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으로, 어쩌면 비비안하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아이 집에 자꾸 가서 그때마다 덧창이 닫혀 있는 걸 보다 보면 그 아이가 덜 보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는 비비안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는 데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단단히 매달렸고, 그런 까닭에 시간이 약이란 말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 P179

날씨가 더웠다. 여기 계곡에선 여름이 곧 물러가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여름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느긋하게 머무르면서 편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꼭 나처럼, 앞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 P189

나는 산을 오르면서 엄마 생각을 했고, 엄마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며 찌직찌직 전기가 튀는 엄마의 포옹을 상상했다. 눈물이 방울져 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신 울지 않겠다는 내 다짐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 P191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럽다. 나는 비비안이 미웠다.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비비안을 사랑한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그 아이를 증오했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그 아이를 마크레 녀석만큼이나 미워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석보다 더 미워했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마크레 녀석은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언제나 나를 놀리고, 깎아내리고, 때리고, 다른 애들 보는 데서 나를 모욕했다. 그야 뭐 늘 있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하루는 사랑하는 척하다가 이튿날엔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 P204

나는 이 모든 걸 받아들였다. 모르는 것보다, 내 머리에 감당하기 어려운 뭔가를 이해하라고 억지를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았다. 내가 비비안을 배반한 거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 때문이란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뭐든 언제나 내 잘못이었고, 그런 것엔 이골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은 마치 내 낡은 초록색 벨벳 파자마처럼 편안했다. - P215

나는 내가 아이 시절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모든 건,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했다. 비비안의 우정뿐 아니라 그 아이의 짜증까지도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비비안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다 아름다웠다. 그러니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 P215

처음엔 동굴로 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비비안은 나더러 제자리에서 맴돌라고 하지 않았다. 어딜 걷고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높은 고원을 감싸는 어둠뿐이었는데, 그 어둠이 어찌나 짙던지 번개가 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우리 두 사람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밤에는 심지어 어둠을 가르며 걷는 우리 두 사람조차 진짜로 존재하긴 하는 건지, 행복하기 위해 서로를 만들어 낸 건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자연스럽게 들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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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갈래?"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런 초대를 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편에서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저 수영 팀이에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팀이라."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맞다. 물론 그래야지."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영원히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 P33

나는 늦게까지 수영 연습을 했고, 차우네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고, 늦은 밤에 혼자 해변을 산책했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와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아버지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 한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버린 책임을, 소식 한 자 없이 지나가는 그 세월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에게 전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려는 듯이 보였고, 나는 남은 생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저녁마다 어머니와 데이비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면서—걱정이 됐다. - P35

내 거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영화의 프리미어 시사회 날 밤에 찍은 사진이 있다. 그들은 뉴욕의 어느 소극장 밖에 서 있고, 아버지는 위쪽으로 보이는 마르키의 불빛을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는 슈트 차림으로, 어머니는 긴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본 내 기억 속 유일한 때다. 그들은, 그 둘은,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고, 자신들이 아직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맞서, 서로를 감싸안은 모습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 P45

휴스턴은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살아서 오일 붐을 기억하고 있다.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 마을은 하룻밤 사이에 도시가 됐고, 마을은 예전의 것들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더이상 그 시절을 낭만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는 바라보지 않지만, 이따금은 그 시절이, 대기에 흐르던 그 에너지와 그때의 낙관과 희망이 그립다. 내가 좋아한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세상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걸어들어 와, 당신 눈빛이 마음에 든다며 백 달러짜리 지폐를 내밀 수도 있었다. 그다음날 밤에는 누군가에게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건네는 사람이 당신이 될 수도 있었다. - P51

"당신은 자연스러워." 그날 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진짜야."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뜻인가?"
"비현실적이기도 해. 좋은 의미로." - P53

