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의 임신 얘기,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군지에 관한 얘기, 몇 년 동안이나 둘이 내연 관계였다는 얘기, 아내만 불쌍하지, 그런데 정말 바보 아냐,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잖아, 이런 얘기를 이미 지칠 때까지 했고, 복습까지도 다 끝났으니 이제 모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해 천장만 바라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할 얘기가 없다는 건 다들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뜻이고 안뜰과 수영장과 마당까지 이미 집을 다 구경시킨 마당에, 피부와 머릿결과 샌들과 조카가 만들어줬다는 예쁜 목걸이와 훈제연어파이의 맛까지 칭찬하고 나면, 할 만한 얘기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 P173

누군가 그 침묵을 깨야 한다.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지속될 침묵이지만 마치 목구멍에 대양의 바닷물이라도 억지로 부어 넣은 것처럼 목이 꽉 막혀 답답하기만 하다. 말하면 안 될 것들, 모두가 그런 것을 갖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이 새어 나갈지 모른다. 게다가 침묵이 좋지 않은 이유는 생각할 여지를, 이렇게 오후에 함께 모여 여자 친구들끼리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썰고 토막 내는 일이라는 것, 그런 뒤 토막 낸 그를 자기 눈앞에 울타리를 쳐 가두고 그의 더러운 부분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바로 이 행위, 다음 희생자를 찾는 일은 수십 개의 문, 금속이나 호두나무 목재로 만든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문들 너머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정확히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집들의 거실에, 아마도 네 이야기를, 바로 너를 떠올리고 있는 다른 여자들이 있다. 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다른 여자들이 있다. - P173

나티비다드 코로소, 다른 이름으로는 코로 […] 가 마치 도마뱀붙이처럼 신중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온다. 그녀와 같은 몸집과 너비를 가진 여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걸음걸이다.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 이런 몸짓은 몇 년, 몇십 년에 걸친 집안일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데, 마치 옛날 중국 소녀들에게 작은 신발을 신겨 발의 성장을 막고 발을 망가뜨렸던 풍습인 전족처럼, 오랜 집안일이 그토록 이상한 변형을 일으켜 나티비다드 코로소 같은 정말 몸집이 큰 여자를 투명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 P174

코로가 나가자 모두가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이상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집 안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저렇게 새까만 흑인 여자가 일한다는 게? 냄새가 다르지는 않아? 흑인들은 우리랑 냄새가 다르잖아, 저 두건 쓰니까 진짜 사람 좋은 아주머니 같기는 하다, 제미마 아주머니랑 닮았어, 팬케이크에 뿌리는 시럽 브랜드 있지, 그 시럽 통에 그려진 흑인 아주머니 모델 있잖아, 그나저나 마리아 델 필라르는 요즘 사람이구나, 일하는 여자들이 액세서리 하는 것도 뭐라고 안 하고, 잘 어울리는걸 뭐, 이국적이잖아, 월급은 얼마 주니, 아이고 우리 집 일하는 여자한테 내가 더 주고 있잖아, 아, 나를 물로 본 거네? - P176

안뜰의 센서등이 깜빡이고 누군가 했던 얘기를 또 한다. 누구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자기네 집에서 일하는 여자 중 하나가 낮잠을 자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얼굴에 물을 한 컵 뿌렸는데도 그 여자가 잠을 깨기는커녕 돌아눕더니 5분만 더 자겠다고 했다는 이야기. 신경 쓰이네 저거, 센서등이 너무 민감한 거 아냐, 계속 깜빡거리잖아, 여기 벌레가 그렇게 많은가, 동물이 많은가, 쉴 새 없이 깜빡깜빡, 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아마 다들 저런 문제 겪어봤을걸, 끔찍하다니까. 등은 꺼졌다가 잠시 후 다시 켜진다. 일곱 번이나 반복되니 나가봐야 할 것이다. 칵테일의 취기와 예기치 않은 모험에 다들 배꼽을 쥐고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나가서 무엇 때문에 센서등이 자꾸 켜졌다 꺼졌다 하는지 보려고 한다. 마리아 델 필라르는 수영장에 뜬 낙엽을 건져내는 데 쓰는 뜰채를 집어 창을 쥐듯 거꾸로 잡는다.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통굽 샌들에, 새하얀 리넨 상하의를 세트로 갖춰 입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잔뜩 낀 채 뜰채를 무기처럼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사진을 찍는다. - P178

