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당신이 감자튀김을 가져오면 내가 불을 피우고 주전자를 올릴게요. 그들은 타오르는 난로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탁에 노란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그녀가 고리버들 매트를 깔고 소금과 후추, 따뜻한 접시를 내놓았다. 포크와 나이프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녀의 침실에는 디오더런트 향기가 맴돌았고 작은 촛불이 켜져 있었다. 커튼 너머로 전조등 불빛이 지나갔다. 새벽에 그가 잠에서 깨보니 그녀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어 있었다. 당시 그는 레이든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그는 중심가로 가서 우유와 얇게 저민 햄을 샀고, 남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 P74

"신경 쓰지 마." 그가 말한다. "무슨 상관이겠어. 우리가 죽어 없어진 뒤에도 땅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우리야 땅을 빌려 쓰는 것밖에 더 돼?" - P76

"누구든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그냥 하는 말이지–"
"내가 밖으로 나가서 대문을 열고 말을 쫓아냈어요." 브래디가 말한다. "그녀가 기회를 한 번 더 줬지만 예전 같지 않았죠. 예전과 전혀 달랐어요."
"세상에." 레이든이 몸을 물리며 말한다. "자네한테 그런 면이 있는지 몰랐군." - P77

그가 침대에 들어가 점퍼를 벗는다. 신발도 벗고 싶지만 두렵다. 신발을 벗으면 아침에 절대 다시 신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불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커튼이 없는 창문을 바라본다. 이제 겨울이다. 저 밖에서 뭘 하는 걸까? 텃밭에서 바람이 피리 소리 비슷한 끔찍한 소리를 내고 어딘가에서 짐승이 울부짖는다. 그는 매케이드의 개가 내는 소리이기만을 바란다. 브래디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오직 그녀만을 생각한다.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곧 그녀가 돌아와서 그를 용서하리라. 굴레가 다시 옷걸이에 걸리고 식탁에 식탁보가 깔리겠지. 그의 마음 속에서 은빛이 잠시 번쩍한다. 잠이 그를 덮칠 때 이미 그녀가 거기 있다. 그녀가 창백한 손을 그의 가슴에 올리고, 그녀의 검은 말이 그의 들판에서 다시 풀을 뜯는다. - P78

"나랑 결혼하는 거 생각해 볼래요?"
이 질문이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마사는 망설였다. 디건은 오락실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불빛이 너무 밝아서 마사는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슬롯 머신과 가끔 넘치는 동전을 조금 밀어내서 누군가 돈을 따게 해주는, 동전이 가득 쌓인 선반밖에 없었다. 밴에서 아이가 솜사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람이 점점 줄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는 중이었다. - P85

가끔 헛간에 서서 씨앗을 쪼는 닭들을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 끼다가도 이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결혼 생활의 공허함을 쓰라리게 느꼈다. 침대를 정리하는 공허함, 커튼을 치고 여는 공허함. 이제 마사는 결혼하기 전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 P87

그해 여름에 마사의 장미는 진홍색으로 피어났지만 오래지 않아 바람에 꽃이 송이째 다 떨어졌고, 마사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가진 것은 결혼한 뒤로 거의 말도 하지 않는 남편과 빈집뿐이었고, 자기 앞으로 들어오는 수입도 없었다. 마사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녀는 감정이 점점 크고 깊어져서 사랑이 될 줄 알았다. 지금 마사는 친밀함을, 오해를 뛰어넘는 대화를 간절히 원했다. - P89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이웃 사람이 찾아오면 마사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그녀는 이야기를 제일 잘했다. 그런 드문 밤이면 이웃들은 그녀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아채듯 문득 떠올리고는 눈앞에서 그것을 깨뜨려 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기억에 남는 것은 늘 인상적이었던 낡고 멋진 집도, 그 집을 소유한 걱정스러운 표정의 남자도, 별난 10대 아이들도 아니고, 밤이 깊어질수록 진갈색 머리카락이 점점 헝클어지는 여자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잡아채는 그녀의 창백한 손이었다. 그녀가 난롯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초록색 자두처럼 점점 무르익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가끔 밤 속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졌기 때문에 길이 끝나는 곳까지 디건이 그들을 데려다주어야 했다. 그런 밤이 끝나면 항상 여자를 침대로 데려가서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임을 그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확인시켰다. 그는 가끔은 그녀가 이야기를 잘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믿었다. - P91

