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맥없이 흰 장미와 무시무시하게 부푼 커튼에 골을 부렸다. 이따금 그녀에게도 다가와 온갖 시골 냄새를 풍기며 애원했다. "산책하러 가자, 나랑 산책하러 가자." 한기로 움츠러든 몸이 이를 거부했고 단편적인 꿈들로 뇌가 몽롱했으나, 점차 미소로 입가가 느슨해졌다. 새벽, 시골의 새벽··· 테라스에 서있는 네 그루의 플라타너스 나무들, 하얀 하늘을 바탕으로 윤곽이 너무도 선명한 이파리들, 개의 발밑에서 자근거리는 자갈 소리, 영원한 유년시절. 이 유년 시절에 관한 작가들의 한탄과,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내가 어렸을 땐‘이라는 주제만 나왔다 하면 그 즉시 시작되는 모든 인간의 봇물 같은 토로 외에 또 어떤 매력을 부여할 수 있을까? 아마 잃어버린 절정의 무책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 P19

기침이 나왔다. 아침 빈속에 담배를 피운 것이 잘못이었다. 빈속엔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게다가 술을 마셔서도 안 되었다. 과속으로 운전을 해서도, 과도하게 사랑을 나누어서도, 심장에 무리를 주어서도, 돈을 낭비해서도, 그 무엇도. - P21

자동차의 라디오에서 콘체르토가 흘러나왔다. […] 그녀는 문화를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감성적인 기억에 의해서만 좋아했다. ‘스무 번도 더 들은 거잖아. 그때 내가 불행했었는데 이 음악이 내 고통과 데칼코마니처럼 들어맞는 것 같았어‘ 그 고통이 누구 때문이었는지는 이미 잊었다. 분명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날들이 있었고 그녀는 당시 자신의 생각과 모습을,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더는 더듬지 않았다. 이제 이 새벽의 바람 속에서 오직 현재만이 그녀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 P21

클레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테이블의 꽃들을 극도로 섬세하게 매만지고 있는 저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한때는 기관총을 쥐었거나 한밤 중에 총탄을 발사하는 전투기의 조종간을 잡았었다니··· 인간이란 정말이지 예기치 못할 존재였다. 인간에 대해선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도 클레르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 P33

그녀는 무례를 범하는 것에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잔인하게 구는 것엔 더더욱. - P36

"우린 끝에서부터 관계를 시작하네요. 대개 커플들이 사과하며 관계를 끝내잖아요.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미안해, 더는 널 사랑하지 않아, 라면서요."
"그 정도만 되어도 우아하겠네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상처가 되는 건 정직한 말이에요. 미안해, 널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내 의무겠지, 같은." - P38

"이봐요, 아가씨. 아마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더 많을걸요."
루실은 웃음을 터뜨렸다. 디안과 샤를의 시선이 그들에게 얹혔다. 그들은 자기들의 ‘피보호자‘들 맞은편의 테이블 가장 자리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부모는 이쪽에, 아이들은 저쪽에. 성인처럼 굴기를 거부하는 서른 살짜리 늙은 어린이들. 루실이 웃음을 그쳤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얼마나 하잘것없는 삶인가. 만일 존재하는 것이 그토록 행복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자살 했으리라. - P40

공유된 웃음의 힘과 위험과 미덕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사랑도 그에 비하면 우정이나 욕망, 또는 절망과 다를 바 없이 강력하지 않다. - P43

그녀는 그들에게 드리우는 기이한 평화를 느꼈다. 술집 주인, 취객, 음악, 조명은 여전히 존재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더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택시로 그녀를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들은 주소도 교환 하지 않은 채 예의바른 어조로 작별 인사를 했다. - P49

짐승을 함정에 몰아넣는 함성과도 같은 떠들썩한 소문들이 파리의 봄을 휘젓고 다녔다. 이 세계에선 매우 특수한 경우인 이 의아한 역전으로, 이전엔 디안을 돋보이게 하고 명예롭게 하던 모든 것이 그녀의 손실이 되었다. 미모는 ‘더는 젊은 날의 그것이 아니‘었고, 보석은 ‘충분하지 않았‘으며(일주일 전만 해도 그중의 지극히 하잘 것 없는 하나만으로도 어떤 여자에게도 눌리지 않기에 충분했었는데 말이다), ‘적어도 그녀에게 남을‘ 롤스로이스조차 빛을 잃었다. 가엾은 디안. 선망이 손바닥 뒤집듯 뒤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칠로 닳을 것이고, 심장은 다이아몬드에 부딪쳐 상처 입을 것이며, 그녀의 발바리는 차 안에서 산책하리라. 마침내, 마침내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할 수 있게 되었다. - P51