쫓던 무언가가 일하는 여자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들도 따라 들어간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냄새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낡은 동전의 냄새, 곰팡이 냄새, 낡은 가죽들이 쌓여 있는 가죽 공방 냄새, 습기를 머금은 열대 지방의 옷장 냄새, 그런 쉰내가 난다. 그 방은 정말 옷장이나 마찬가지다. 창문도 없고 크기도 딱 버스만 하다. […] 그들의 ‘투어‘에 여기까지 들어와보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흥분된 감정이 그들을 아이처럼 만들었고,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은 전에는 되어본 적 없는 존재가 되어보기로 한다. 타인이 되는 것. 서랍을 열어 코로의 옷, 나티비다드 코로소의 옷을 꺼내 자기 옷 위에 걸쳐 입고, 누군가는 베개를 바지 뒤쪽에 넣어 커진 새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또 다른 이는 빨간색 티셔츠를 집어 들더니 머리에 두건처럼 만들어 쓴다. 모두가 코로를 흉내 내며 사진을 찍는다. - P179

센서등은 조그마한 두 눈처럼 보이는 붉은 표시등과 함께 쉼 없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한다. 야자나무는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운다. 괴물들이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것만 같다.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클럽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고 이제 신나는 트로피컬 리듬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다. 모든 것들이 이 짓궂은 장난에 함께하는 듯 보인다. - P182

바깥에서는 여자들이 놀고 있다. 베로니카는 헤엄을 치려고 하지만 그들은 베로니카를 가두듯 에워싸고 있다. 수가 많아서 수영장의 귀퉁이마다 빠져나갈 틈 없이 지키고 서 있다. 자, 가자, 네 쪽으로 간다, 거기 조 심해, 놓치지 마. 센서등은 마치 취조실 불빛처럼 강력 한 힘을 가진 듯 느껴지고, 센서등이 그렇게 금속성 소리를 내며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첨벙첨벙 소리가 계속되는 와중에 베로니카의 신음, 이제 그만, 친구들아, 장난 아니야, 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 P183

누군가가 ‘깎아서 꽉 채워‘ 아래쪽에다 남자 성기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세 장의 안내문에 모두. 이 일을 할 때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생각을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일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 이 옥빛의 수영장 물이 깨끗해질 리 없다고 해도. 이 물이 티 없이 맑은 물이 되는 일은 절대로, 결코, 절대로, 없다. 돌아서면 벌써 귀뚜라미 한 마리가, 꽃 한 송이가, 담배꽁초 하나가, 종이 한 장이, 꿀벌 한 마리가 떨어져 있다. 가끔은 죽은 새도 있다. 항상 쌍으로 날아다니던 노란색 작은 새들 중 한 마리다. 죽은 한 마리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물 위에 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수영장 가에서 종종거린다. 자연은 불완전하다. - P188

금박의 호텔 로고가 박힌, 눈처럼 하얗고 올이 촘촘한 가운은 꼭 얼음물에서 막 몸을 헹구고 나온 북극곰의 모피 같고 그 품속 에서라면 모든 게 다 괜찮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 티 없이 깨끗한 욕실 안, 포근한 눈 같은 수건은 유칼립투스 향이 은은하게 나는 곰 인형 같고 욕조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처럼 보이며 아름답고 티 없이 맑고 반짝반짝한 표면만을 비추는 거울이 있는 그런 욕실 안에서라면, 세상의 종말을 생각 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한 냄새, 쾌적한 냄새만 나서 신경안정제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고, 발은 강아지 털 같은 카펫의 털 속에 잠겨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그 털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거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여행 가방은 바깥세상의 더러움을 끌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풀지 않았는데, 가방 안에는 속옷, 잠옷 바지, 책 몇 권, 그리고 반쯤 남은 땀 냄새 제거제와 컨실러와 선크림과 이런 저런 안티에이징 제품과 카카오버터 립밤과 바이브레이터가 든 비닐 파우치가 있다.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이 방엔 어울리는 자리가 없다. 핸드폰 충전기도 있는데, 저런 깨끗한 벽에 꽂으면 무슨 기다랗고 까만 내장처럼 징그러워 보일 것이다. 안 된다. 이곳은 신세계니까. 죄를 사하여 주는 곳. - P190

