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본성들은, 게다가 긍정적인 것들일수록,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뿐 나머지 단계를 건너뛴다. 디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 P119

"오늘 연회는 꽤 성공적이었지, 안 그래?"
"그야말로 불꽃놀이였죠."
앙투안은 대답하며 카펫 위에 드러눕더니 몸을 뒤집어 엎드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 같았고, 영원한 고독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귀에 빈정거리며 심술궂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아름답고, 낡고, 허식적이고." - P121

커다란 밤나무들이 분홍빛 하늘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하늘을 거의 뒤덮었다. 늘 너무 이르게 켜지는 가로등들은 겨울의 소중한 가이드 역할에서 여름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며, 직업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었다. 여름의 가로등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녁 해와, 하늘 전체에 드리울 기세로 일찌감치 하늘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여명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P123

루실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침대에 누웠다. 햇살이 카펫 위에서 급속도로 수그러들었고, 길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두 달 전에 방 안에 스며든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바람처럼 살랑거리며 방 안에 감도는 바람이 아니라 대담하고 날랜 바람이었고, 이 바람이 솔솔 잠이 오게 하는 것과 달리, 번쩍 잠을 깨게 하는 활기찬 바람이었다. 이 두 바람 사이에 앙투안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 - P124

문득 불안해졌다. 누군가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지루해 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삶이 몹시 만족스러웠기에 이 침대에 누워 한없는 부드러움을 느끼며 점차로 어둠에 휩싸여갔다. 그녀는 지구는 둥글다는 것과 복잡해 보이는 삶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불행도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P125

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행복 –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할 때 그 누군가와 필연적이며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 은 실은 매끄럽고, 둥글고, 흠 없는 무언가로 더할 수 없이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물론 잠깐일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 나타난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이전에 다른 누군가와 공유했던 행복보다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다른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와 공유했던 행복은, 실수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반을 두었던 허무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 P125

그들은 이 밤, 이 격렬함 속에서 조금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기적의 뗏목처럼 밀려온 잠에 기어올라 축 늘어져서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마지막 결속의 의미로 서로의 손을 살며시 잡은 채였다. - P129

그녀는 그가 낮에는 이토록 무사태평하고 몽상적이며, 밤에는 그토록 거칠고 정확한 것이 좋았다. 마치 사랑이 그의 안에서 잠자던, 오직 쾌락만이 확고 불변의 유일한 법칙인 무사태평한 이교도를 깨운 것처럼. - P129

그들은 똑같은 이단의 두 신도가 되었고, 이 이단은 이제 그들이 서로 간에 어떤 변덕을 부리든,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존재했다. 앙투안은 정신적으로는 그녀에게 적대적일 수 있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제 그녀의 육체의 반쪽인 바, 그는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기 위해 그녀의 육체가 필요하고 그리울 터였다. 그들의 육체는 친구 사이인 두 마리 말과도 같았다. 말들은 주인들의 불화로 인해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국은 쾌락의 햇빛이 찬란한 정경 속으로 함께 질주할 터였다. 그녀에게는 그 반대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욕망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도, 정당성도 없었다. 이 불평 많은 루이 필리프 시대 같은 프랑스에서, 그녀는 뜨겁고도 격렬한 피에 이끌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도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P136

어떤 비겁들은 미신에 빠지기 십상이다. - P138

루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빠르게 스 쳤다. ‘저 봐, 나 없이도 웃고 있네.‘ 그럼에도 그녀는 기쁨에 찬 동작으로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루실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웃음을 돌려주지 않은 채 짧은 목례를 보이고는 돌아섰다. 일순, 불빛이 휘황하고 수목이 우거진 프레카틀랑이 음산해졌다. 돌연 사람들의 경박함이며 지적 빈곤함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고, 이 장소, 이 세계, 그녀 자신의 삶이 절망적으로 권태로워졌다. 앙투안이 없다면, 그의 금빛 눈과 그의 방과 일주일에 세 번씩 그의 품에 안겨서 보냈던 몇 시간의 진실이 없다면, 즐겁다고 할 수 있을 이 소란하고 혼란스런 세계를 이루는 각각의 디테일들은 실력 없는 실내 디자이너의 치졸한 창작품에 불과해지리라. 클레르 상트레는 추해 보였고, 조니는 우스꽝스러웠으며, 디안은 반송장 같았다. - P138

루실은 생각했다. ‘다들 개야. 개들. 할 수만 있다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갈가리 물어뜯을 거라고.‘ - P140

이곳의 모두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들의 작은 비밀을 은폐하고 키워가고 보호하기 위해서, 상상력으로 넘쳐났다. 오직 그, 앙투안을 제외한 모두가. - P145