일 년 후 우리는 같이 살게 되었고, 다시 일 년 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결혼식 날 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점을 분명히 알아둬. 왜냐하면, 좋든 싫든, 당신은 이제 내게서 떨어질 수 없으니까."
"그거 협박이야, 약속이야?"
"둘 다지." - P54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 P57

대학 때 이후로는 대마초를 피워보지 않았는데, 부엌 식탁에서 대마초를 얇게 펴 마는 동안 아마도 캐런은 평생 이런 것을 피워본 적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가 내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기리라 생각하며 수영장으로 나가 불을 켠다. 그런 다음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 담뱃불을 붙이고, 잠시 후 수면 위에 반듯이 누워, 별들 아래서 유유히 떠다닌다. 중력 없이, 짝도 없이, 길을 잃고서. - P66

나는 방문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기들 삶의 어떤 시기에는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 상상해본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내 방문 앞에 서서, 내가 한 번도 데이트해보지 못한 온갖 여자아이들에 대해서 친구들과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 P68

대신, 내 아내는 우울해 보인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에 너무나 낙담하고, 지치고, 모든 환상이 깨진 나머지, 다른 누구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72

나는 마흔여섯의 나이에 대마초를 피우는 습관이 들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희극적이며, 굉장히, 정말 굉장히 슬프게 느껴지는 일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 P76

"내 인생은 끝났어요." 탤벗이 말한다. "나는 열여덟 살인데 내 인생은 끝났어요."
"스탠퍼드 말고도 학교는 많아."
"나한테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식 상태가 변질돼 있지 않다면, 나는 뭔가 친절한 말을, 이 아이를 위로해줄 만한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탤벗을 보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편입할 수 있잖아. 줄곧 그런 제도가 있었어."
"네. 아마도요." - P79

나는 그가 내 대답에 보여주는 관심이 고마웠고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차분하면서도 사려 깊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 P90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지요." […]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 P92

그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가슴속에서 따뜻한 일렁임을 느꼈다. 그것은 내 또래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열뜬 흥분과는 또다른 종류의 감정, 좀더 부드럽고 보다 포괄적인 온기였다. 나는 그가 내게 숨김없이 질문하는 것과 내가 이야기할 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는 나를, 내가 상상하기에 자신의 동료를 대할 것 같은 태도로, 성인으로, 대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 P93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 자기를 넘어서는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 이해하지 못 할 수준, 하고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도, 보어조차도, 그 지점에 도달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 P94

나는 팔꿈치를 괴고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이면 그의 얼굴은 언제나 더없이 온화하고 순해 보였고, 그러면 나는, 기숙사 방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가 언젠가 내가 결혼할 남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는 아주 다른 감정이다.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남은 생을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가정을 일구고 그의 곁에서 늙어갈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란 것을, 불행하지 않을 수 있으리란 것을, 나는 알았다. - P99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나와 함께 있는데도 취할 만큼 나를 믿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봐야 단둘이 보낸 두번째 시간이었고, 우리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는데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편안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 와인을 마시고 웃으면서 조그만 부엌에서 그의 곁에 앉아 있을 때, 내 마음이 은밀하게 떨렸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 P101

나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나누는 모든 말들은 그 바깥의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소녀 시절 품었던 환상, 아버지의 친구분들이나 학교 선생님들—그러니까 항상 나이가 많은 남자들—이 연루된 환상에 대해 고백할 때면 로버트는 미소를 짓곤 했다. 나는 그때 이미 내 안에 어떤 충동이 있었고, 그런 상사 편의 열병을 고백함으로써,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용할 수도 있었을 그 기회를 잡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소녀 시절의 성적 로망을 듣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P106