다른 사교계 여자에게 자기 애인의 남성적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교계 여자보다 더 정확하고 기술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의상디자이너를 평가할 때는 애인에게 갖다 붙일만한 형용사들을 남발하는 여자들이, 애인에 대해 평가할 때는 몸무게나 신장 관련 수치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 P54

디안은 파리에선 기본이 되는 이 원칙을 잊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 사과해선 안 된다는 것과, 꺼림칙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 - P55

그러니까 이 어린 여자도 알고 있었다. 이 여잔 그걸 알 권리가 없었다. 앙투안은 그녀 거였다. 앙투안의 웃음도, 앙투안의 슬픔도. - P59

이 세계에서 그녀가 혐오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두 연인이 다른 한 사람의 바로 등 뒤에서 암묵적으로 결탁하고, 클레르 같은 목격자 들이 그걸 재밌어하며 낄낄대는 것이었다. 루실은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았다. - P62

그녀는 자기 얼굴 위의 이 주의 깊고 온화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이 얼굴을 이제 자주 보게 될 것이며, 거기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이 정도로 욕망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꿈은 꾸었으리라. - P64

심장이 똑같이 옥죄어드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이게 다인데. 이건 결코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겠지. 이 여잔 날 떠날 거야‘ 이 순간에 어떻게 다른 머리칼을,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분명 오직 이 돌이킬 수 없는 기분에 달려있었다. - P68

서로 간에 불꽃이 일어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들은 예전에 알았던 쾌락을 더는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육체의 한계를 잊었다. 수치심이라든지 담대함이라든지 하는 단어들이 그만그만하게 추상적이 되었다. 이제 한두 시간 뒤에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이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어떤 동작도 결코 불쾌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육체적 사랑에 관해 서툴고 유치한 날것의 언어들을 재발견하며 소곤거렸다. 그들은 주거나 받은 쾌락에 대한 자랑과 감사를 끊임 없이 서로에게 돌렸다. 또한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걸, 한 인간에게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예기치 않았으나 이제는 필수적이 되어버린 육체적 열정이 – 하마터면 그들 사이에서 스치고 지나갈 뻔했던 – 진정한 이야기를 만들려하고 있었다. - P70

"난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널 볼 수 없어, 마음이 아프지 않고는 네가 떠나는 걸 볼 수 없고,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서 너한테 얘기할 수 없을 거야." - P71

불안은 – 분명 질투심보다 더 근원적으로 – 열정의 강력한 가속장치라는 걸 알 정도로 그는 충분히 책을 읽었다. 게다가 그는 스캔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이 연회장 한복판에서 손을 뻗어 루실을 품에 끌어안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걸 확신했다. 이 확신 때문에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지 않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모호하고 강렬한 기쁨마저 느꼈다. 은폐의 기쁨 말이었다. - P80

많은 은밀한 관계들이 이런 식으로 침묵과, 질문의 부재와, 되짚지 않는 문장과, 작정하고 선택한 평범한 단어, 너무 평범해서 엉뚱해 보이는 단어에 의해 발각된다. - P83

"사람들은 점점 두려운 거예요. 늙는 게 두렵고, 가진 걸 잃을까 봐 두렵고, 원하는 걸 얻지 못할까 봐, 삶이 지루해질까 봐, 자기가 지루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운 거죠. 늘 불안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거예요." - P86

루실은 생각했다. ‘디안이나 앙투안 얘기만 나왔다 하면 거북해져서 이렇게 말문이 막히면 안 되는데. 바보 같으니라고. 샤를에게 진실을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앙투안이 좋아요, 그와 함께 웃고 싶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요. 이렇게. 하지만 날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최악의 말을 할 수 있겠어? 샤를은 아마 내가 앙투안과 자는 건 참아도 함께 웃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할 거야. 당연해, 질투하는 이에게 웃음보다 더 끔찍한 건 없으니까.‘ - P88

