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실은 입사한 지 여드레째부터 편집회의에 참여했다. 우민정책 차원에서 1층과 자료실의 개미들도 참여시키는, 진정한 벌들의 회의였다. 벌들이 이미 거론되고 또 거론된 아이디어들을 반추하며 붕붕거렸다. 루실은 두 시간 동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제롬의 라이벌의 판매부수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전반적인 지향점 속에서, 아첨과 오만과 근엄함과 치졸이 현란하게 뒤섞이며 가속화되는 이 인간희극을 목도했다. 그중 오직 세 남자만이 어리석은 말을 내뱉지 않았다. 첫 번째 남자는 시종일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남자는 국장이었기 때문이며, 세 번째 남자는 그나마 가장 똑똑해 보였기 때문이다. 루실은 앙투안에게 이 회의를 영웅서사시로 부풀려 들려주었고, 앙투안은 한참을 낄낄거리고 나서, 그녀가 과장하는 경향이 있고 모든 걸 나쁘게만 본다고 지적했다. - P209
그녀는 저녁 6시나 때로는 8시엔, 헛되이 택시를 잡다가 결국 포기하고서 지하철을 탔고, 자리다툼 따위는 혐오했던지라 집에 가는 내내 서있기 일쑤였다. 같은 열차 칸에 탄 사람들의 지치고 근심어리고 넋 나간 얼굴을 볼 때면 분노로 울컥 했는데 그들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한테는 그 모든 것이 곧 깨어날 한낱 악몽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 P210
루실은 칵테일을 두 잔재 주문하고는 검토할 서류를 펼쳐 들었으나, 2분 남짓 훑다가 하품을 하면서 서류를 덮어버렸다. 서류에 세 줄 정도 기사를 덧붙여봐도 좋고, 데스크의 마음에 들면 발행될 수도 있다는 언질을 들은 터였는데도 말이다.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하물며 잠시 뒤에 다시 그 잿빛 사무실로 들어가 사유하는 자, 혹은 실천하는 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활동적인 젊은 여성의 역할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형편없는 연기였고, 형편없는 연극이었다. 혹여 앙투안이 옳았고 그녀가 공연 중인 이 연극이 적절하고 유용한 것이라면, 그녀의 역할이 형편없거나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인 역할이리라. 앙투안이 틀렸다. 루실은 이제 칵테일의 강렬한 빛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때로 알코올은 가차없고 결정적인 투광기가 되기도 하는데, 이 투광기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기 위해 매일 자신에게 했던 수천 가지 거짓말들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불행했고, 그것은 부당했다. 스스로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엄습해왔다. - P211
그렇게 종업원은 그녀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고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에게 "안녕하세요", "갈게요" 같은 인사말만 겨우 던지던 그녀를 누군가 좋아해주었던 것이다. 순간 루실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알코올은 사람을 냉철하게 만드는 만큼 감상적으로도 만든다는 걸 잊었다. - P212
루실은 샌드위치를 주문한 뒤, 오전에 앙투안에게 빌린 책을 가만히 펼쳤다.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였다. 운명이 그녀를 속히 해리의 독백으로 이끌었다.