그것이 로버트가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이상 나아갈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희로써 의도된 종류의 희롱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일부는 그가 그 순간에 뭔가를—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해주길 바랐지만, 그가 나를 안으려는 의도를 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나는 로버트가 우리 관계에 대해 나처럼 죄의식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을 다음 단계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그의 양면적인 감정은, 그로 인해 훗날 내가 자신에게 분개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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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아저씨에 따르면, 자기 고향에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픈 일만 만들어 낼 뿐이라서, 아예 말하는 습관을 버렸다고 했다. 더구나 양치기는 사람 만날 일도 없으니. 사람들이 만일 자기한테 말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던졌다면 기꺼이 대답을 했을 테지만, 이제껏 아저씨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벙어리로 지낸다는 거였다.
나도 동의했다. 그건 내가 주유소에 있을 때하고도 약간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는 대신에 장난감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말을 되는 대로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데 있었다. 그래야 내 안에 말이 쌓여 있지 않으니까. - P153

땀범벅이 되어 잠에서 깼을 때, 새벽빛은 마티 아저씨가 거실 한쪽에 마련해 준 내 침대 맞은편 벽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암튼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고, 그래서 엄마를 상상했다. 상상 속 엄마를 꼭 끌어안고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완전히 밝은 다음에도 나는 기다렸다. 환한 빛이 괴물들을 완전히 쫓아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괴물들이 무서운 건, 그놈들은 항상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몸을 숨긴다는 점이다. - P157

그날 아침, 떠오르는 아침 햇빛으로 노랗게 물든 마티 아저씨의 방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이상하고, 정상이 아니고, 문제투성이다. 좋다, 그야 뭐 그렇다 치자. 모든 사람이 틈만 나면 그렇게들 말하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말로키오, 자기만의 악몽과 자기만의 마크레가 있다. 그저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 P159

〈그래서?〉라고 묻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건 나쁜 소식을 불러오는 종류의 질문이라는 걸 나는 일찍부터 알았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네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말했어. 그래서 네 할머니는 너를 무척 사랑하지만 이제는 세상을 떠나셨지. 그래서 대답은 〈아니야〉가 맞아, 산타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아.」 나는 이런 식으로 〈그래서〉란 말을 한 보따리는 더 댈 수 있다. - P167

나는 마티 아저씨에게 날 재워 주고 먹여 주면 일손을 보태겠다고 제안했다. 아저씨는 내가 양을 접해 본 경험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최근 들어 제일 가까이서 본 양이라곤 아기 예수님 탄생 연극 때 마르탱 발리니가 연기한 양이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나만큼 양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고, 양들도 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서,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뭔가에 꽉 막혀서 버벅거린다는 거였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티 아저씨는 내가 곧 흥분 상태에 빠지리라는 걸 눈치채고는, 나한테 양의 앞과 뒤를 분간할 줄 아는지 물었다. 그거라면야 물론 알고 있었다! 마티 아저씨는 내 어깨를 두번 툭툭 치더니 말했다.
「좋아, 넌 합격이야.」 - P171

나는 사튀르냉이 죽은 이후 그토록 슬펐던 적은 없었다. 사튀르냉이 차에 치어 죽었을 때 엄마는 나를 꼭 안고 달래 주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시간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슬픔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건지, 내 참.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얼마 후 잠이 깼을 때 나는 덜 슬펐고, 조금씩 조금씩 나쁜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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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마크레 녀석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만 녀석의 부리부리한 두 눈이 심술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날 따름이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녀석이거늘. 모든 것은 아득히 먼 옛이야기일 뿐이었다. - P133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마지막으로 비비안을 만났을 때 뭔가 허튼짓을 하거나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한 게 분명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때 우리는 소원을 빌었고, 비비안은 행복해 보였다. 그냥 비비안이 나를 배신했고, 그래서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본래 여자들은 말이 많은 법이고, 기회만 있으면 배신하므로, 절대 믿을 게 못 된다. 조로도 결혼을 안 했고, 내가 주름 잡힌 유니폼 때문에 조로보다 덜 좋아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슈퍼맨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만 봐도 맞는 말이다. 만일 헌병들한테 내가 있는 곳을 알려 준 장본인이 비비안이라면? 아니, 그 아이는 절대 그랬을 리 없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다. 헌병들은 고원을 이 구석 저 구석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으리라. 그게 전부다. - P134