거울을 잠시 보다가 자기 얼굴이 비치는 곳을 손으로 가린다. 기계 태닝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얼굴에 얼룩이 생겼고 얼룩진 얼굴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걸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피부색이 진주조개 같았던 자신, 순수 설화석고에 조각한 것 같았던 자신의 얼굴을 분명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자신의 피부색은 당근색에 가까운 분홍색 마분지 색깔이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크게 들어 구역질이 난다. 빛나는 시절이 다 가고 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는 거지? 그렇게 고독함이 밀려온다. 예전에 아름다움은 언제나 곁을 지키는 동반자였다. 훼손할 수 없는 단단한 외피이자 애정을 보장 해주는 보증수표. 그 무엇도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아름답다는 것의 의미이다. 누구도 네게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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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켜진 초 근처로 다가갔을 때 둘은 남은 닭고기 조각들을 싸고 있는 껍질 같은 것이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바퀴벌레들은 마른 잎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식탁 위로 흩어져 달아났다. 둘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마르타는 이런 경우, 딱 이런 경우에만 집에 남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마리아는, 이미 의자 위에 올라가 치맛자락을 허리까지 뭉쳐 올리고 선 마리아는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하더니 아니라고, 바퀴벌레가 낫다고, 집에 남자 하나 있느니 세상 모든 바퀴벌레를 들이겠노라고 말했다. - P128

마르타에게 믿음이란 단어는 이미 혀 속에서 똥 맛이 났다. - P136

어느 날 남자는 죽었다. […] 그가 고독 속에서 단말마의 고통으로 신음하도록 두었다, 오빠가 뼈만 남아 앙상한 손을 그녀를 향해 뻗었음에도, 아마도 같이 가자는 듯이, 아니면 손을 잡아달라는 듯이. 그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손 위에 마치 작은 새가 날아와 앉듯 그녀의 살아 있는 손을 올려놓아 달라고, 땀을 닦아달라고, 다만 그의 이마 위에 눈물 몇 방울이라도 흘려달라고, 작은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눈물 두 방울만이라도, 죽음 저편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곳에 가져다 바칠 수 있게.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자들은 신음하고 몸부림치고 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했던 모든 말들이 다 거짓말일까 봐. 아니면 오히려 모두 진실일까 봐. - P138

테레사 여사의 운전기사가 와서 알리 아가씨를 일으키는 걸 도왔는데 그 남자가 등장하자 마치 악마라도 본 것처럼 광기 어린 발작을 일으켰어. 모두를 할퀴고 물어뜯고 울고불고 난리였지, 알리 아가씨가 그 남자를 보더니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꼭 공포에 질린 황소 같았어, 성난 백 킬로의 거구가 그렇게 날뛰니까 말이야. 결국 욕실로 데려 가기 위해 그녀를 묶어야만 했지. 운전기사가 돌아가고 나니까 그제야 알리 아가씨는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어, 우리도 그 이유를 알겠는데 왜 어머니면서, 테레사 여사는 그걸 모를까 몰라, 왜 항상 아가씨한테 올 때 남자를 데려오냐고. - P151

가라고. 문 좀 닫아줘요, 제발, 다시 못 들어오게. 문이란 문은 다 닫고 자물쇠를 채워요, 애들한테 못 가게 해요, 알리시타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요, 나는 다 보여, 나는 다 보여, 다 들려, 내가 다 안다고. 뭘 안다는 거예요, 아가씨? 뭐가 보여요? 갑자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 P155

