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의 임신 얘기,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군지에 관한 얘기, 몇 년 동안이나 둘이 내연 관계였다는 얘기, 아내만 불쌍하지, 그런데 정말 바보 아냐,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잖아, 이런 얘기를 이미 지칠 때까지 했고, 복습까지도 다 끝났으니 이제 모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해 천장만 바라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할 얘기가 없다는 건 다들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뜻이고 안뜰과 수영장과 마당까지 이미 집을 다 구경시킨 마당에, 피부와 머릿결과 샌들과 조카가 만들어줬다는 예쁜 목걸이와 훈제연어파이의 맛까지 칭찬하고 나면, 할 만한 얘기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 P173

누군가 그 침묵을 깨야 한다.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지속될 침묵이지만 마치 목구멍에 대양의 바닷물이라도 억지로 부어 넣은 것처럼 목이 꽉 막혀 답답하기만 하다. 말하면 안 될 것들, 모두가 그런 것을 갖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이 새어 나갈지 모른다. 게다가 침묵이 좋지 않은 이유는 생각할 여지를, 이렇게 오후에 함께 모여 여자 친구들끼리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썰고 토막 내는 일이라는 것, 그런 뒤 토막 낸 그를 자기 눈앞에 울타리를 쳐 가두고 그의 더러운 부분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바로 이 행위, 다음 희생자를 찾는 일은 수십 개의 문, 금속이나 호두나무 목재로 만든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문들 너머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정확히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집들의 거실에, 아마도 네 이야기를, 바로 너를 떠올리고 있는 다른 여자들이 있다. 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다른 여자들이 있다. - P173

나티비다드 코로소, 다른 이름으로는 코로 […] 가 마치 도마뱀붙이처럼 신중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온다. 그녀와 같은 몸집과 너비를 가진 여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걸음걸이다.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 이런 몸짓은 몇 년, 몇십 년에 걸친 집안일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데, 마치 옛날 중국 소녀들에게 작은 신발을 신겨 발의 성장을 막고 발을 망가뜨렸던 풍습인 전족처럼, 오랜 집안일이 그토록 이상한 변형을 일으켜 나티비다드 코로소 같은 정말 몸집이 큰 여자를 투명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 P174

코로가 나가자 모두가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이상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집 안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저렇게 새까만 흑인 여자가 일한다는 게? 냄새가 다르지는 않아? 흑인들은 우리랑 냄새가 다르잖아, 저 두건 쓰니까 진짜 사람 좋은 아주머니 같기는 하다, 제미마 아주머니랑 닮았어, 팬케이크에 뿌리는 시럽 브랜드 있지, 그 시럽 통에 그려진 흑인 아주머니 모델 있잖아, 그나저나 마리아 델 필라르는 요즘 사람이구나, 일하는 여자들이 액세서리 하는 것도 뭐라고 안 하고, 잘 어울리는걸 뭐, 이국적이잖아, 월급은 얼마 주니, 아이고 우리 집 일하는 여자한테 내가 더 주고 있잖아, 아, 나를 물로 본 거네? - P176

안뜰의 센서등이 깜빡이고 누군가 했던 얘기를 또 한다. 누구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자기네 집에서 일하는 여자 중 하나가 낮잠을 자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얼굴에 물을 한 컵 뿌렸는데도 그 여자가 잠을 깨기는커녕 돌아눕더니 5분만 더 자겠다고 했다는 이야기. 신경 쓰이네 저거, 센서등이 너무 민감한 거 아냐, 계속 깜빡거리잖아, 여기 벌레가 그렇게 많은가, 동물이 많은가, 쉴 새 없이 깜빡깜빡, 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아마 다들 저런 문제 겪어봤을걸, 끔찍하다니까. 등은 꺼졌다가 잠시 후 다시 켜진다. 일곱 번이나 반복되니 나가봐야 할 것이다. 칵테일의 취기와 예기치 않은 모험에 다들 배꼽을 쥐고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나가서 무엇 때문에 센서등이 자꾸 켜졌다 꺼졌다 하는지 보려고 한다. 마리아 델 필라르는 수영장에 뜬 낙엽을 건져내는 데 쓰는 뜰채를 집어 창을 쥐듯 거꾸로 잡는다.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통굽 샌들에, 새하얀 리넨 상하의를 세트로 갖춰 입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잔뜩 낀 채 뜰채를 무기처럼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사진을 찍는다. - P178