집이 골짜기에 서 있고 벽이 기껏해야 판지 두께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죽고 형제들이 떠나자 디건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가 커튼을 친 방에만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나 아버지가 네 멋대로 굴지 말라며 매를 들던 밤이 아니라 더 간단한 것들,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하울 길가에 일렬로 늘어선 오크 나무는 증조부가 심었다. 아이들이 그네를 아무리 높이, 아무리 세게 타도 가지가 부러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았다. 이 땅이 아내와 자식들보다 더 큰 만족감을 준다는 것을. - P92

디건은 이제 중년이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은 인생의 많은 부분이 끝났다고, 한정된 선택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내리막 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다르다. 디건에게 은퇴는 그가 감수한 모든 위험에 대한 보상이다. 연금이 나올 때 쯤이면 자식들은 다 컸으리라. 그는 집에서 쓸 쇼트혼 소 한 마리만 데리고 아하울에서 사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는 내킬 때 일어나서 돌을 정리하고 과수원 담벼락을 손볼 것이다. 삽을 꺼내서 오크 나무도 더 심을 테다. 돌담이, 오크 나무의 파란 그림자가 벌써부터 느껴진다. 첫째는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아 성을 물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일찌감치 은퇴해서 그토록 갈망하는 편안한 삶으로 물러날 때까지 디건은 자식들을 키우고 생활비를 내고 한참 일해야 한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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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유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유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늘 미래가 당장 거의 코 앞에 닥쳐오는 곳에 살고 있다. 미국은 크게 다섯 가지 중요 동사로 움직인다. 생산하다, 최대로 뽑아내다, 소비하 다, 지우다, 승리하다. 사유하기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되돌아보기, 이해하기, 책임지기 같은 것들은 시간과 관심을 요구한다. 아주 길고 고요한 진공 상태가 필요하다. - P16

사유는 대체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할까?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 P20

과격한 허위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사유하기란 평범한 행위가 아니다. 사유는 가짜 뉴스와 그럴듯한 거짓말, 거북한 역사를 덮으려는 우파의 간교한 시도에 대한 해독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딘가 불편하고 죄책감을 일으킬 만한 역사적 진실을 가르치는 데 거의 발작처럼 반발감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어리석고 유치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대로는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결국 이 끔찍한 기억상실증으로 오염된 바다에서 서서히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에 귀 기울이고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 진실을 대면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야 우리는 진정한 자신으로 서로의 안에서 살 만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 - P21

글쓰기는 자살과 광기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적어도 그 광기로 무언가를 만들게 해주었다. 나의 글쓰기는 증인이었다. 고발이며 고백, 발굴, 구원이었다. 단어를 나열하는 일은 일종의 벽돌쌓기였다. 그마저도 아주 잠시만 지탱되는. 그렇게 나는 혼돈과 폭력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렸다. 글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가족을 찾을 수도 있었다. 우리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작가 마크 마토우세크 Mark Matousek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상을 배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머니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의 두 눈과 관심이 당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배우고 발견하게 될까? - P22

나는 글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글은 내 친구였다. 글은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달리는 내 작은 기차였다. 글은 타올랐다. 글은 힘이었다. 글은 창을 열었다. 글은 내 옷을 벗겨 냈다. 글은 일을 꾸몄다. 비명을 질렀다. 글은 저항이었다. - P28

오후 5시, 우리는 울워스에 있다. 망치와 왼손잡이용 장갑을 찾는다. 실내는 밝고 사람들로 붐빈다. 동독 사람들은 오렌지색 바구니를 손에 들고 흥분해 돌아다닌다. 그들은 나무에 매달린 다람쥐처럼 바구니를 거꾸로 든다. 마침내 자유다. 마음껏 빈곤할 자유 그리고 우리의 빈곤을 목격할 자유.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이 혼란스러운 쇼핑객들 위를 마치 발급이 거부된 비자처럼 떠다닌다. - P41