모진 걸 싫어하는 그녀는 자신이 모질어질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에 반가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누구도, 어떤 애원으로도 그녀가 이튿날 앙투안을 만나는 걸, 앙투안의 육체와 숨결과 목소리를 되찾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 았고, 평소 모든 계획이 늘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유동적이었던 그녀였던 만큼, 이 집요한 욕망이 좀 전에 앙투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날뛸 듯한 기쁨보다 더 크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 P89

별안간 힘 센 사랑 – 그와 동시에 행복한 사랑 – 을 발견했고, 자신의 존재가 오직 한 존재로 한정되기는커녕 무한해지고 채우기 불가능해지고 열광적인 존재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표 없이 흘려보냈던 그녀는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에 초조해했다. - P90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진실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가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비겁했다. - P91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감정은 기억력이 순간의 격렬함에 의해 증발해버리는 절대적인 감정이어서, 헤어진 뒤에도 구체적인 기억을, 가령 어둠 속에서 속삭였던 말 하나, 또는 동작 하나를 절망적으로 더듬어보려 해도 허사인, 그런 절대적인 감정이었다. - P92

그들은 거의 넋이 나가서 몽유병 환자들처럼 헤어졌다가, 그로부터 채 두 시간이 못 되어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 요소,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오로지 다시 만날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이 그들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절 속에서, 다른 것들 속에서, 기다림 때문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들을 지탱해주었다. - P92

그들은 매번 다소 겁에 질린 얼굴로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행여 교통체증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그는 그를 붙잡고 늘어질 출판사 협력 작가를 맞닥뜨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한 사람들처럼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 P92

그녀는 그들의 열정을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위태위태하고 환상적인 선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의 미신적인 믿음으로 다음 단계를 계획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기를 좋아했고, 그를 그리워하기를 좋아했다. 그와 떳떳하게 함께 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숨는 것도 좋아했다. 매 순간의 행복으로 충분해했다. 혹여 그녀가 두 달 전부터 상투적인 사랑 노래에 감동하는 자신에게 문득문득 놀라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랑 노래의 대략적인 주제인 ‘독점욕‘이나 사랑의 ‘영원성‘ 따위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인 바, 의도치 않았으나 뿌리 깊은 냉소주의에 필연적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분별할 수 있다면 자연히 이 냉소주의에 이르게 되고, 사기꾼들이나 허언증 환자들만이 평생토록 너저분한 낭만주의에 빠져 지낼 수 있다는 듯이. - P95

그녀는 앙투안을 사랑했으나, 샤를에게 애착이 있었다. 앙투안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샤를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두 남자를 평가하면서 그녀는 정작 자신에게는 – 그 둘 사이에 걸쳐있는 자신을 경멸할 만큼 –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충족감의 철저한 결여가 그녀를 잔인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행복했다. - P96

앙투안은 누구일까? 어디 출신이고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을까? 그녀는 침대에 앉았다가 문득 거북해져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와서 무례를 범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그녀는 앙투안이 ‘타인‘이고, 그의 손이며 입술이며 눈이며 육체에 대해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꼭 그와 굳게 맺어진 공모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97

우리는 행복할 때 다른 이들을 기꺼이 자신의 행복의 조력자로 간주한다. 다른 이들이 의미 없는 참관자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때는 오직 우리가 더는 행복하지 않을 때다. - P104

그는 정말이지 그녀가 혼자서 삶을 헤쳐 나갈 수 없으리라 여겼고, 그 순간 그녀는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그에게 안전감 이상의 애착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무책임을 받아들였다. 15년 전 그녀의 무의식적 선택, 영원히 청소년기에 머물겠다는 그 결정을 인정해주었다. 똑같은 결정에 앙투안은 틀림없이 분노하리라. 어쩌면 그녀가 되고 싶은 사람과 샤를이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완벽한 일치가 그 모든 열정보다 더 강력하고, 그녀에게 그 모든 열정을 부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 P106

그가 루실에게 춤을 청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지그시 얹혔다. 그와 마주 댄 손바닥의 감촉, 그리고 그녀의 볼과 그녀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그의 볼 사이에 확보된 야릇한 거리감, 그녀가 정확히 감지한 그 욕망의 거리감에 그녀는 동요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군중을 의식하여 그들을 속이기 위해 슬쩍 지루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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