···체면. 모든 책임이 이 체면에 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무위야말로 우리의 모든 미덕과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자질 – 명상, 한결같은 기분 유지, 게으름, 활발한 정신적, 육체적 소화력 – 을 드러낸다는 걸. 먹기, 배설하기, 육체관계 맺기,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숨쉬기, 살아있기, 그것을 인지하기. 이보다 더 나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 P212
이래저래 그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하 기보다는 앙투안에게 거짓말하는 편을 택했다. 루실은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보름을 보냈다. 파리와 게으름과 이 게으름을 남용하는 데 필수적인 돈을 되찾았다. 그녀는 늘 이끌던 삶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번엔 몰래. 마치 수업을 빼먹는 기분으로 그녀의 가장 단순한 기쁨은 배가 되었다. - P214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만큼 거짓말을 지어냈고, 그런 만큼 행복했으며, 이 행복을 그와 공유하고 싶었다. […] 하지만 이 위협은 루실의 현재의 나날에 외려 돌발적인 맛을 제공 했다. 그녀는 앙투안의 넥타이며 예술 서적이며 음반을 구입했고, 앙투안에게는 가불을 받았다거나 원고료든 다른 무엇이든 받았다고 둘러댔다. 그녀는 명랑했고, 앙투안은 그녀의 명랑함에 휩쓸렸다. 목걸이 가격으로 그녀에겐 두 달이 보장되었다. 게으르고 호사스럽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두 달, 두 달간의 행복이. - P215
청소년에게, 타인들과 미래와 종종 자기 자신에게 저지르는 오래되고 은근한 거짓말보다 더 멋진 기억이 무엇이겠는가? 루실은 필시 재앙이 될 미래, 앙투안의 분노를 유발하고, 신뢰를 잃고, 그 둘 모두 그녀가 그가 제안한 이 정상적이고 안정적이며 비교적 쉬운 이 삶을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서, 스스로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잠정적으로 숨기는 것이 이 상황을 만회하려는 의지를 의미하는 건 전혀 아니라는 걸 정확히 인식했다. 그녀 안에는 끔찍하리만치 확고한 무엇이 있었으나, 그녀도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 P216
무기력한 사람들의 분노에는 끈질기고 고통스러운 데가 있었다. 희생자보다 사형집행인이 더 고통스러운. - P220
많은 사람들이 다 듣지 않고 암시만으로 이해한 것을 잊지만, 완전한 침묵은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부조리한 걸 의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잊는다. - P227
그녀는 오직 앙투안만을, 행복하고 금발이고 황금색 눈빛이고 자유롭게 그녀를 떠날 수 있는 앙투안만을 원했다. 이것은 아마 그녀가 유일하게 정직한 부분일 터였다. 모든 책임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 - P226
그들은 싸늘했고, 서로에게 몸이 닿는 걸 피했다. 이 넓은 침대에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기분이었다. 고독한 저녁 시간, 궁핍한 경제 사정,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보였다. 화염의 바다 속에서 원자폭탄이 발사되는 것이 보였다. 힘겹고 적대적인 미래가 보였고, 서로가 없는 삶이, 사랑 없는 삶이 보였다. - P236
"태양, 해변, 한가로움, 자유··· 이게 우리가 누릴 것들이야, 앙투안.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그게 우리의 정신에, 피부에 뿌리 박힌 걸. 어쩌면 우린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은 척할 때, 더 타락했다는 기분을 느껴." - P239
루실은 누군가 그녀에게, 그녀의 색깔에 대해, 나아가 외모에 대해 말해준 것이 실로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앙투안은 분명 자신의 욕망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리라고 믿었으리라. 어쨌든 마주 앉은 이 성숙한 남자가 그녀를 당장 이룰 수 있는 욕망으로서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대상으로서 응시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 P246
그들은 저녁 8시 30분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가 집에서"라고 장소를 말했을 때, 루실은 푸아티에 가의 원룸은 단 한순간이라도 떠올리지 않았다. 푸아티에 가에 있는 건 방이었다. 그건 집이 아니었고, 집이었던 적도 없었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 뒤얽힌 천국이었을지라도. - P248
루이즈 웨르마가 하프에서 조용히 뽑아내는 첫 소절에 루실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음악은 점점 더 애잔해질 터였다. 루실은 그걸 알았다. 점점 더 애절해질 것이고, 점점 더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는 걸. 행복하고 싶고 친절하고 싶었는데, 두 남자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더는 알 수 없었던 사람에게는 비인간적인 음악이었다. 노부인은 이제 더는 미소를 짓지 않았고, 하프 소리는 극도로 잔인해져서 루실은 그만 손을 뻗쳐 잡히는 사람의, 다시 말해 샤를의 손을 덥석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손, 이 온기는 물론 일시적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였고 이 살과의 접촉, 이것만이 그녀와 죽음 사이에, 그녀와 고독 사이에, 그녀와 저쪽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놓인 전부였다. - P251
이제 밤에 그들이 벌이는 건 사랑의 행위라기보다는 투쟁이었다. 상대의 쾌락을 연장하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참고해왔던 학문은 점차로 보다 빨리 끝내기 위한 노골적 인 기술이 되어버렸다. 권태가 아닌 두려움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신음에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그들은 예전엔 경탄이 먼저였다는 것을 잊었다. - P253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것도 그렇게 자유로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서로를 결정적으로 상처 입히지 않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 P254
그녀는 자신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삶으로부터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박탈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P2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