번뜩 계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 커다란 당나귀 울음 소리를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이 모든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고원 같은 것도 비비안도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나는 절친한 여자 친구도 없고, 동굴에서 기도하지도 않았고, 산에서 물을 마시지도 않은 거였다. 어쩌면 나란 사람 자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의 나, 튀브 다리의 바보인 나조차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보통 사람, 정상적인 사람,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소년으로 절벽에 난 Z자 길을 기어오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몹시 현기증이 났고, 이거야말로 이 희한한 이야기 중에서 유일한 사실이며, 그 후 추락했다. 지금은 계곡 구석에 떨어져서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다. 생명이 꺼져 가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정신 나간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 P135

나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단어들이라면 대부분 이해하지만, 그것들을 붙여 가며 읽으려고 하면 그때부터, 학교에서 리본 댄스를 할 때처럼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렸다. 리본이야 원래 뒤섞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었는데도 나는 그 리본조차 올바른 순서대로 섞지를 못 했다. 하물며 편지를 읽어야 한다니, 말을 말아야지. - P137

갑자기 시커먼 분노가, 골짜기를 온통 막아 버릴 만큼 엄청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건 순서대로 뒤섞여 주지 않는 리본에 대한 분노였고, 내가 읽지도 못 할 편지를 쓴 비비안에 대한 분노였으며, 나 자신과 내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빠, 그런 아빠를 용서하는 엄마에 대한 분노였으며,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틀어막았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된 건지 내 방으로 끊임없이 기어 들어오는 개미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건 1번 위치에 놓았는데도 빵을 태워 버리는 토스터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또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기와 목마름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 P138

조금씩 조금씩 통증이 사라졌다. 나는, 예전에 언젠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처럼, 둥둥 떠다녔다. 초록색 선들과, 눈깔사탕처럼 동그랗게 쏟아져 내리는 빛, 뿌옇게 날리는 모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 속에 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물에서 구조해 주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커다란 평온을 느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나는 머지않아 물에 도달한다는 걸, 파도가 나를 물가 모래밭으로 밀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떨떨할 테지만 무사한 상태로 말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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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본성들은, 게다가 긍정적인 것들일수록,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뿐 나머지 단계를 건너뛴다. 디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 P119

"오늘 연회는 꽤 성공적이었지, 안 그래?"
"그야말로 불꽃놀이였죠."
앙투안은 대답하며 카펫 위에 드러눕더니 몸을 뒤집어 엎드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 같았고, 영원한 고독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귀에 빈정거리며 심술궂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아름답고, 낡고, 허식적이고." - P121

커다란 밤나무들이 분홍빛 하늘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하늘을 거의 뒤덮었다. 늘 너무 이르게 켜지는 가로등들은 겨울의 소중한 가이드 역할에서 여름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며, 직업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었다. 여름의 가로등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녁 해와, 하늘 전체에 드리울 기세로 일찌감치 하늘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여명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P123

루실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침대에 누웠다. 햇살이 카펫 위에서 급속도로 수그러들었고, 길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두 달 전에 방 안에 스며든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바람처럼 살랑거리며 방 안에 감도는 바람이 아니라 대담하고 날랜 바람이었고, 이 바람이 솔솔 잠이 오게 하는 것과 달리, 번쩍 잠을 깨게 하는 활기찬 바람이었다. 이 두 바람 사이에 앙투안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 - P124

문득 불안해졌다. 누군가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지루해 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삶이 몹시 만족스러웠기에 이 침대에 누워 한없는 부드러움을 느끼며 점차로 어둠에 휩싸여갔다. 그녀는 지구는 둥글다는 것과 복잡해 보이는 삶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불행도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P125

