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회하려는 마음이 꾸준히 하는 사람의 동기이다. 물론 다시 한다고 더 좋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 좋아졌다고 해서 만족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보장이 다시, 더, 계속하기의 동력이 아니라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 동력이다. - P236

우리는 문장으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어떤 문장으로도 잘 표현되지 않는다. 세상은 요란하고 빠르고 오묘해서 납작하고 느리고 순진한 문자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가장 정확한 한 단어, 딱 들어맞는 하나의 표현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표현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플로베르가 심어주었다. 그는 어떤 사물과 개념을 가리키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그 단어를 찾는 것이 글쓰는 이의 일인데, 그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반복과 되풀이, 심지어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문장을 붙여 쓰고 이어 쓰는 사람은 그 하나의 단어, 하나밖에 없는 맞춤한 표현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이다. - P237

원한을 가진 사람은,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을 때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만회는 외부와 타인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하는 것이다. 만회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의 족함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향해 더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외부가, 다른 사람이, 누군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바깥 세계가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벌충하기 위해 다시, 더 시도할 리 없다. 다만 투덜거릴 것이다. 만회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꾸준할 수 없다. - P239

불만은 자기가 얻은 결실이 자기가 기울인 노력에 비해 충분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얻은 결실과 자기 것을 비교할 때 생긴다. 자기보다 덜 일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대접을 받거나 자기와 똑같이 일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될 때 생긴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결실을 얻었는지,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모를 때는 생기지 않던 불만이 다른 사람이 얻은 결실, 받은 혜택을 알게 되는 순간 생긴다. 비교하는 순간 생긴다. 이 사람에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길 리 없다. - P242

원한과 자기만족은 손바닥의 안과 박처럼 붙어 있다. 붙어 있되 정반대 쪽에 있다.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원한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받는 과도한 평가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자기만족이다. 원한은 밖을 향하고 자기만족은 안을 향한다. 불만족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때 원한이 생기고, 족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을 때 자기만족에 빠진다. 원한이 다시, 더 시도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자기만족 역시 다시, 더 시도하려는 마음을 빼앗는다. - P242

카뮈는 스물두 살에 쓴 『안과 겉』의 재판을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냈다. 그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다. 그는 젊을 때 쓴 그 책이 ‘서툴고 미숙하기 때문에‘ 다시 출판하지 않으려 했다고 서문에서 고백했다. 그가 쓴 것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이 그 책에 실려 있다는 한 철학자의 주장을 카뮈는 반박한다.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천재가 아닌 한, 스물두 살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겨우 알까 말까 하는 법이니 말이다." 카뮈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아마 이 말은 진실일 것이다. 스물두 살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나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터져나오기도 하는 법이다. 때로는 기교가, ‘어떻게‘에 대한 앎이 진실을 가리기도 하는 법이다. - P243

보상은 대부분 뜻밖의 사건이다. 뜻 안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큰 보상이라도 마땅하거나 미흡하다. 뜻 밖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작은 보상이라도 과분하거나 놀랍다. - P247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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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철조망을 통과하는 요령에 ‘밑으로 통과‘와 ‘위로 통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회‘ 역시 철조망 통과 요령 가운데 하나라는 걸 훈련병 시절 조교로부터 배웠다. 우회는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통과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통과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다. 참여가 아니라 외면하기 위해 읽은 책들이 세상, 개인의 남루함과 비루함을 폭로하는 데 열심인 것만 같은 이 무정한 세상의 환한 빛을 상대할 힘을 제공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런 식의 의외의 효과가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피했는데 만나거나,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한 셈이 되거나, 이쪽을 향해 걸었는데 저쪽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일. 유해하지 않은 부작용도 있는 것이다. - P210

한 개인은 세계 속에 놓인다. 세계는 개인의 삶에 침투하고 간섭하고 반사하고 굴절하고 회절한다.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의 경향과 정도에 의해 개인의 고유한 삶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이야기라고 한다. 개인은 이 세계의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에 맞서 싸우며 자기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러려고 한다. - P213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에 인간이 이처럼 취약하다. 이 부자유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이 비참함은 역설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이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 부자유를 선택한다.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능력, 거짓말할 수 있는 자유가 부자유의 원인이 되었다. "나의 죄는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 P215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이기를 원한다. 모든 유혹의 핵심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거니와 특히 이런 유혹에 취약한 시기가 있다. - P216

금지되지 않은 것을 범할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금지된 것이 욕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욕망하게 한다. - P218