그가 그녀를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사실이 아닐까? 그녀는 샤를에게 얹혀살고 있었고 그가 제공하는 선물에 무감하지 않았다. 선물의 가격보다는 의도에 더 감동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선물을 수락했다. 그녀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능력이 되고 거기에 존경까지 하는 남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 만큼, 그것이 부인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앙투안은 엄청난 해석의 오류를 범했다. 그는 그녀가 그것 때문에 샤를을 떠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샤를을 포기하지 못한 거라고. 그는 그녀가 그런 계산이 가능한 여자라고 믿었고, 그녀를 평가 했으며, 틀림없이 경멸했다. 그녀는 질투심이 거의 필연적으로 저속한 추론을, 행동을, 판단을 이끌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 P147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수천 번이나 알려지고 확인된 통념이었다. 그녀는 여성주의 철학에 빠진 기분이었다. 짜증스러웠다. ‘내가 디안과의 관계에 대해 물은 적 있어? 난 질투하지 않아. 그런 내가 괴물일까? 그래, 만일 내가 괴물이라면 그걸 내가 어떻게 바꾸겠어? 아무것도 못 바꿔.‘ 하지만 그녀가 바뀌지 않는다면 앙투안을 잃을 터였다. 이 생각이 그녀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 P149

가끔씩, 뜻하지 않았던 잠시 잠깐에, 절망적으로 사지를 부들거리기를 멈추었을 때, 태양의 열기와 바닷물의 차가움과 모래의 부드러움을 느끼기를 잊었을 때, 앙투안과의 추 억이 그녀에게 돌처럼 쿵, 하고 떨어져 내렸고,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힌 듯 해변에 누워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벌린 채, 하지만 손바닥에 못 박히는 대신 심장에 날카로운 기억의 투창이 꽂혀서 행복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심장이 뒤집히고, 텅 비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비어버리는 동시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에. - P151

여기서 그와 함께 수영하고, 바닷물이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줄 그의 젖은 금발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리라. 파도 사이에서 그에게 키스하고, 여기서 멀지 않은 아직은 한적한 방갈로들 뒤의 모래언덕에서 그를 사랑하고, 저녁엔 그와 꼼짝도 하지 않고서 분홍빛으로 물드는 지붕 위로 날아드는 비둘기들을 바라볼 수도 있었으리라. 시간이 그저 죽여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 애지중지하고 아끼고 지나가지 못하게 할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 P152

그녀는 앙투안을 그의 젊음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금발이어서 사랑하고 청교도적이어서 사랑하는 것처럼, 그여서 사랑했다. 그가 관능적이어서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서 사랑하고, 아마도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 P153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그녀와 태양 과 안락한 삶과 심지어 사는 맛 사이에 장벽처럼 놓였다. 사실 그녀는 부끄러웠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 P154

‘이제 나는 대가를 치르는구나‘ 루실은 혐오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생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나, 당대의 사회적, 도덕적 금기는 그녀를 잠식해버렸다. 다른 이들은 천 번도 더 직시했으나 그녀는 부끄러운 병이라도 되는 양 늘 조금은 물러서있었건만.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근심이 깊어졌고, 그런 만큼 혐오감도 깊었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병을 얻었다. 이 고통은 어떤 달콤함도 끼어들지 못하는 고통이었고, 가장 불쾌한 방식의 고통 중 하나였다. - P154

그는 새벽 3시에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공기에 술이 깨어 정신은 말짱했다. 한마디로 그는 젊은 남자였다. 이따금 불행 또한 희열감이 가져다주는 것과 유사한 힘과, 활력과, 일종의 열의를 북돋는다. - P157

그는 그녀가 2년간 고집스레 유지한 이미지에 익숙했고, 다른 사람을 바라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순간, 침대에 똑바로 앉아 여명을 받으며 꼿꼿이 유지하고 있는 이 자존심, 그녀가 잠시 존재를 잊었던 사교적 인물로서의 그녀 안에 내재된 이 자존심이야말로 이제부터 그녀의 가장 가깝고도 친근하고도 소중한 지원군이 될 터였다. 문득 30여 년간 단련한 승마 덕분에 버스 밑을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걸 발견한 타고난 기수처럼,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자존심이 자신을 구하는 것을 목도했다. 무시되었거나 잘못 사용되었던 이 정신적 자산은 최악의 상황을, 다시 말해 앙투안이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차단했다. - P165

어떤 희망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희망을 가질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억이란 루실의 쾌락과 그 자신의 쾌락이었으나, 그마저도 그를 안도하게 하기보다는 번민하게 했다. 상대방이 느끼는 쾌락의 강렬함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강렬함을 다른 이에게서도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느낀 적이 없었던 경우에는 더더욱.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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