어머니 테레사 여사가 오면 알리 아가씨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버렸고 가끔은 그 자세로 오후를 다 보내곤 했어. 여사님은 혼자 오면 심심할까 봐 그랬는지 친구들을 데려오곤 했어, 자기 딸이 사람들 오는 걸 싫어하는 게 분명했는데도 말이야. 아가씨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어, 마치 흰 천을 덮어놓은 시체처럼. 우리들은 쉬지 않고 커피를 내리고 물잔을 갖다 나르고 다이어트 콜라를 내가고 과자를 내가고 백화점에 있는 카페에 디저트를 주문했지. 테레사 여사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찾아와 수다나 떨고 남들 험담이나 하는 게 알리 아가씨에게 좋을 거라고 믿기라도 했나 봐. 그런데 우리가 가끔 아가씨 방에 들어가보면 말이야, 아가씨가 꼼짝도 안 하고 비참하게 누워만 있어, 마치 줄 묶인 짐승처럼. 또 어떤 때는 붕대를 감지 않은 얼굴 한쪽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지. 사모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어찌나 살 만하던지. - P157

알리 아가씨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고. 아가씨 어머니가 와서 같이 지냈는데 아가씨는 입을 닫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리랑만 있을 때에나 가끔 눈을 뜨고 알리시타의 안부를 물었어. 우리가 알리시타는 잘 지낸다고 하면 우리에게 딸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하곤 했지.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리곤 했는데 그러면 어머니가 우리에게 약을 먹이라고 시켰어. 어머니의 의사 친구가 약을 줬거든, 눈이 풀린 채 침만 질질 흘리게 만드는 약. 우리는 아가씨가 그냥 우는 것이 낫지 않나, 알리 아가씨는 평생 울어도 모자랄 만큼 울 일이 많아 보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머니 생각은 달랐는지 무슨 사탕 먹이듯 약을 먹였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아가씨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팠어, 괴물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 P160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 여자들은 오래전에 행동하기를 그만두었다. 험담은 마치 유령처럼 그들의 안방을 드나든다. - P167

그녀들은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하는데, 만약 볼 수 있다면, 만약 실제로 육신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새하얀 소파에 앉아 호화로운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 슈퍼마켓에서 만나면 애정을 담아 인사를 건네곤 하는 여자를,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남자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식들의 반 친구를 그렇게 뜯어 먹는 모습을 보고는 분명 혀를 자르게 될지 모른다, 아니 반드시 잘라야 할 것이고 그렇게 자르고 나서는 자른 혀를 카카오 말리듯 잘 말려 목에 걸고 다녀야 할 것이다. 썩어빠진 스스로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는 목걸이 장식. 하지만 모든 건 전과 다름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바로 그것이 모든 공포의 근원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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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생은 저기 있어야 해." 엄마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기만 했다. 왜냐하면 엄마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 P107

너는 안다, 아니 네가 아는 유일한 것은 그 없이 살 수는 없으리란 것이다. 네가 모르는 것,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너를 사랑했는가이다. 그건 한 번이라도 사랑 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너의 어머니는 야위고 헐벗은 코흘리개인 너를 두고 떠나갔으니까. 비에 젖은 짐승처럼 너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 대문 앞에 남겨졌다.
남자를 찾으러 가버린 거라고,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이 한쪽으로 입을 가리고 수군댔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하던 말은 곧, 한참 지나지도 않아 너에 대한 말이 되어, 꼭 끼는 옷처럼 너를 옥죄고 역병처럼 너를 전염시켰다. - P110

너는 역시 모른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그녀 자신으로부터 구하고 싶었던 건지를. 네가 물려받은 것, 축복처럼 보이기도 저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들로부터 구하려고 했는지를. - P110

