만 차지할 뿐 자기 말을 이식하지 못한 자의 지배는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땅의 지배가 끝남과 동시에 그 지배도 끝난다. 그러나 언어를 옮겨 심는 데 성공한 지배는 땅의 지배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언어와 함께 지배가 계속된다. 언어 속에 지배자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는 것은 어렵고 중요하다. 중요한데 어렵다. - P100

말의 변질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한 시기에 존중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던 단어가 다른 시기에는 무시하기 위해 쓰인다. 한 곳에서 존중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 다른 곳에서는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다. 말은 자율적이지 않다. 말의 운명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니까 말의 타락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타락할 줄 모른다. 스스로 숭고해질 줄 모르는 것처럼 타락할 줄도 모른다. 타락한 사람들이 말을 더럽힐 뿐이다. 이렇게 쓰이던 말을 저렇게 쓰면 그 말은 더이상 이런 말이 아니게 된다. 적어도 그런 뜻으로는 쓰지 못하게 된다. - P102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많은 것을 바꾼다. 무엇보다 말을 바꾼다. 성향이나 출신, 인종이나 이념이 만든 혐오와 조롱의 말들을 내버린다. 사랑이 그런 단어들을 그의 사전에서 사라지게 한다. […] 사랑이 성향이나 출신, 인종이나 이념의 벽에 갇히지 않는다는 예시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엇으로도 사랑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 P104

어떤 뜻은 발화의 순간이 아니라 번역의 순간에 비로소 출현한다. 그러니까 번역되기까지는 누구도 아직 말한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반응)이 말하는 사람의 말을 규정/결정한다. 번역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 P106

잘 말한다는 것은 알아듣게 말한다는 것이다. - P108

내일은 오지 않는 시간이다. 내일에 이르렀다고 깨닫는 순간, 그 시간은 오늘이 된다. 내일은 정복되지 않는다. 사람이 ‘앞‘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내일에 이를 수 없다. ‘앞‘은 항상 앞에 있고,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여전히 앞에 있다. 앞에 이른 순간 그곳은 여기가 되고, 여기 앞에는 다시 앞이 있다. ‘앞‘은 항상 앞에 놓인다. ‘앞‘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내일‘은 도착할 수 없는 시간이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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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
누군가의 부재가 왜 고통이 되는가. 부재가 곧 무지의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사람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 한다. 한때 있었다가 없어진 것/사람은 지금 어떠한지 알지 못하고, 그래서 고통스럽다. 연인들은 곁에 없는 연인이, 심지어 조금 전에 헤어졌어도, 지금 무얼 하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이 의심과 불안은 고통을 만들고, 이 고통이 보고 싶다, 그립다, 라는 말로, 기만적인 순화의 과정을 거쳐, 표현된다. - P59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바울의 문장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모르는 부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 모르는 부분이 없이 다 아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모른다. - P63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면 더이상 그리워할 수 없다. 더이상 그리워할 수 없게 되면 그리워할 때의 반응인 설렘은 의심과 불안, 고통과 함께 사라진다. 설렘이 의심과 불안, 고통을 데리고 사라진다. 그 순간 설렘이 의심과 불안과 고통과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설렘이 의심과 불안과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깨닫고, 잠시 안도한다. 울퉁불퉁한 감정에서 해방된다. 평평해진다. 정착한다. 멈춘다. 더 알(아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멈춘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모른 채, 모르니까 멈춘다. 멈춘 사람은 더 가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지식을 손에 쥔 사람이다. 교만은 멈춤의 다른 말이다. 더 가야하는 사람, 더 가야 해서 멈추지 못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 P63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오래 응시하며 서 있는 소년에 대한 기억이 있다. 소년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다였을까? 출렁이는 물, 꿈틀거리거나 흐느적거리는, 삼키려고 덤비거나 등에 태우고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 같은 물, 크고 멀고 아득한 눈앞의 물이었을까? 꼭 그랬던 것 같지 않다. 내 기억은 바다가 허공과 같았다고 떠올린다. 내 기억은 내 눈이 그 허공 너머를 보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바다는 거기 없는 것을 보게 하려고 거기 있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 P66

