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마크레 녀석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만 녀석의 부리부리한 두 눈이 심술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날 따름이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녀석이거늘. 모든 것은 아득히 먼 옛이야기일 뿐이었다. - P133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마지막으로 비비안을 만났을 때 뭔가 허튼짓을 하거나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한 게 분명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때 우리는 소원을 빌었고, 비비안은 행복해 보였다. 그냥 비비안이 나를 배신했고, 그래서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본래 여자들은 말이 많은 법이고, 기회만 있으면 배신하므로, 절대 믿을 게 못 된다. 조로도 결혼을 안 했고, 내가 주름 잡힌 유니폼 때문에 조로보다 덜 좋아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슈퍼맨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만 봐도 맞는 말이다. 만일 헌병들한테 내가 있는 곳을 알려 준 장본인이 비비안이라면? 아니, 그 아이는 절대 그랬을 리 없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다. 헌병들은 고원을 이 구석 저 구석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으리라. 그게 전부다. - P134
번뜩 계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 커다란 당나귀 울음 소리를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이 모든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고원 같은 것도 비비안도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나는 절친한 여자 친구도 없고, 동굴에서 기도하지도 않았고, 산에서 물을 마시지도 않은 거였다. 어쩌면 나란 사람 자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의 나, 튀브 다리의 바보인 나조차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보통 사람, 정상적인 사람,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소년으로 절벽에 난 Z자 길을 기어오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몹시 현기증이 났고, 이거야말로 이 희한한 이야기 중에서 유일한 사실이며, 그 후 추락했다. 지금은 계곡 구석에 떨어져서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다. 생명이 꺼져 가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정신 나간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 P135
나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단어들이라면 대부분 이해하지만, 그것들을 붙여 가며 읽으려고 하면 그때부터, 학교에서 리본 댄스를 할 때처럼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렸다. 리본이야 원래 뒤섞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었는데도 나는 그 리본조차 올바른 순서대로 섞지를 못 했다. 하물며 편지를 읽어야 한다니, 말을 말아야지. - P137
갑자기 시커먼 분노가, 골짜기를 온통 막아 버릴 만큼 엄청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건 순서대로 뒤섞여 주지 않는 리본에 대한 분노였고, 내가 읽지도 못 할 편지를 쓴 비비안에 대한 분노였으며, 나 자신과 내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빠, 그런 아빠를 용서하는 엄마에 대한 분노였으며,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틀어막았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된 건지 내 방으로 끊임없이 기어 들어오는 개미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건 1번 위치에 놓았는데도 빵을 태워 버리는 토스터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또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기와 목마름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 P138
조금씩 조금씩 통증이 사라졌다. 나는, 예전에 언젠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처럼, 둥둥 떠다녔다. 초록색 선들과, 눈깔사탕처럼 동그랗게 쏟아져 내리는 빛, 뿌옇게 날리는 모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 속에 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물에서 구조해 주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커다란 평온을 느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나는 머지않아 물에 도달한다는 걸, 파도가 나를 물가 모래밭으로 밀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떨떨할 테지만 무사한 상태로 말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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