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무위에 지쳐 우울과 위기감을 느끼는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직장이 출판사나 의상실이나 신문사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바닥을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여자들은 줄을 섰다. 그런데 저 정신 나간 시레가 루실에게 일을 시키고 월급도 줄 기세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오직 무위뿐이었는데 말이다. 삶은 어리석었다. - P205
그는 남자들 특유의 아름다운 낙관으로, 루실이 한 달에 두 벌 정도의 원피스는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연히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들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몸매가 좋은 만큼 완벽하게 어울릴 게 분명했다. 또한 택시를 탈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도 만나고, 정치며 세상 전반에, 그리고 다른 것에 조금은 관심을 가질지도 몰랐다. 물론 퇴근했을 때 자기 소굴에서 웅크리고 있는 짐승 같은 그녀, 오직 독서와 사랑으로만 살아가는 그녀가 없는 것은 아쉽겠지만, 한편으로는 희미한 안도감이 느껴질 터였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현재만을 살며 미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정체된 삶에 경악하고, 나아가 어렴풋한 분노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그도 인테리어의 일부, 한 요소일 뿐이고, 언제든 상황이 변하면 필시, 가차없이 불태워질 것만 같았다고 할까. - P206
루실은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좋아한다고 믿는 것일까? 그녀는 이미 앙투안에게서 가학적인 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무고하고도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루실은 정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가 테이블 건너에서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충동적이고 다정했던지 루실은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와 볼을 맞댄 채 미소 지었고, 그들은 함께 그녀를 어처구니없어하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것에 안도했으나, 한편으로는 그에게 놀아난 것 같은 기분에 어렴풋한 원망을 품었다. - P207
앙투안에게 디올 드레스는 30만 프랑이고, 그녀는 지하철이라면 질색이며, 구내식당이라는 말만으로도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루실은 자신이 본질적이고 극단적인 속물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문득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돌아보자, 그에게 미소를 되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아이들처럼 주먹구구식 셈을 했고, 장관들처럼 예산을 짰다. 그는 흔히 남자들이 즐기듯 숫자놀음을 했다. 상관 없었다. 어쨌든 창안자가 앙투안인 이상, 그녀의 삶도 이 공상적인 등식에 맞춰야 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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