향수가 보았던 바다를 다시 보려는 마음이라면, 추구는 본 적 없는 바다 너머를 새로 보려는 마음이다. 향수가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그리움이라면, 추구는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얻으려는 그리움이다. 향수가 현실이 불완전하거나 낯설기 때문에 완전한,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익숙한 세계로 귀환하려는 열망을 갖게 한다면, 추구는 이 익숙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부일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모르는, 낯선 세계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분명한 세계 너머 구체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세계를 지향하게 하는 열망이 인간을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리움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 속으로 다른 차원을 초대하는 것과 같다. 초대된 다른 차원이 우리를 끌어 올린다. 바깥으로, 위로. 말하자면 초월. 레비나스는 초월을 횡단하는 trans 운동이자 상승하는 scando 운동이라고 했다.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 P71

얼굴은 독자적이고 고유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은 섞이고 파고들고 부서지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은 섞이고 파고들고 부서지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피해 달아난다. 마주볼 수 있을 뿐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얼굴이다. 붙잡으려면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얼굴은 무수히 많은 기호가 모여 있는 장소여서, 붙잡았다 하면 달아나고 파악했다 하면 벗어난다. 절대로 고정되지 않는다. - P74

‘몸의 들어가고 나온 곳이 맞물리도록 꼭 붙‘이려면, 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과 손을 사용해야 한다. 두 팔로 감싸서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이쪽 손과 저쪽 손을 상대의 등뒤에서 맞잡고 꼼짝 못하게 해야 한다. 팔과 손으로 하는 것이 포옹이다. 이때 두 팔과 두 손은 연인을 가두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때 연인의 팔과 손은 수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포옹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사랑은 가두고 잠근다. 틈을 없애기 위해서이고, 틈이 생길 여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 P79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반복해서 쓰다듬는 연인의 손길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초조하다. 닿을 듯 말 듯해서 안타깝다. 이 초조와 안타까움은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부정하려는 몸짓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얻으려고 한 것을 얻지 못한다. 어쩌면, 얻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갈망하지만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애무의 손길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 위에서 끝없이 맴도는, 맴돌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애무는 손으로 하지만, 그러나 레비나스를 따라 말하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애무는 "언제나 다른 것, 언제나 접근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미래에서 와야 할 것과 하는 놀이" (『시간과 타자,)이고, "애무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며, 폭력은 실패하고 소유는 거부된다."(『존재에서 존재자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소유/정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탐험은 멈추지 않는다. - P81

첫 키스의 순간에, 첫 키스와 함께 사랑이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든다고.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원을 꿈꾸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사랑이 기본적으로 영원을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84

살아 있다는 건 시간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하고 움직인다. 시간은 시간 위에 있는 것들을 흔들고 요동치게 한다. 삶은 시간의 변덕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시간 위에 있는 한 완전한 평온과 고요는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영원에 속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러려면 시간 너머로, 시간을 초월한 자리로 건너가야 한다. - P87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90

발화의 순간 단어는 재정의된다. 발화자의 조건과 발화의 상황에 의해 단어의 뜻이 새로 부여된다.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없다. 말은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에 의해 출현하는데,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이 말의 뜻을 재부여하기 때문에, 기존의 사전, 사전 속의 정의가 무색해지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말은 누군가에 의한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말하는 순간 단어들은 다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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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에 책은 중요합니다. ‘나‘를 읽게 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를 읽게 하지 않는 책을 도대체 왜 읽는단 말입니까?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 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 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람을, 세상을 정말 잘 읽어야 합니다. - P7

왜 심장이 뛰고 눈물이 흐를까?
모르는가,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당신이 내게 작별을 고하는 순간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그의 세상은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그는 ‘세상의 끝‘에 있다. 장소가 아니라 어떤 상태라는 건 그런 뜻이다. 끝은 그렇게 온다. 개별적으로, 세상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실존적으로. - P16