그는 너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그는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를 청하더니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성스럽고도 섬세한 손길로 너의 상처 입고 더러운 발을 씻겨주었다. 너는 네가 왜 그때 그런 결심을 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는데, 아마도 살면서 누군가가 너에게 — 바로 너에게, 폭력이 낳은 아기이자 잔인함의 딸이며, 상처 입은 여자들의 밤이 키운 공주인 너에게 — 처음 해준 다정한 행동 때문이었겠지만, 너는 그 순간 그에게 네 인생을 바치겠다고,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뭐든, 그의 손에 묻은 진흙이 되는 일이든, 그의 것이 되는 일이든, 그의 노예가 되는 일이든. - P114

그의 앞에 있었던 건 너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너는 특별한 여자였다. 모든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여자.
그리고 분별력이 별로 없는 개조차 자신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사람을 충직하게 따르기 마련인데, 너라고 그가 가는 길이 다름 아닌 지옥이라 해도 그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가 사람들에게 한 약속들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불가능한 일까지도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너는 사랑에 감사하는 개처럼 그의 발치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사랑에 미쳐 넋을 잃고 그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마치 그의 입에서 포도송이가, 꿀이, 재스민꽃이, 새들이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 P115

그가 너를 보았다, 그가 분명 너를 보았다고 확신한 너는 네 마지막 숨을 다해 — 너는 죽어가고 있었다 —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천장에 종유석처럼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모랫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경배의 말을 외치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는 그의 열광적인 신도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 P121

포도주. 해방된 두 여인. 마르타는 마리아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릴 봐, 우릴 봐봐, 우리가 이럴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즐기고 있다니, 오늘 우린 여전히 상중이니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는데, 집은 검은 천들로 뒤덮여 있어야 했고. 그런데 지금 우리 둘만 남겨졌잖아, 동생아, 그 뿐이니, 집안에 남자 하나 없이 우리 둘만 남겨졌다고, 원래는 어미 잃고 남겨진 강아지들처럼 벌벌 떨고 있어야 했는데. - P124

그런 아빠 때문에 모두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이전과는 다른 가족으로 변해버렸다. 어쩌면 그런 성스러운 단어조차 쓰면 안 되었던 것 같다. 가족이라니.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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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그곳에서는 햄스터 두 마리가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 그가 불을 켜자 현기증 나는 빛이 비친다. 알전구 불빛에 벽마다 사진이 붙어 있는 게 보인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확대된 사진들. 하나씩 하나씩, 열성을 기울여 제 새끼를 먹어치우는, 거대하게 확대된 햄스터들. 외계인처 럼 생긴 얼굴을 가진 조막만 하고 불그스레한 살덩이들 — 자기 자식들 — 에 박혀 있는 설치류의 작고 귀여운 이빨. 내가 항상 보고 싶었던 사진들이 지금 내 눈 앞에 있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자기가 낳은 존재들을 먹는 존재. 제 어린 자식들을 먹고 사는 엄마. 실수를 바로잡는 자연의 모습.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내가 미소 짓는다. 그도 미소 짓는다. - P85

그들은 이제 오지 않는다. 수영장은 낙엽과 곤충 사체들로 덮여 있고 나는 그 가운데에 떠서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있다. 가끔 나한테는 햇빛조차 비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거지 같은 마을의 강렬한 태양, 모든 사람들에게 구릿빛 피부와 행복한 얼굴을 선사하는 그 태양이 나만 비껴간다. 나는 희끄무레하기만 하고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자리 없이 벗어나 있다. - P93

벽에다 공을 던지고 있다 보면 나는 뭐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쉬지 않고 계속해서 공을 치고 받았고, 그럴 때 나는 외삼촌의 왜건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상상을 한다. 라이카가 짖는 소리, 마리아 테레사의 째지는 웃음소리, 훌리오가 바닥에 축구공을 튀기는 소리를 상상하고 엄마가 자기 오빠를 보고 오빠가 와서 너무 기뻐,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정말로 기뻐 보인다. 몇 달 동안이나 다른 것, 그러니까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들에만 빠져 있던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진짜 기쁜 표정. 엄마는 사랑 노래를 흥얼거리며 레모네이드를 만들러 부엌으로 가고, 목이 긴 유리컵에 생크림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두 덩이를 얹고 그 위에 웨이퍼 스틱을 꽂아 내온다. 외삼촌 먼저야. 외삼촌, 외삼촌, 외삼촌 거야. 가만둬, 손대지 말라니까, 하면서 내 손을 탁 친다. - P93

