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으로, 어쩌면 비비안하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아이 집에 자꾸 가서 그때마다 덧창이 닫혀 있는 걸 보다 보면 그 아이가 덜 보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는 비비안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는 데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단단히 매달렸고, 그런 까닭에 시간이 약이란 말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 P179

날씨가 더웠다. 여기 계곡에선 여름이 곧 물러가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여름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느긋하게 머무르면서 편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꼭 나처럼, 앞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 P189

나는 산을 오르면서 엄마 생각을 했고, 엄마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며 찌직찌직 전기가 튀는 엄마의 포옹을 상상했다. 눈물이 방울져 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신 울지 않겠다는 내 다짐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 P191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럽다. 나는 비비안이 미웠다.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비비안을 사랑한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그 아이를 증오했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그 아이를 마크레 녀석만큼이나 미워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석보다 더 미워했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마크레 녀석은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언제나 나를 놀리고, 깎아내리고, 때리고, 다른 애들 보는 데서 나를 모욕했다. 그야 뭐 늘 있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하루는 사랑하는 척하다가 이튿날엔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 P204

나는 이 모든 걸 받아들였다. 모르는 것보다, 내 머리에 감당하기 어려운 뭔가를 이해하라고 억지를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았다. 내가 비비안을 배반한 거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 때문이란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뭐든 언제나 내 잘못이었고, 그런 것엔 이골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은 마치 내 낡은 초록색 벨벳 파자마처럼 편안했다. - P215

나는 내가 아이 시절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모든 건,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했다. 비비안의 우정뿐 아니라 그 아이의 짜증까지도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비비안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다 아름다웠다. 그러니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 P215

처음엔 동굴로 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비비안은 나더러 제자리에서 맴돌라고 하지 않았다. 어딜 걷고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높은 고원을 감싸는 어둠뿐이었는데, 그 어둠이 어찌나 짙던지 번개가 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우리 두 사람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밤에는 심지어 어둠을 가르며 걷는 우리 두 사람조차 진짜로 존재하긴 하는 건지, 행복하기 위해 서로를 만들어 낸 건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자연스럽게 들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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