옛날 사람들은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 믿었다. 세상이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계속 걸으면 언젠가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세상이 둥글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안다. 둥근 지구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다. 끝은 시작에 있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등뒤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한없이 걸어 끝까지, 세상의 끝까지 가야 한다. - P17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고, 내가 가장 잘 모르고, 내가 가장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을 까?"(헬무트 틸리케, 『신과 악마 사이』) 각성한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무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라고 헤르만 헤세는 말한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려는 것을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데미안』)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렵냐고? 헤세는 같은 책에서 이미 답을 말해버렸다.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의무는 언제나 어렵다. 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은 것이 의무다. ‘기꺼이‘가 아니라 ‘마침내‘ 하게 되는 것이 의무다. - P18

사람은 자기 앞에 가는 사람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 따라 가고, 자기 뒷사람은 부정한다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말한다.
‘내 뒤에서 내 뒷사람이 되어 걸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네가 얼마나 빨리 나를 미워하게 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 P19

그런 시간이 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 피할 수 없는 시간. 부딪쳐야 하는 시간.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쳐다보아야 하는 시간.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오." 이 말은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눈이 멀기 전의 오이디푸스에게 한 말이다. 눈 먼 예언자는, 왕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디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오." 오이디푸스만 들을 말이겠는가.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 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탄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듣지 않으려 한다. 보게 될 것, 듣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 P21

고백은 벌거벗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겨지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능동의 형태를 띤 이 동사 ‘고백하다‘에 자발적인 성격은 거의 없다.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이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까지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은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일단 행해진 고백은 천하만한 무게를 지닌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고백, 이른바 자발적인 고백에는 자랑의 성격이 섞여 있을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자랑이다. 자랑하기 위해 고백할 수 없다. 어떤 고백도 자랑이 될 수 없다. - P28

자신이 비참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사람은 위대하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는 비참하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진정 위대하다.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팡세』)’ - P29

고백한 사람은 고백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무엇을 고백했느냐는 부차적이다.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고백한 사실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 P31

우화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자생적이지 않고 더 본질적인 다른 이야기를 가리킨다. 보다 실제적이고 더 근본적인 다른 의미를 향해 자기 몸을 내주는 이야기가 우화라면, 우화적 독서는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현실과 근본을 밝히는 넓은 의미의 은유적 해석의 과정일 것이다. - P33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작가 이전을 향하지 않는다. 작가 이전에 그는 누구였는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되었는가. 이런 질문은 호사가들의 흥밋거리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물어야 하는 질문은 어디 있는가, 이다. 어디서 왔는가, 가 아니라 어디에 머무는가, 이다.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온 것이 아니다. - P34

자유와 운명은 작가에게는 한 단어이다. 작가는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온전히 자유롭게 창작자가 되기로 결단한다. 그러나 그 결단은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뿐인 선택지이므로, 그는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 그는 다른 곳에 갈 수 있는데도, 그곳에 오지 않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곳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곳에 온 것은 온전한 그의 뜻이다. 그는 완전히 자유롭고 완전히 부자유하다. - P35

‘놀이‘와 대척점에 있는 것은 ‘일‘이다. 공부하느라 수고한다거나 무리하지 말고 쉬어가면서 공부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공부를 일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화법이다. 공부하는 내게 수고한다는 말을 해준 어른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쉬면서 공부하라는 말 대신 쉬었으니 이제 일하라는 말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공부가 일이라는 생각을, 적어도 소년기에는 하지 못했다. 일은 물리적이고, 실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었다.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타나야 했다. 공부나 독서는, 가시적으로 무엇을 나타나게 하지 못 했다. 그것을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 P39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라고 꼬집은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이다. 그는 프랑스 낭만파 시인 라마르틴의 예를 들어 이 문장의 뜻을 설명했다. 라마르틴은 어느 날 숲길을 거닐고 있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된 형태로 섬광처럼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 시를 그대로 옮겨 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재에서 수없이 고쳐쓴 방대한 분량의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다. 작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관념,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택,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영감에 의해 위대한 작가와 작품이 탄생한다는 낭만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P47