밖에서 너무 오래 지내면 생기는 일입니다. 익히지 않은 스크램블드에그처럼 모두 뒤섞여 버려요. 당신 몸의 부서진 파편들이 피를 흘리며 다른 파편들로 흘러 들어가고요. 당신의 감정은 빌어먹을 싸구려 울워스 가방에 쑤셔 박힌 물건들처럼 나뒹굽니다. 그러고는 이내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게 되어요.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가방이 무겁다는 것,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신의 가방을 내려놓도록 허락하지 않기에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가방에 허락된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지요. 그러다 어느 밤, 당신은 제기랄, 이 염병할 가방, 내뱉고 가방 따위 내팽개쳐 버리고 맙니다. 며칠 후 돌아오면 가방은 사라지고 없어요. 당신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굽니다. 누가 내 가방을 가져간 거야? 썅, 누가 내 가방을 가져갔냐고? 그 안에 전부 다 들어 있는데!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방이 사라져서, 그리고 당신도 나중에는 그런 식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뭐, 어느 정도는. - P45

나는 이제 소리 내어 떠들지 않아요. 말은 나를 아프게 해요. 내 안에서 나오는 말이 나를 찔러요. 그 말들은 내가 더럽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요. 말들은 내가 이제 씻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지요. 내가 더는 움직이지 않고 더는 열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서 분리되어 나를 떠나요. 나는 내 말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요. 내게 머물기를 원해요. 그것만이 내 유일한 가족인걸요. - P50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맬컴 턴불 총리님, 피터 더턴 장관님.
저희는 마누스섬 임시수용소에 갇혀 있는 난민이자 망명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제안을 드리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지난번에도 편지를 써 이 감금 조치를 풀어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바 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저희는 우리가 쓰레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한편, 이 생지옥을 살아가는 본보기가 되어 다른 보트들이 더는 호주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에 충실한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에 저희는 이 막대한 비용 손실을 막고 호주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국경 또한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제안을 몇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1. 우리 모두를 바다 한가운데서 쓸어버릴 수 있는 해군 함정(HMAS도 좋습니다)
2. 가스실(DECMIL이 처리해 줄 것입니다)
3. 독극물 주사(국제보건의료서비스HMS가 도와줄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농담이나 풍자가 아니며 저희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호주 이민•국경보호부DIBP가 이미 밝혔듯 저희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해 줄 나라가 없기에 저희는 이곳 마누스섬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문과 같은, 트라우마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마누스섬 난민들이자 망명 신청자들 드림 - P53

나는 어디서도, 그 어떤 곳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분을 상상해 보려 애쓴다.
강간과 살인,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폭력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라온 집을 떠나고 온몸으로 기억하는 땅을 떠나고 내 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 는 산과 바다, 지금까지 집이라고 알고 있던 그 모든 것을 떠나야 하는 심정을 헤아려 본다. 그저 낯선 땅을 밟았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되는 심정을 말이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나는 육백 명의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증발하고, 잊히고, 파괴될 수 있는지도 계속해서 생각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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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사제의 발을 본다. 더러운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은 모욕이다. 사제는 신발을 벗어 밖에 두면서 발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국인이 등받이 없는 의자를 꺼내 온다. 그는 손이 빠르다. 유연하고 잘생겼고, 자기 집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사제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창유리를 통해 강을 내다보면서 새삼 날카로운 질투를 느낀다. - P59

"네." 중국인이 말한다. "당신 문제 있어요."
"내 문제요?"
중국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난 아무 문제도 없어요." 사제가 말한다.
중국인이 웃는다. 원래 문제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그도 안다. - P59

중국인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소매를 팔꿈치까지 깔끔하게 접어 올리더니 손을 뻗어 사제를 만진다. 다른 사람과 닿은 것은 3년 만인데, 모르는 사람의 손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느껴진다. 어째서 상처보다 부드러움이 사람을 훨씬 더 무력하게 만들까? - P60

