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별로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데, 머리카락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머리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목 뒷부분에 장식을 단 머리카락은 갈색도 아니고 실제로 검은색도 아니지만, 햇볕에 내건 지 오래되어 빛이 바랜 깃발처럼 거무스레하고 때로는 잿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녀는 몸놀림이 느리다. 천천히 움직이지 않으면 콧등에 작은 땀방울이 솟는다. 소녀는 자기 키가 너무 커버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목을 움츠린다. 마치 자기 내면에서 들끓는 어떤 큰 힘을 그런 식으로라도 억제해야 할 것처럼 몸을 숙인다. - P9

모두들 아이들을 보러 오지만, 그렇게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는 아이들도 많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 불결하거나, 너무 키가 크고 거칠어서 거절당할 일도 없다. 그런 아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선택을 위해 짜놓은 그물망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녀도 이런 아이들에게 속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눈에 띄지 않는 소녀의 특징은 어쩐지 어떤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의 전체 모습은 걷는 모습까지 너무나 위축되어 있기 때문에 소녀의 손을 잡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헛짚기 십상이다. - P10

부모들이나 부모가 되려는 사람들이 운동장에 시선을 박고 자신의 자식들 또는 자식으로 삼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관찰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소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소녀가 그들의 시선을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남루한 부모들이나 우는 부모, 그리고 다른 부모들 중 어느 누구도, 그리고 부모가 되려는 낯선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소녀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소녀가 생각했던 대로다. 다른 사람들은 감옥이나 강제수용소, 정신병원 또는 군대처럼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을 탈출하려고 노력하지만 소녀는 정반대로 그처럼 울타리 쳐진 곳 가운데 하나인 아동 복지원 안으로 침입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소녀를 문밖으로 끌어내 세상 밖으로 다시 내칠 생각을 할 가능성은 없다. - P11

제일 낮은 위치야말로 제일 안전한 위치, 말하자면 어떤 요구라도 배겨낼 수 있는 바로 그런 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녀는 손에 묻은 더러운 흙을 닦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며 좀 더 흐느끼면서 더러워진 손톱을 다시 물어뜯기 시작한다. - P12

발가벗은 소녀는 나무토막을 닮아 보인다. 소녀는 몸을 펴고 샤워대 밑으로 들어가서 몸을 씻기 시작한다. 마침내 온몸을 뒤덮고 있는 때를 씻어낼 수 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한 사람의 몸에 쌓인 때를. - P15

이제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옷을 지급받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깨끗해진 것에 매혹된 상태가 되어 거울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새로운 삶 속의 자기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새 삶을 시작하는 자기 얼굴이 달라졌는지 어떤지를. 그러나 소녀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자 화장실이든 복도든 복지원 어디에도 거울은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침내 소녀는 죄라도 짓는 듯한 기분이 들어 될수록 넌지시 거울 있는 곳을 물어볼 것이고, 그때 허영은 칠거지악의 하나에요, 귀부인,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이 대답 속에 들어 있는 비난은 거울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거울이 어디 있느냐고 묻게 만드는 이유의 본질에 대해서 여자 사감이 깜깜무소식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래도 그러한 대꾸는 울타리로 둘러쳐진 이 복지원에 속속들이 스며 있는 원칙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소녀는 그런 원칙의 축조물을 바라봄으로써 빠지게 되는 상태보다 더 행복한 상태를 모른다. 그보다 더 밝고 더 아름다운 광경을 모른다. - P17

여학생들은 새로 들어온 학생이 세심하게 짜진 위계질서를 무너뜨릴 만큼 예쁘지는 않다고 한눈에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그 큰 덩치가 자리에 앉는 순간 마치 납 성분의 침전물처럼 질서의 바닥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학생들은 한 마리 걸려들었다고, 약간의 웃음거리로 삼을 만한 먹이가 입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고 기뻐했다. 자기 자리가 정해지자 같은 반 동급생들이 미소 지으며 침묵하는 것을 본 소녀는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정쩡한 태도가 8학년 중학생 학급에 자리를 얻기에 충분했다는 결론을 내려볼 용기를 가졌다. 그것도 제일 낮은 자리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소녀는 기쁨을 느꼈다. 이 순간 어디선가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제 옛날 생활은 물러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20

다른 아이들은 삶이 자신들에게 어떤 빚이 있는지를 안다. 삶은 자신들에게 자유라는 빚이 있고, 그 자유는 이 복지원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녀는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누군가를 밀어뜨릴 필요가 없다는 데 있음을 안다. - P27

소녀는 아무에게도 자기를 믿으라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의무를 지우지 않는데, 사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다. 자기 자신의 문장들이 뱃속에 든 한 무더기의 고철같이 느껴진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 있는 텍스트로 성장하지 못한다. 소녀는 이 문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몸 밖으로 뚫고 나올까 봐 가끔 자기 몸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 P39

체육 시간을 몇 번 겪으면서 소녀가 걱정스럽게 확인한 사실은 자기가 팀을 위해 바치는 선의의 의지만으로도 벌써 힘을 너무 소비하기 때문에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선의의 의지는 그 의지로써 도달해야 할 어떤 것과는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의의 의지가 족쇄처럼 몸에 달라붙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자기 팀에 수치가 되지 않으려는 선의의 의지, 아니 최선의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점점 느림보가 된다. 소녀는, 내가 아마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서 그럴 거야, 난 너무 조용히 걷고 있는지도 몰라, 하고 혼잣말을 한다. - P46