누군가를 꿈꾸는 자는 누군가가 꿈꾼 자이다. 누군가가 꿈꾼 자가 누군가를 꿈꾼다. 작가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은 이렇다. 위대한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작가가 태어난다. 작가가 작가를 태어나게 한다. 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들의 자궁이다. 책은 책에서 나온다. 작가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읽은 놀라운 책들의,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환영이다. 위대한 작가와 그 작품의 품(즉, 꿈)속에서 창조된 정신적 존재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작가로 살도록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비록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강렬하고 위대한 독서 경험의 영향 아래서 힘들게 빚어져 작가가 되는 것이다. - P56

상황이 압도적일 때 개인의 자발성은 최소화되고 삶은 살아 내야 하는 것. 의무가 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린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는 부도수표와 같다. 강요된 자유보다 자유에 반하는 것은 없다. 자유의 행사가 차단된 상황에서 허락된 자유보다 기만적인 것은 없다. 이 경우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아마도 유예일 것이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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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조제핀?
(조제핀이 소스라치며 일어난다.)
조제핀 미안해! 너무 많은 이름을 외워서 잘 때 누군가를 암송하지 않으면 잠들 수가 없어, 절름발이를 위한 자장가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불행은 끔찍한 거거든. 시몬. 시몬. 들었지, 그게 어떻게 소리 나는지? 내 이름을 되 뇌면서 오랫동안 걸었어, 왜냐하면 그걸 말할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거든. 조제핀, 조제핀, 조제핀···. 나는 음산한 날씨에 항구나 별도 없이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된 것 같아. - P150

마시 조제핀, 네 앞에 펼쳐진 걸 바라볼 때 뭐가 보여?
조제핀 피와 거꾸로 흐른 피. 그리고 오래전에 사라진 우리. 우리가 위치한 곳에서 대참사가 벌어진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들은 가치와 아름다운 것을 찾게 되겠지. 답은 찾지 못하고 그들은··· 우리 이름을 찾는 거야! 만 년 전에 쓰러져 간 이들의 이름을! 그들이 빼앗기거나 태우거나 버리지 않도록 어디에 숨길까, 누구한테 맡기지! 내가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어, 무거워, 너무 무거워! - P151

난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지기 전에도 여전히 구별할 수 있어, 바다의 재해나 다 른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인생의 배 위에 머물거나 길을 계속 떠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땅 위에 머물고 싶어.
땅 위에 머물고 싶다.
바람 부는 대로 떠나고 싶지 않아.
파도가 원하는 대로 휩쓸려 가고 싶지 않아.
더럽고 비겁한 인간처럼, 아무 곳이나 아무렇게나 끌려가는,
낙오자처럼.
이 광활함 속에서
잔인한 물고기에
배의 스크루에
암초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지 않아. - P164

아메 오, 아니야! 저런! 어떤 사람이나 어떤 걸 묻는 것으로 우리 삶을 보낼 수 없잖아! 수평선을 봐, 난 수평선처럼 되고 싶어! 내일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거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천 년 동안 말이야, 백 년, 십 년, 열 달, 열흘, 열 시간, 십 분 동안에, 지금 당장 말이야! - P174

아버지 아! 만약 내가 바다 위의 하얀 새였다면.
깊은 빛 속을 향해 빠져 들어갔을 텐데.
진정한 고독을 느꼈겠지,
구름이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될 테고,
낯선 곳으로 한꺼번에 나아가는
거대한 빙하를 보겠지.
나는 오래된 것들의 비밀 속에 있겠지.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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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자안 먼 곳에 있는 별이 우리 삶이 바뀔 거라고 전하기 위해 몇 센티미터 앞까지 다가온 게 느껴져. 여기에 뭐 하러 온 거니, 이스마일의 아들아? - P79