르네 지라르의 모방이론으로 창세기의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리에서 장미셸 우구를리앙은 신의 소유(‘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아니라 신의 존재(‘신처럼 될 것이다‘)에 대한 모방으로 넘어가도록 하와의 심리 변화를 이끌어낸 뱀의 계략이 성공한 거라고 설명한다. (『욕망의 탄생』) 신의 소유를 욕심낸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흔들린 것이다. 인간은 신처럼 되고 싶어졌다. 비범함에 대한 유혹이 저 근원의 시간, 최초의 인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P220

우리는 왜 비범함을 동경하는 걸까. 우리 안에 그 가능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때로는 외부의 자극이 절대적인 것 같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거나 저런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런 존재나 저런 존재가, 가능성의 형태로 들어 있지 않다면,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거나 저런 존재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자극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이다. 어떤 큰 자극도 자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처럼 낯선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 P221

비범함은 비범하지 않은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힌다. 비범해지라고 유혹하고 비범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도록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쪽을 택하려 한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쪽으로, 알 속에 고착하는 쪽으로, 타성과 고정관념에 순응하는 쪽으로 몸을 웅크린다. 알 속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 그 속은 복잡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다.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시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평온하다. 쓰라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 갈등도 없고 사유도 없다. 그래서 ‘모든 힘을 다해 깨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 P225

가능성이 평가의 기준이 될 때도 그 평가는 해온 일로부터 산출된다. 창작자에게 평가는 불가피하고, 평가의 기준은 평가하는 이의 내부에 있을 터이니 창작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작가다‘라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 선언이 곧바로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언은 자기 다짐에 가깝지만, 평가는 해온 일에 대한 규정에 다름 아니다. 그 배경이나 요인은 평가자의 것이다. 선언이 평가와 어긋날 수 있는 것처럼 평가 역시 선언과 어긋날 수 있다. 평가의 배경이나 요인이 다르니 평가와 평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 P229

200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사무원처럼‘ 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를 시인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신이 자기에게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신이 자기를 통해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아주 꼼꼼히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이 바로 산문(소설) 쓰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고, 소설가는 신이 자기를 통해 할말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쓰는 자이다. 시인은 영감의 사람이고, 소설가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어도 될 것이다. 일하듯 쓰는 사람이 소설가 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아니,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이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언어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소설가를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문제삼은 ‘문학‘은 소설(산문)이지 시가 아니었다. 시는 문학이 아니라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는 자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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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이다. ‘보여줄‘ 것을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땅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 P185

그런 소설이 있다.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 않거나,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 독자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독자 역시 고립되어 있지 않고 감정의 진공상태에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독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시 짓는 것이다.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끝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이미 있는 이야기는 바꿀 수 없지만, 그건 권한 밖이지만, 다르게 다시 하는 건 할 수 있다. 그걸 막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 P190

독자는 변덕이 권한이고 속성인 왕과 같다. 독자는 독자의 자리, 그 권능의 자리를 버리지 않는 한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바꿀 수는 없지만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말도 안 된다고 호통칠 수는 있다. 기꺼이 듣다가 어느 순간 지루해하고 짜증 낼 수는 있다. 설령 그로 인해 그 이야기꾼/작가가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 권능을 가진 왕/독자의 변덕을 막을 수 없다. 탓할 수 없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왕에게는, 변덕을 부리지 않는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작가에게 보 장된 것은 순전히 자의적,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할 권리이고, 왕/독자에게 보장된 것은 이야기를 듣거나 듣지 않을 권리이다. 왕/독자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이야기꾼/작가의 이야기를 바꾸거나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이야기꾼/작가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왕/독자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 P195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를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데(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 P200

사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자기들의 확신을 보장 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을 때만 중요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혹은 자기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여,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은 사실은 부정한다. 말하자면 확신에 의해 사실이 비틀어진다. 확신은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고 창작하기도 한다. 희망, 혹은 증오, 혹은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가 덧붙거나 떨어져나간다. 거대한 초록이 사라지고 눈꼽 만한 회색 얼룩이 도드라진다. - P200

폴 틸리히는 불편함이 ‘회피‘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당신이 진리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심오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흔들리는 터전』) 익숙한 방에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편한 일이다. 익숙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방의 공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 방 안의 공기가 편한 것은 자신이나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호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방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이다. - P201

역주행은 위험하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것은 역주행을 하면서도 자기가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거꾸로 가면서 바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역주행 가능성을 아예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깜짝 놀라 후진해서 돌아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차서 바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 P202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 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 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 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 P203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의심해 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4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본회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나를 따르라』) 어떤 선한 뜻도, 그것이 설령 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 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광신자가 된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 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은 사실을 묻지 않고 성찰도 의심도 하지 않는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신념이다. - P205