다른 아이들한테 그와 같은 무결점은 배반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쩐지 노예근성 같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예들 사이에서는 누군가 자유의지로 노예처럼 처신하는 자가 있을 때만큼 치명적인 게 없다. - P52

소녀가 가지런히 옷을 쌓아두는 이유는 뒤죽박죽인, 그리고 뒤죽박죽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모든 것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무질서는 적대적이고, 무질서는 이런 물건들로부터 시작한다. 물건들이 장롱 속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으니까 옷장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부패와 죽음과 혼란이다. 소녀는 그런 일을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적대적인 일들이 사방에서 밀려오건만 소녀는 옷을 가지런히 정돈함으로써 견뎌낸다. 그렇게 해서 소녀는 자기가 지켜야 할 질서보다 더 많은 것을 지켜 낸다. - P53

이런 상황은 소녀가 극히 사소한 부분이기는 해도 그 파괴적인 원칙의 한 귀퉁이를 지속적으로 빼냄으로써 질서와 무질서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게 한 다음부터 그랬다. 무질서와 질서의 동시성은 소녀의 생존으로부터 재앙을 걷어가 버렸다. 이젠 아무도 소녀를 건드리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아무도 소녀를 건드릴 수 없게 된 것이다. - P53

내 삶의 무게가 늘고 있어. 나는 내 위에 호화로운 궁전을 세우는 거야. 내 궁전은 짚으로 만들었지. 그 궁전은 한 개의 닭발 위에 서 있어. 닭은 내가 직접 잡았지. 천둥 번개 치는 날이면 아직도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내 궁전을 장식해. 궁전은 화려한 불을 뿜을 거야. - P56

병실만큼 세상이 저 멀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소는 없다. 그곳은 보호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세상이 아니면 어디로부터 보호를 받는단 말인가. - P58

여기는 신체 역학을 잘 아는 직원들이 있다. 소녀의 몸은 한 무더기의 살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몸은 비정상적으로, 아니, 적대적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왜, 어째서,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계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몸이 제멋대로 하는 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다. 감기 들거나 염증이 생겨서 통증이 와도 그렇고, 씻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나기 시작해도 어쩔 수 없다. 또 감기에 걸리거나 염증이 생기지도 않고, 더러운 냄새가 나지 않더라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그 몸집의 무게를 힘들게 짊어지고 다닐 수밖에 없다. 이런 소녀의 몸을 여기서는 별로 법석 떨지 않고 거의 완벽하게 적절히 다룬다. 그래서 소녀는 자기도 틀림없이 다른 아이들과 거의 똑같은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놓는다. 물론 예쁘게 생기지 않았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그야 순전히 외적인 결함이니까. 따라서 내면적으로는 소녀의 몸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덮친 질병도 결코 별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여기는 소녀의 몸을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몸과 똑같이 잘 알고 똑같이 적절히 다루는 전문가들이 있다. 언제나 동일한 메커니즘이 있을 뿐이니까. - P59

진찰받을 때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그 사람이 거대한 몸집을 가졌는지, 거칠거나 못생겼는지, 어리석은지 또는 아주 바보 같은지,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모든 징후가 아주 명백하게 감기를 암시하고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 행복한 직원들, 이 행복한 전문의들, 오직 그들만이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살아 있는 한 사람이 언제나 완전히 자기 자신만을 의지한 채, 도대체 그 목적도 모르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하는 큰 책임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이다. - P61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속에 사는 미세한 기생충들이 이제 멱살 잡힌다는 생각만 하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이 야비한 탐식의 전형들. 눈에 보이지 않고 우글거리는 더러운 것들, 그놈들이 이제 추격당한다. 깨물고 썩히고 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추격당하는 것이다. 소녀는 감기약으로 처방받은 알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나면 다른 할 일이 없다. 이제 뱃속에 살아 있는 놈들이 멱살 잡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냥 누워 있을 뿐이다. - P63

사람들은 우선 당당한 인상을 주는 외모를 보고 몸속도 당당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몸이 그렇게 불어난 것은 거대한 식욕을 가진 소녀의 몸이 과다하게 공급한 영양소들을 용도에 알맞게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몸은 안으로 들여보내는 모든 것들을 무턱대고 쌓아둔다는 인상을 받는다. 마치 이 몸은 유일하고 거대한 맹목적인 축적이라도 되는 듯, 잘못 전달된 인색한 선물이라도 다시 내놓지 않으려는 듯이 보인다. 처리 지침이 없는 자재 창고와 같다. 사람들은 소녀가 부패한 덩어리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살아 있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또한 어딘지 모르게 죽은 덩어리. - P67

앞서 말한 것처럼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리고, 게다가 가장 따뜻한 자리다. 그렇기는 해도 병이 나면 뭔가 싫은 것, 좀 괴로운 것은 있다. 그것은 병을 통해서 생기는 일상의 단절이며, 자주 병이 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되는 특수한 지위다. 소녀는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그토록 자주 병이 나는 것,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병이 나는 것에 대한 수치심,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괴로운 일들이 소녀한테는 더 본래적인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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