사촌들이 그립다. 나는 그들이 이곳에 있을 때의 그 소년이 되고 싶다.
울음이 터졌다.
이번 여름은, 그리고 아마도 분명 앞으로 올 내 인생의 모든 여름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이미 똥통에 처박혀버리고 만 거야.
갑자기 이 집이 무서워졌다. 지금은 없는 이 집의 모든 남자들. 할아버지, 아빠, 외삼촌, 훌리오. 나도 여기 있기 싫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다른 무엇이 될 순 없는 걸까?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 과거로 갈 수는 있나? — 그래도 여기 있고 싶지는 않다. - P98

나는 엄마를 위해 샐러드를 조금 싸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 아래에 큰대자로 누워 있었는데 아직 샤워한 물기가 벗은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의 몸은 내 몸과 같이 생크림처럼 희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약한 빛이 엄마의 몸을 비추고 있었는데, 마치 익사체 같았다. 누군가 막 수영장에서 건져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살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에.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눕혀놓은 것처럼, 다리가 벌어진 자세로.
엄마는 죽었고 그러면 나는 떠날 수 있다. 그렇지. 뭐든 작은 배낭에 쑤셔 넣고 마리아 테레사와 훌리오를 찾아 떠날 것이다. 엄마는 죽었다.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나는 블라인드를 치지 않았다. - P98

"믿음을 가지세요, 여사님. 이 그리스도상은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더니 돈을 달라고, 동전이라도 몇 개 달라고 했다. 왜 아주머니는 그리스도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기적을 보여주는 그리스도라면 동전이 가득할 텐데. 버스비가 없어서 가끔은 먼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우리랑은 달리. - P105

교회 안으로 들어갔더니 […] 또 사진과 쪽지와 지폐와 그림들도 잔뜩 매달려 있었다. 쪽지 중 하나에는 "도와주세요 주님, 저 이제 아옵 쌀바께 안 댔는데 암이래요"라고 쓰여 있었다.
"엄마?"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이 중 어떤 게 내 동생인지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아요?"
"아주 똑똑하시거든." - P106

그곳을 떠나기 전 엄마는 로스안데스 케첩 병을 꺼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채웠다.
"좋은 물이야." 엄마가 말했다. "그리스도의 물, 성수야."
내게도 한 모금 마시라고 주었는데, 성스러운 맛이 나기는커녕 그냥 케첩 맛에 녹물 맛이 조금 나서 나는 그냥 케첩 물 아닌가, 월말이 되어 케첩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케첩을 맨밥 위에 뿌려 먹던 그 맛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게 기적일 수는 없었다. 기적이라면 밀크캐러멜 맛이 나거나 더블버거 맛이 나야 했다. 가난의 맛이 아니라.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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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랑이야, 라고 그가 설명했고 나는 네, 라고 말했다. 남자들에게는 항상 네, 라고 말했으니까.
나는 열두 살, 그는 열세 살이었다. 둘 중 누구든 사랑이 뭔지 알았겠는가. - P76

가끔은 아빠도 우리랑 함께 저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식당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변했다.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 속에서 미친 사람들처럼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고 엄마는 밥을 태우고 수프를 흘리고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리곤 해서, 우리 집이 아니라 꼭 정신병원에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날 밤 나는 햄스터 이야기를 했고 다른 사건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오빠들은 역겹다고, 밥 먹을 때 그런 더러운 얘기 하지 말라고 내 팔을 주먹으로 때렸다. 엄마는 부엌에 있었다. 너겟 더 먹을래, 퓌레도 더 먹겠니, 하기에 오빠들은 네, 라고 대답했고 나도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눈물과 함께 음식을 삼켜야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는 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아도 밥은 먹어야 했고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도 밥은 먹어야 했으며 멍이 들어도, 혹이 나도, 아니 죽더라도 밥은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 P77