롤러의 딸과 보낸 파편 같은 시간들이 마음을 스친다. 그녀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녀는 자기 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때로 그런 그녀의 생각에 화가 났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음을 결코 증명 할 수 없었다. - P61

이제 중국인이 사제의 손을 주무르면서 뒤로 최대한 꺾자 사제는 손목이 틀림없이 부러질 것만 같다. 그런 다음 그의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린다. 중국인이 사제의 머리 양옆에 무릎을 대고 그의 척추 맨 아래, 꼬리뼈에서부터 몸통을 지나 무언가를 끌어온다. 뭔가 딱딱한 것이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중국인의 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제는 미처 마음의 준비도 되기 전에 안에서 무언가가 접히는 것을 느낀다. 해안에서 바닷물이 접히면서 또 다른 파도를 만들 때 같다. 그의 입에서 파도가 부서진다. 그녀의 이름이 끔찍한 비명처럼 터져 나오고, 다 끝난다. - P62

사제가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건 뭐죠?"
"오래됐어요." 중국인이 말한다.
"비어 있네요."사제가 웃는다.
중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비었어요." 사제가 말한다. "가득 차 있지 않다고요."
"네." 중국인이 말한다. "당신 문제 있어요." - P63

그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건조하고 기대로 가득 찬 봄이 왔다. 오리나무가 싹을 틔우면서 허연 가지가 놋빛으로 변한다. 이제 모든 것이 더 선명해 보인다. 울타리 기둥 너머에서 밤이 단단히 준비한다. 갈퀴는 무척 사랑받고 닳아서 반짝거린다.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뚜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 P64

"그건 그렇고, 암말에 편자를 달고 오는 길이야."
"말은 괜찮았어요?"
"난리였지." 레이든이 말한다. "여기 브래디가 안 도와줬으면 아직도 달고 있었을걸."
"젊은 애들이나 하는 일이야." 맥필립스가 말한다. "나도 팔팔할 때는 편자를 직접 씌웠지."
"파인트 세 잔만 마시면 안 해본 일이 없지." 노리스가 말한다.
"두 잔 마시면 못 할 일이 없고!" 레이든이 한술 더 뜨며 말한다. - P71

이제 뉴스가 끝나고 숀이 라디오를 끈다. 이 침묵은 모든 침묵과 마찬가지다. 다들 조용해져서 좋아하면서도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 뻔해서 좋아한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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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구에서 온 젊은 여자가 바텐더를 찾아서 바를 향해 몸을 숙인다. 그녀의 옆에서 이발사가 자기 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잔이 반쯤 빈 걸까요, 반쯤 찬 걸까요, 신부님?"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사제가 말한다.
"글쎄요, 뭘 마시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여자가 말한다. "둘 다겠죠. 둘 중 하나만일 수는 없잖아요." 이발사가 얼굴을 찌푸리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여자들이란 참."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여자들은 항상 답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 P37

"무슨 일이든 저절로 해결되는 법이지요." 사제가 위로한다.
"그런 일도 있죠."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광을 낸 커다란 구두 끝으로 의자를 툭툭 치며 말한다. "그저 물러서서 마음대로 하게 놔둬야 해요. 실수하게 내버려둬야 하죠. 그게 힘듭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을 당할 뿐이에요." - P39

사제가 문을 나설 때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때, 별로 오래되지 않은 예전에는 사제에게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을 텐데. 그는 바에 가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결혼식은 힘들다. 사방에 술이 넘치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지만 그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한 남자가 젊은 남자에게 딸을 빼앗긴다. 한 여자는 아들이 별것도 아닌 여자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반쯤 그렇게 생각한다. 비용이 들고 감정은 오가고 돌이킬 수는 없다. 공개적으로 서약하면 사람들은 항상 운다. - P40

"다들 잘 알지만 흰 옷이 얼룩지기 쉬운 법이지." - P45

신랑이 종이를 펴고 장인과 비슷한 인사말로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신부는 연설을 늘어놓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용히 앉아 있다. 웨이트리스가 샴페인을 들고 오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신부가 와인 잔 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자 사제는 무언가가 떠오른다. 선명하게 되살아난 기억 때문에 그는 혼자 있고 싶어진다. - P49