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행복 –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할 때 그 누군가와 필연적이며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 은 실은 매끄럽고, 둥글고, 흠 없는 무언가로 더할 수 없이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물론 잠깐일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 나타난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이전에 다른 누군가와 공유했던 행복보다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다른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와 공유했던 행복은, 실수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반을 두었던 허무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 P125

그들은 이 밤, 이 격렬함 속에서 조금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기적의 뗏목처럼 밀려온 잠에 기어올라 축 늘어져서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마지막 결속의 의미로 서로의 손을 살며시 잡은 채였다. - P129

그녀는 그가 낮에는 이토록 무사태평하고 몽상적이며, 밤에는 그토록 거칠고 정확한 것이 좋았다. 마치 사랑이 그의 안에서 잠자던, 오직 쾌락만이 확고 불변의 유일한 법칙인 무사태평한 이교도를 깨운 것처럼. - P129

그들은 똑같은 이단의 두 신도가 되었고, 이 이단은 이제 그들이 서로 간에 어떤 변덕을 부리든,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존재했다. 앙투안은 정신적으로는 그녀에게 적대적일 수 있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제 그녀의 육체의 반쪽인 바, 그는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기 위해 그녀의 육체가 필요하고 그리울 터였다. 그들의 육체는 친구 사이인 두 마리 말과도 같았다. 말들은 주인들의 불화로 인해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국은 쾌락의 햇빛이 찬란한 정경 속으로 함께 질주할 터였다. 그녀에게는 그 반대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욕망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도, 정당성도 없었다. 이 불평 많은 루이 필리프 시대 같은 프랑스에서, 그녀는 뜨겁고도 격렬한 피에 이끌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도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P136

어떤 비겁들은 미신에 빠지기 십상이다. - P138

루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빠르게 스 쳤다. ‘저 봐, 나 없이도 웃고 있네.‘ 그럼에도 그녀는 기쁨에 찬 동작으로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루실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웃음을 돌려주지 않은 채 짧은 목례를 보이고는 돌아섰다. 일순, 불빛이 휘황하고 수목이 우거진 프레카틀랑이 음산해졌다. 돌연 사람들의 경박함이며 지적 빈곤함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고, 이 장소, 이 세계, 그녀 자신의 삶이 절망적으로 권태로워졌다. 앙투안이 없다면, 그의 금빛 눈과 그의 방과 일주일에 세 번씩 그의 품에 안겨서 보냈던 몇 시간의 진실이 없다면, 즐겁다고 할 수 있을 이 소란하고 혼란스런 세계를 이루는 각각의 디테일들은 실력 없는 실내 디자이너의 치졸한 창작품에 불과해지리라. 클레르 상트레는 추해 보였고, 조니는 우스꽝스러웠으며, 디안은 반송장 같았다. - P138

루실은 생각했다. ‘다들 개야. 개들. 할 수만 있다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갈가리 물어뜯을 거라고.‘ - P140

이곳의 모두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들의 작은 비밀을 은폐하고 키워가고 보호하기 위해서, 상상력으로 넘쳐났다. 오직 그, 앙투안을 제외한 모두가. - P145

그가 그녀를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사실이 아닐까? 그녀는 샤를에게 얹혀살고 있었고 그가 제공하는 선물에 무감하지 않았다. 선물의 가격보다는 의도에 더 감동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선물을 수락했다. 그녀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능력이 되고 거기에 존경까지 하는 남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 만큼, 그것이 부인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앙투안은 엄청난 해석의 오류를 범했다. 그는 그녀가 그것 때문에 샤를을 떠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샤를을 포기하지 못한 거라고. 그는 그녀가 그런 계산이 가능한 여자라고 믿었고, 그녀를 평가 했으며, 틀림없이 경멸했다. 그녀는 질투심이 거의 필연적으로 저속한 추론을, 행동을, 판단을 이끌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 P147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수천 번이나 알려지고 확인된 통념이었다. 그녀는 여성주의 철학에 빠진 기분이었다. 짜증스러웠다. ‘내가 디안과의 관계에 대해 물은 적 있어? 난 질투하지 않아. 그런 내가 괴물일까? 그래, 만일 내가 괴물이라면 그걸 내가 어떻게 바꾸겠어? 아무것도 못 바꿔.‘ 하지만 그녀가 바뀌지 않는다면 앙투안을 잃을 터였다. 이 생각이 그녀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 P149