(목소리가 외친다. "교차로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윌프리드 저건 뭐죠?!
와자안 닷새 전부터 외치고 있는 시몬이야!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 온 마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지. 윌프리드, 네가 온 이곳은 별난 곳이야, 사람들은 슬프지,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아, 음악이나 노랫소리, 아무것도, 노인들은 늙었고 조용하길 바라, 하지만 시몬은 목이 터져라 외쳐 대, 한밤중에 말이야, 시몬은 아랑곳하지 않거든, 그 애는 야위었고 못 생겼고 외톨이야, 화가 나 있으며 사람들 머리를 깨 부수려고 노래를 부르지. - P80

와자안 시몬, 넌 기적을 바라고 있는 거야.
시몬 우리 모두 기적을 필요로 하잖아요. 아저씨 같은 어른들은 기적을 봤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 나라를 경험했잖아요, 그런데 전, 저는 폭탄 속에서 태어 났어요, 하지만 나는 확신해요, 삶은 폭탄 같은 게 아니라는 걸. - P86

사베 왜 내가 다른 곳도 아닌 이곳에 있냐고!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았어, 다른 곳, 다른 나라, 다른 시대, 다른 시간에 동물이나 식물, 미네랄도 아닌 지금 이 모습으로 왜 내가 여기 있는 거냐고? 방대한 질문이네, 너무 넓게 물어보는데! 내가 이곳에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다른 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야. 올바른 설명은 아니긴 한데, 이런 슬픈 시기에 너한테 들려줄 만한 더 나은 답을 갖고 있지 않아. - P110

시몬 들어 봐!
사베 그 사람이야!
윌프리드 누구?
사베 내 친구.
아메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그 친구.
사베 낯선 친구들이 가장 멋지지. - P122

아버지 아! 꿈이군!
기사 아! 망자네요!
아버지 기사, 우린 아무런 존재도 아니야, 아무런 존재도! 우리가 찾는 건 바로 이 모든 거지. 망자의 말이야.
기사 말하는 건 쉽죠. 한데 실행하는 건 쉽지 않아요. 꿈이 말하는 겁니다. - P139

사베 미친 건 우리지만 우리를 미치게 만든 건 그 사람들이지! 써 봐. 난 사베고 아버지는 참수당했지, 계곡 아랫마을의 미친놈이야!
마시 난 마시라고 해, 어디 출신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난폭하게 구는 미치광이지!
아메 난 아메야. 아빠를 피 흘리게 하고 엄마를 죽게 한 미친놈이야! - P144

마시 아메, 안 갈 거야?
아메 뭐 하러 가!
마시 아메, 심연의 구렁으로 떨어질 때 거꾸로 떨어지는 게 더 나아. 떨어지려면 햇빛 쪽으로 떨어져야 그게 바로 득이거든. 배로 떨어지면 네 눈이 심연의 어둠에 달라붙어, 그럼 진 거지. 가자. - P146

아버지 기사, 왜 내 아들이 저렇게 쌀쌀맞게 말하는 거야?
기사 시대가 그런 거죠, 누워 있는 사람들의 시대하곤 달라요.
아버지 모든 게 단순한 게 아니군···.
기사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닌데!
아버지 말해 봐, 그 애가 뭘 꿈꾸는지?
기사 훕! 그 애는 잠을 잘 못 자요, 눈을 감으면 공허한 거죠.
아버지 이게 무슨 상황이람, 정말이지!
기사 죽거나 꿈꾸는 것.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버지 아무 차이도 없지.
기사 그래서요?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거지!
기사 좋은 거네요.
아버지 맞아, 좋지. 이리저리 해 봐도 내가 쇠약해지는 걸 멈출 수가 없어.
기사 자연의 법칙은 냉혹하잖아요.
아버지 왜 나를 태양빛에 하얘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거야!
기사 새들이 눈을 파먹잖아요.
아버지 죽음은 보잘것없는 게 아니야.
기사 삶도 마찬가지죠!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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