사제에게 마이크가 다시 넘어온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후 감사 기도를 드리지만 한마디도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은 기도를 드려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다. 하느님이 무엇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지만–바로 이것이 이상한 점이다–그는 하느님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바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의 계시뿐이다. 저녁이 되어 가정부가 돌아간 뒤 창가의 커튼을 꼼꼼하게 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사제가 되는 방법을 보여달라고 기도를 드릴 때도 있다. - P49

사제가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른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 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 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 P52

한때 집 한 채가 서 있던 곳에서 길이 끝난다. 담쟁이덩굴이 박공을 온통 뒤덮었다. 오리나무가 자라는 습지에 도착하 자물 쪽에서 당황한 듯 퍼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야생 오리 떼가 날아오른다. 그 바람에 밑으로 늘어진 꽃이삭들이 떨린다. 사제가 가만히 서서 백로를 찾아 하늘을 바라본다. 여기에 와서 못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갑자기 백로가 나타나 하늘을 향해 평온한 곡선을 그리며 느린 날갯짓으로 날아간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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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가끔 화가 나면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서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당신은 슬레이니강으로 끌려가서 어머니가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 강둑에서 던지는 것을, 양동이가 잠시 둥둥 뜨다가 가라앉는 장면을 상상했다. 당신은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임을 알았고, 너무 끔찍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가끔 끔찍한 말을 했다. - P15

큰언니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교사가 되었다. 유진은 공부를 잘했지만 열네 살이 되자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사진을 보면 장남과 장녀는 옷을 잘 차려입었다. 새틴 리본, 짧은 바지, 두 눈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태양. 자연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는 대로 먹이고 입히고 기숙학교에 보냈다. 가끔 공휴일과 주말이 이어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과 낙관주의를 안고 오지만 낙관주의는 금방 시들었다. 언니와 오빠 들은 모든 것을, 여기서 살던 추억을 떠올리다가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지르면 뻣뻣하게 굳었다. 언니 오빠들은 집을 다시 떠나면 치유받는 것 같았고, 빨리 가고 싶어서 안달 이었다. - P16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대신 키우던 세터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당신을 그의 방에 들여보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헛간에서 어머니가 반으로 자른 나무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자루를 물속에 넣었고, 결국 낑낑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자루가 고요해졌다. 강아지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P17

벚나무가 휘어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양치기 개들이 당신을 쫓아온다. 당신은 꽃밭을 지나고 배나무를 지나 자동차로 걸어간다. 포드 코티나 승용차가 밤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다. 디젤 연료통 옆에서 야생 민트 향이 난다. 유진이 시동을 걸고 농담을 하면서 차를 몰기 시작한다. 당신은 핸드백, 비행기표, 여권을 다시 본다. 넌 거기 도착할 거야,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거야. - P21

당신이 철조망 을 다시 칠 때 암망아지가 들판 가장자리를 따라 달려와서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히힝거린다. 붉은 기가 도는 밤색에 한쪽 발만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얗다. 당신은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서 이 암망아지를 팔았지만 내일은 돼야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당신은 암망아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돌아서지만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의 시선이 자갈길을, 타이어 자국 사이의 초록색 풀을 지나 개신교 시절부터 남아 있던 화강암 기둥을 따라 올라갔다가 저 너머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러 나온 어머니에게 닿는다. 어머니는 겁쟁이처럼 살짝 손을 흔든다. 어머니가 자신을 남편과 같이 여기 남겨두고 떠나는 당신을 용서하는 날이 올까 궁금하다. - P22

이쪽은 조명이 더 환하다. 향수와 볶은 커피콩 향기, 비싼 것들의 냄새가 난다. 당신은 태닝 로션 병들을, 선반 가득 늘어선 검은 안경들을 알아본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지만 당신은 계속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티셔츠와 면세점을 지나 게이트로 향한다.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하니 거의 아무도 없지만 당신은 여기가 맞다는 걸 안다. 당신은 또 다른 문을 찾다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알아본다. 문을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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