가끔씩, 뜻하지 않았던 잠시 잠깐에, 절망적으로 사지를 부들거리기를 멈추었을 때, 태양의 열기와 바닷물의 차가움과 모래의 부드러움을 느끼기를 잊었을 때, 앙투안과의 추 억이 그녀에게 돌처럼 쿵, 하고 떨어져 내렸고,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힌 듯 해변에 누워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벌린 채, 하지만 손바닥에 못 박히는 대신 심장에 날카로운 기억의 투창이 꽂혀서 행복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심장이 뒤집히고, 텅 비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비어버리는 동시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에. - P151

여기서 그와 함께 수영하고, 바닷물이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줄 그의 젖은 금발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리라. 파도 사이에서 그에게 키스하고, 여기서 멀지 않은 아직은 한적한 방갈로들 뒤의 모래언덕에서 그를 사랑하고, 저녁엔 그와 꼼짝도 하지 않고서 분홍빛으로 물드는 지붕 위로 날아드는 비둘기들을 바라볼 수도 있었으리라. 시간이 그저 죽여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 애지중지하고 아끼고 지나가지 못하게 할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 P152

그녀는 앙투안을 그의 젊음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금발이어서 사랑하고 청교도적이어서 사랑하는 것처럼, 그여서 사랑했다. 그가 관능적이어서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서 사랑하고, 아마도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 P153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그녀와 태양 과 안락한 삶과 심지어 사는 맛 사이에 장벽처럼 놓였다. 사실 그녀는 부끄러웠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 P154

‘이제 나는 대가를 치르는구나‘ 루실은 혐오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생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나, 당대의 사회적, 도덕적 금기는 그녀를 잠식해버렸다. 다른 이들은 천 번도 더 직시했으나 그녀는 부끄러운 병이라도 되는 양 늘 조금은 물러서있었건만.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근심이 깊어졌고, 그런 만큼 혐오감도 깊었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병을 얻었다. 이 고통은 어떤 달콤함도 끼어들지 못하는 고통이었고, 가장 불쾌한 방식의 고통 중 하나였다. - P154

그는 새벽 3시에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공기에 술이 깨어 정신은 말짱했다. 한마디로 그는 젊은 남자였다. 이따금 불행 또한 희열감이 가져다주는 것과 유사한 힘과, 활력과, 일종의 열의를 북돋는다. - P157

그는 그녀가 2년간 고집스레 유지한 이미지에 익숙했고, 다른 사람을 바라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순간, 침대에 똑바로 앉아 여명을 받으며 꼿꼿이 유지하고 있는 이 자존심, 그녀가 잠시 존재를 잊었던 사교적 인물로서의 그녀 안에 내재된 이 자존심이야말로 이제부터 그녀의 가장 가깝고도 친근하고도 소중한 지원군이 될 터였다. 문득 30여 년간 단련한 승마 덕분에 버스 밑을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걸 발견한 타고난 기수처럼,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자존심이 자신을 구하는 것을 목도했다. 무시되었거나 잘못 사용되었던 이 정신적 자산은 최악의 상황을, 다시 말해 앙투안이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차단했다. - P165

어떤 희망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희망을 가질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억이란 루실의 쾌락과 그 자신의 쾌락이었으나, 그마저도 그를 안도하게 하기보다는 번민하게 했다. 상대방이 느끼는 쾌락의 강렬함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강렬함을 다른 이에게서도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느낀 적이 없었던 경우에는 더더욱.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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