광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데, 그것은 광신자들이 저항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항을 염두에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른 힘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이들, 다른 길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이길 힘은 없다. 이념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항상 더 강하고 투철하다. - P206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 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 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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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목욕탕, 우동집, 중국집, 떡 가게, 채소 가게, 빵집, 이발소, 미용실, 문방구, 과자 가게, 오코노미야키 가게, 찻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있어 편리했다. 지나가는 말로도 절대 고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본인과 한국조선인이 공존하던 동네였다. 나는 그 거리에서 당당하게 본명을 쓰고 어머니가 직접 만든 치마저고리를 평상복으로 입고 다녔다. 밖에서도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어머니! 아버지! 오빠!‘를 불러대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곧잘 "조선인인 영희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네가 나쁜 게 아냐. 언제나 당당하게 굴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려면 예의 바르게 인사 똑바로 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다녀야지. 어머니가 늘 블라우스랑 양말을 새하얗게 빨고, 손수건은 다림질하는 이유가 다 그래서란다. 조선인은 더럽다, 그런 소리 들으면 안 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P19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보고 마치 자신의 부모를 보는 것 같다고 해서 적잖이 놀랐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민 1세의 고생을 보고 자란 2세, 3세의 연대감을 느꼈다.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생활의 기반을 다지며 권리를 쟁취해온 이민 1세들의 모습을, 2세들은 알고 있다. 식민지지배나 전쟁, 내전, 독재 체제를 경험한 세대에게 지배자, 침략자, 적, 원수였던 나라의 인간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터이다. 개인의 연애와 결혼에 국가 간 문제를 적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부모와 조부모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고, 우리 부모도 그랬다고 관객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 P26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

오빠들과의 추억이 서린 집이라고 하기에는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너무도 짧아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가슴에 박힐 만큼 소중한 기억이 됐다. 조총련 커뮤니티에서는 ‘영광의 귀국‘을 한 오빠들을 칭송하며 남은 가족들의 상실감을 ‘명예‘로 메울 것을 강요했다. 어린 마음에도 오빠들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외로움을 견뎠다. 주변 어른들은 ‘민족 차별이 만연하는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차별 없는 조국에서 고생하는 게 낫다. 5년쯤 지나면 조국 통일이 이루어지고 남북도 일본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며 꿈같은 소리를 했다. 당시에 그런 말은 확실히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재일코리안을 둘러싼 일본 상황 역시 악몽 같았다. - P48

가족과 마주하기. 딸이라는 역할에 갇힌 상태에서 이 소박하고도 장대한 과업에 임하기란 심히 어려웠다. 캠코더라는 장치의 힘을 빌려 속내를 숨긴 관찰자, 인터뷰어, 감독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발을 내디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찍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어디서 왔는지 파헤치는 행위다. 고통을 수반하는 딸의 행위에 한 번도 그만두라는 말 없이 렌즈를 받아들이는 데 얼마큼의 각오가 필요했을까.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내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게 되기까지 이런 작은 역사가 존재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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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두렵다: 다음 순간은 미지의 것이기에 나를 완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다음 순간을, 그걸 만드는 건 나일까? 아니면 그것 자신일까?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통해 함께 그것을 만든다. 투우장에 선 투우사의 솜씨로. - P11

황홀경 속에서 반짝이는 것, 기쁨, 기쁨은 시간의 성분이고 순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순간 속에 순간의 있음이 있다. 나의 있음을 붙잡고 싶다. - P12

내 주제는 ‘순간‘일까? 내 인생의 주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나는 무수한 시간을 흘러가는 순간들의 수만큼 나눈다. 나 자신처럼, 혹은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찰나들처럼 조각내는 것이다—나는 오직 시간과 함께 태어나고 시간과 더불어 성장하는 삶만을 다짐한다: 나는 오직 시간 그 자체 속에서만 충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다. - P12

나는 둥글고 돌돌 말리고 따뜻한 것, 그러나 가끔은 새로운 순간들처럼, 늘 떨리는 시냇물처럼 차가운 것을 쓰고 있다. 내가 이 캔버스에 그려 놓은 것을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소리 없는 말이 음악의 소리에서 암시를 얻을 때처럼. - P13

내가 어떻게 음악을 듣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전축에 가만히 손을 올려 놓으면 손이 진동하면서 온몸으로 파동을 보낸다: 그렇게 나는 진동이 품은 전기電氣를, 현실이라는 영역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토대를, 내 손 안에서 떨리는 세상을 듣는다. - P14

내가 ‘나‘라고 말하는 건 감히 ‘당신‘이나 ‘우리‘ 혹은 ‘누군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허해지라고 강요 당한 나는 나 자신을 개인으로,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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