바네사와 비올레타의 아빠 이름은 토마스였고 사람들은 토마스 씨라고 불렀는데, 좀 무서웠다. […] 그가 집에 오면 우리는 거의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춰야 했고 집 안의 공기에는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그런 것처럼 찌릿하고 메케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그럴 때 우리의 놀이는 병적으로 변했다. […] 그럴 때 나는 천천히 일어나 유령처럼 조용히 계단을 내려간 뒤 숨이 턱 막힌 채 문을 연다. 공기가 더 나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내 것인 공기가 있는 우리 집에 가려는 것이다. 아무리 무서워도 우리는 결국 자신을 감싸는 공기로 숨을 쉰다. 자신의 허파가 이유도 모르면서 열렬히 원하는 그 공기. 가엾어라, 멍청한 허파여. 내 육신의 살덩어리. 내 공기의 공기. 내 부모의 딸. - P78

내 쌍둥이 친구의 엄마는 걔들 아빠와는 달리 키가 작았고, 그게 다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별히 기억 나는 다른 특징이 없다. 그냥 원피스를 입고 걸어다니는 얼룩 같았다. 이름이 마르가리타였던가 로사였던가, 그런 우아한 느낌이 살짝 있는, 꽃 이름 같은 이름. - P79

내가 자기 집에 와 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는 건 나도 안다. 내가 복도를 걷고 있으면 조금 열린 문틈으로 내 모습을 쫓는 검은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가끔 그의 방 옆을 지날 때 나는 내 아랫배에서 어떤 야수 같은 열기가 느껴져 어지러웠는데 그 느낌은 분명 내가 아플 때 느끼는 어지러움과는 달랐다. 햄스터가 계속해서 새끼를 낳고 또 제 새끼를 먹어치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흥분했다. 그 일, 그러니까 설치류가 벌이는 그 카니발리즘은 밤에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쌍둥이들에 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지만, 나도 아빠의 카메라를 가지고 올 생각이 없었고 그 애들도 자기 아빠의 카메라에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손을 불태워버릴 거야. 그래서 그 장면을 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해소되지 않았다. - P79

내가 카펫 위에 앉아서 그의 여동생들과 놀고 있었던 것은 그를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그의 헛기침 소리라도 듣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아침에 등교할 때면 종종 동시에 집을 나설 때가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을, 심장이 타악기 마트라카처럼 요란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내 상태를 다 알아채고 말 거라 생각했으나 사실 그 시간에는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시간에도. 나의 오빠들이 밤에 그 악마같이 생긴 인형을 가지고 나를 놀래키려고 할 때 나를 쳐다보는 것도 포함한다면, 그래, 그때만큼은 누군가 나를 보고 있기는 했다. - P80

그의 아빠가 가족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 나의 아빠는 내가 이전처럼 자주 그 집에 놀러 가는 것을 안 좋게 보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머리 없는 집이니까. 꼭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가장이 없는 집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는데 나는 머리 없는 집이라는 말만 생각이 난 다. 머리가 없는 닭처럼, 미쳐 날뛰는. 그 집에 못 가게 된 것이 상처로 남진 않았다. - P82

아마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같은데, 어느 날부터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졸업했고, 다시는 아무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죽을 것 같았으나,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그의 이름의 마지막 음절을 발음 하게 되면 나는 아스팔트 위에서 녹아 없어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오빠들 역시 졸업했고, 그렇게 꼬마였던 사람들은 이제 그냥 사람이 되었다. 상처는 그대로였지만. - P83

나도 역시 졸업했고 대학에 진학했고 또 학업을 마쳤고 나는 계속해서 남자들에게는 네, 라고 말했고 이 집 저 집에서 벽에 던져져 깨진 값싼 유리컵처럼 나도 그렇게 깨지곤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장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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