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이다. ‘보여줄‘ 것을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땅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 P185
그런 소설이 있다.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 않거나,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 독자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독자 역시 고립되어 있지 않고 감정의 진공상태에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독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시 짓는 것이다.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끝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이미 있는 이야기는 바꿀 수 없지만, 그건 권한 밖이지만, 다르게 다시 하는 건 할 수 있다. 그걸 막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 P190
독자는 변덕이 권한이고 속성인 왕과 같다. 독자는 독자의 자리, 그 권능의 자리를 버리지 않는 한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바꿀 수는 없지만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말도 안 된다고 호통칠 수는 있다. 기꺼이 듣다가 어느 순간 지루해하고 짜증 낼 수는 있다. 설령 그로 인해 그 이야기꾼/작가가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 권능을 가진 왕/독자의 변덕을 막을 수 없다. 탓할 수 없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왕에게는, 변덕을 부리지 않는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작가에게 보 장된 것은 순전히 자의적,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할 권리이고, 왕/독자에게 보장된 것은 이야기를 듣거나 듣지 않을 권리이다. 왕/독자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이야기꾼/작가의 이야기를 바꾸거나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이야기꾼/작가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왕/독자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 P195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를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데(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 P200
사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자기들의 확신을 보장 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을 때만 중요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혹은 자기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여,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은 사실은 부정한다. 말하자면 확신에 의해 사실이 비틀어진다. 확신은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고 창작하기도 한다. 희망, 혹은 증오, 혹은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가 덧붙거나 떨어져나간다. 거대한 초록이 사라지고 눈꼽 만한 회색 얼룩이 도드라진다. - P200
폴 틸리히는 불편함이 ‘회피‘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당신이 진리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심오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흔들리는 터전』) 익숙한 방에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편한 일이다. 익숙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방의 공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 방 안의 공기가 편한 것은 자신이나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호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방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이다. - P201
역주행은 위험하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것은 역주행을 하면서도 자기가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거꾸로 가면서 바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역주행 가능성을 아예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깜짝 놀라 후진해서 돌아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차서 바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 P202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 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 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 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 P203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의심해 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4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본회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나를 따르라』) 어떤 선한 뜻도, 그것이 설령 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 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광신자가 된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 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은 사실을 묻지 않고 성찰도 의심도 하지 않는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신념이다. - P205
광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데, 그것은 광신자들이 저항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항을 염두에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른 힘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이들, 다른 길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이길 힘은 없다. 이념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항상 더 강하고 투철하다. - P206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 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 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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