쫓던 무언가가 일하는 여자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들도 따라 들어간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냄새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낡은 동전의 냄새, 곰팡이 냄새, 낡은 가죽들이 쌓여 있는 가죽 공방 냄새, 습기를 머금은 열대 지방의 옷장 냄새, 그런 쉰내가 난다. 그 방은 정말 옷장이나 마찬가지다. 창문도 없고 크기도 딱 버스만 하다. […] 그들의 ‘투어‘에 여기까지 들어와보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흥분된 감정이 그들을 아이처럼 만들었고,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은 전에는 되어본 적 없는 존재가 되어보기로 한다. 타인이 되는 것. 서랍을 열어 코로의 옷, 나티비다드 코로소의 옷을 꺼내 자기 옷 위에 걸쳐 입고, 누군가는 베개를 바지 뒤쪽에 넣어 커진 새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또 다른 이는 빨간색 티셔츠를 집어 들더니 머리에 두건처럼 만들어 쓴다. 모두가 코로를 흉내 내며 사진을 찍는다. - P179

센서등은 조그마한 두 눈처럼 보이는 붉은 표시등과 함께 쉼 없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한다. 야자나무는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운다. 괴물들이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것만 같다.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클럽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고 이제 신나는 트로피컬 리듬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다. 모든 것들이 이 짓궂은 장난에 함께하는 듯 보인다. - P182

바깥에서는 여자들이 놀고 있다. 베로니카는 헤엄을 치려고 하지만 그들은 베로니카를 가두듯 에워싸고 있다. 수가 많아서 수영장의 귀퉁이마다 빠져나갈 틈 없이 지키고 서 있다. 자, 가자, 네 쪽으로 간다, 거기 조 심해, 놓치지 마. 센서등은 마치 취조실 불빛처럼 강력 한 힘을 가진 듯 느껴지고, 센서등이 그렇게 금속성 소리를 내며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첨벙첨벙 소리가 계속되는 와중에 베로니카의 신음, 이제 그만, 친구들아, 장난 아니야, 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 P183

누군가가 ‘깎아서 꽉 채워‘ 아래쪽에다 남자 성기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세 장의 안내문에 모두. 이 일을 할 때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생각을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일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 이 옥빛의 수영장 물이 깨끗해질 리 없다고 해도. 이 물이 티 없이 맑은 물이 되는 일은 절대로, 결코, 절대로, 없다. 돌아서면 벌써 귀뚜라미 한 마리가, 꽃 한 송이가, 담배꽁초 하나가, 종이 한 장이, 꿀벌 한 마리가 떨어져 있다. 가끔은 죽은 새도 있다. 항상 쌍으로 날아다니던 노란색 작은 새들 중 한 마리다. 죽은 한 마리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물 위에 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수영장 가에서 종종거린다. 자연은 불완전하다. - P188

금박의 호텔 로고가 박힌, 눈처럼 하얗고 올이 촘촘한 가운은 꼭 얼음물에서 막 몸을 헹구고 나온 북극곰의 모피 같고 그 품속 에서라면 모든 게 다 괜찮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 티 없이 깨끗한 욕실 안, 포근한 눈 같은 수건은 유칼립투스 향이 은은하게 나는 곰 인형 같고 욕조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처럼 보이며 아름답고 티 없이 맑고 반짝반짝한 표면만을 비추는 거울이 있는 그런 욕실 안에서라면, 세상의 종말을 생각 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한 냄새, 쾌적한 냄새만 나서 신경안정제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고, 발은 강아지 털 같은 카펫의 털 속에 잠겨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그 털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거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여행 가방은 바깥세상의 더러움을 끌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풀지 않았는데, 가방 안에는 속옷, 잠옷 바지, 책 몇 권, 그리고 반쯤 남은 땀 냄새 제거제와 컨실러와 선크림과 이런 저런 안티에이징 제품과 카카오버터 립밤과 바이브레이터가 든 비닐 파우치가 있다.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이 방엔 어울리는 자리가 없다. 핸드폰 충전기도 있는데, 저런 깨끗한 벽에 꽂으면 무슨 기다랗고 까만 내장처럼 징그러워 보일 것이다. 안 된다. 이곳은 신세계니까. 죄를 사하여 주는 곳. - P190

거울을 잠시 보다가 자기 얼굴이 비치는 곳을 손으로 가린다. 기계 태닝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얼굴에 얼룩이 생겼고 얼룩진 얼굴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걸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피부색이 진주조개 같았던 자신, 순수 설화석고에 조각한 것 같았던 자신의 얼굴을 분명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자신의 피부색은 당근색에 가까운 분홍색 마분지 색깔이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크게 들어 구역질이 난다. 빛나는 시절이 다 가고 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는 거지? 그렇게 고독함이 밀려온다. 예전에 아름다움은 언제나 곁을 지키는 동반자였다. 훼손할 수 없는 단단한 외피이자 애정을 보장 해주는 보증수표. 그 무엇도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아름답다는 것의 의미이다. 누구도 네게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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