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유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유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늘 미래가 당장 거의 코 앞에 닥쳐오는 곳에 살고 있다. 미국은 크게 다섯 가지 중요 동사로 움직인다. 생산하다, 최대로 뽑아내다, 소비하 다, 지우다, 승리하다. 사유하기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되돌아보기, 이해하기, 책임지기 같은 것들은 시간과 관심을 요구한다. 아주 길고 고요한 진공 상태가 필요하다. - P16
사유는 대체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할까?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 P20
과격한 허위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사유하기란 평범한 행위가 아니다. 사유는 가짜 뉴스와 그럴듯한 거짓말, 거북한 역사를 덮으려는 우파의 간교한 시도에 대한 해독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딘가 불편하고 죄책감을 일으킬 만한 역사적 진실을 가르치는 데 거의 발작처럼 반발감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어리석고 유치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대로는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결국 이 끔찍한 기억상실증으로 오염된 바다에서 서서히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에 귀 기울이고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 진실을 대면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야 우리는 진정한 자신으로 서로의 안에서 살 만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 - P21
글쓰기는 자살과 광기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적어도 그 광기로 무언가를 만들게 해주었다. 나의 글쓰기는 증인이었다. 고발이며 고백, 발굴, 구원이었다. 단어를 나열하는 일은 일종의 벽돌쌓기였다. 그마저도 아주 잠시만 지탱되는. 그렇게 나는 혼돈과 폭력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렸다. 글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가족을 찾을 수도 있었다. 우리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작가 마크 마토우세크 Mark Matousek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상을 배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머니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의 두 눈과 관심이 당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배우고 발견하게 될까? - P22
나는 글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글은 내 친구였다. 글은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달리는 내 작은 기차였다. 글은 타올랐다. 글은 힘이었다. 글은 창을 열었다. 글은 내 옷을 벗겨 냈다. 글은 일을 꾸몄다. 비명을 질렀다. 글은 저항이었다. - P28
오후 5시, 우리는 울워스에 있다. 망치와 왼손잡이용 장갑을 찾는다. 실내는 밝고 사람들로 붐빈다. 동독 사람들은 오렌지색 바구니를 손에 들고 흥분해 돌아다닌다. 그들은 나무에 매달린 다람쥐처럼 바구니를 거꾸로 든다. 마침내 자유다. 마음껏 빈곤할 자유 그리고 우리의 빈곤을 목격할 자유.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이 혼란스러운 쇼핑객들 위를 마치 발급이 거부된 비자처럼 떠다닌다. - P41
밖에서 너무 오래 지내면 생기는 일입니다. 익히지 않은 스크램블드에그처럼 모두 뒤섞여 버려요. 당신 몸의 부서진 파편들이 피를 흘리며 다른 파편들로 흘러 들어가고요. 당신의 감정은 빌어먹을 싸구려 울워스 가방에 쑤셔 박힌 물건들처럼 나뒹굽니다. 그러고는 이내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게 되어요.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가방이 무겁다는 것,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신의 가방을 내려놓도록 허락하지 않기에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가방에 허락된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지요. 그러다 어느 밤, 당신은 제기랄, 이 염병할 가방, 내뱉고 가방 따위 내팽개쳐 버리고 맙니다. 며칠 후 돌아오면 가방은 사라지고 없어요. 당신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굽니다. 누가 내 가방을 가져간 거야? 썅, 누가 내 가방을 가져갔냐고? 그 안에 전부 다 들어 있는데!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방이 사라져서, 그리고 당신도 나중에는 그런 식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뭐, 어느 정도는. - P45
나는 이제 소리 내어 떠들지 않아요. 말은 나를 아프게 해요. 내 안에서 나오는 말이 나를 찔러요. 그 말들은 내가 더럽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요. 말들은 내가 이제 씻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지요. 내가 더는 움직이지 않고 더는 열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서 분리되어 나를 떠나요. 나는 내 말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요. 내게 머물기를 원해요. 그것만이 내 유일한 가족인걸요. - P50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맬컴 턴불 총리님, 피터 더턴 장관님. 저희는 마누스섬 임시수용소에 갇혀 있는 난민이자 망명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제안을 드리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지난번에도 편지를 써 이 감금 조치를 풀어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바 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저희는 우리가 쓰레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한편, 이 생지옥을 살아가는 본보기가 되어 다른 보트들이 더는 호주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에 충실한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에 저희는 이 막대한 비용 손실을 막고 호주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국경 또한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제안을 몇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1. 우리 모두를 바다 한가운데서 쓸어버릴 수 있는 해군 함정(HMAS도 좋습니다) 2. 가스실(DECMIL이 처리해 줄 것입니다) 3. 독극물 주사(국제보건의료서비스HMS가 도와줄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농담이나 풍자가 아니며 저희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호주 이민•국경보호부DIBP가 이미 밝혔듯 저희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해 줄 나라가 없기에 저희는 이곳 마누스섬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문과 같은, 트라우마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마누스섬 난민들이자 망명 신청자들 드림 - P53
나는 어디서도, 그 어떤 곳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분을 상상해 보려 애쓴다. 강간과 살인,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폭력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라온 집을 떠나고 온몸으로 기억하는 땅을 떠나고 내 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 는 산과 바다, 지금까지 집이라고 알고 있던 그 모든 것을 떠나야 하는 심정을 헤아려 본다. 그저 낯선 땅을 밟았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되는 심정을 말이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나는 육백 명의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증발하고, 잊히고, 파괴될 수 있는지도 계속해서 생각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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