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없었다면 그 느닷없는 부르짖음은 눈뜨고 꾸는 꿈의 잠꼬대 정도로 잊혀졌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격렬한 그 구호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저 혼자 흘러나온 혼잣말 따위 나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엄연한 증거가 있는 것이었다. 속눈썹에 이슬처럼 달려있는 마지막 눈물 한 방울, 젖어있는 휴지 조각, 맵싸한 기운이 아직 남은 먹먹한 가슴. 이런 증거들이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어서 밝혀내라고, 어서 명명백백하게 스스로를 설명해보라고. - P9

아버지도 진진이란 이름 앞에 ‘안‘이 붙는다는 사실까지는 유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간 지나치게 해석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도 나라는 인간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이었다······. - P12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 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 P15

이십대의 젊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사랑의 묘약일 수 있다.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 P16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 P17

그랬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꼭 그래야만 해!"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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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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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용광로였고, 태양은 사형집행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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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는 마그다가 살아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궁금했다. 어떤 때 마그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부시게, 너무도 빨리 찾아왔기 때문에 로사는 갈비뼈 안쪽을 구리 망치로 맞은 것처럼 가슴이 쟁강거리고 지잉 울리곤 했다. - P99

방 전체가 마그다로 가득했다. 마그다는 한 마리 나비 같았고, 이 구석 저 구석에 동시에 있었다. 로사는 마그다가 몇 살이 되려는지 보려고 기다렸다. 열여섯 소녀, 얼마나 좋은가. 활짝 꽃을 피운 소녀들은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부풀도록 민첩하게 움직인다. 열여섯 소녀들은 언제나 나비다. 거기 마그다가 있었다, 꽃으로 만발해서. - P102

마그다의 머리색은 여전히 미나리아재비처럼 노랬고, 아주 매끄럽고 고와서 코넷 모양의 머리핀 두 개가 자꾸만 턱의 양쪽으로 미끄러지곤 했다 그 턱은 마그다의 얼굴에서 경이로운 부분이었다. 만약 턱의 모양이 달랐다면, 그 얼굴은 훨씬 덜 또렷해 보였을 것이다. 아래 턱이 언제나처럼 살짝 길었고 깊은 타원형이어서 그 입, 특히 아랫입술은 답답해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널찍한 공간 가운데에 확실한 자기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 입은 궤도에 갇힌 천체만큼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하늘을 가득 품은 마그다의 눈, 눈머리가 거의 사각형인 그 눈은 순종적인 위성 같았다. 마그다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했다. - P102

그녀는 이글거리며 날아오르는 기류 속에서, 그녀의 두뇌 안쪽에 일종의 설형문자를 흘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빛의 부리로 글을 쓰고 있었다. 회상의 고단함이 피로를 몰고 왔고, 그녀는 멍하고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 P109

숄을 두른 전화기, 작고 음울한 침묵의 신, 오랫동안 혼수 상태에 있었던 그것이 이제 마그다처럼, 제 뜻대로 활기를 띠고 열심히 울어대고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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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해변에는 몸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폼페이의 사진. 화산재 속에 엎드린 모습. 그녀의 팬티는 모래 속에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토르소의 일부처럼 모래로 단단하게 싸여 있었다. 부서진 조각상, 몸통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인간의 사타구니, 영혼이 통째로 빠져나간 채 버려져 낯선 이들의 발길에 차이는 둔부. - P76

진정한 파쇄공, 팬티를 도난당한 여자, 자기 손으로 자기 가게를 살해한 여자라면 바닷속으로 정결하게 발을 들이는 방법을 알 것이다. 수평의 터널. 꼿꼿이 서서 들어가기만 해도 바다의 인력 속으로 빠질 수 있다. 밤바다는 얼마나 단순한가. 오직 모래만이 예측 불가능하다. 거기엔 백 개의 굴과 천 개의 매장지가 있다. - P76

로사가 말했다. "잃어버린 게 있어서 찾고 있었어요."
"딱한 루블린. 잃어버린 게 뭐요?"
"제 삶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 갑자기 창피하지 않게 느껴졌다. 사라진 속옷 때문에, 그 앞에 서자 자존감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퍼스키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얼마나 사소한 삶의 연속이었을까. 단추들, 그 자신이 단추 하나보다 더 의미 있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그녀를, 지금은 닳고 닳아 구식이 되어 플로리다로 굴러온 그 자신처럼, 또 하나의 단추로 취급한다는 건 분명했다. 마이애미 전체가 쓸모 없는 단추들을 위한 상자였다! - P87

"건드리지 말아요!"
"왜 그래요? 살아 있는 것이라도 들었나? 폭탄? 토끼? 으깨지는 건가? 아니, 알았다. 숙녀용 모자로군!" 로사는 그 상자를 껴안았다. 자신이 바보 같고 하찮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경박했다, 심지어 존재의 가장 깊은 속성마저도. 누군가 그녀의 생명 장기들을 잘라내 그녀에게 들고 있으라고 준 것 같았다. - P90

퍼스키는 골똘히 생각했다. "당신은 모든 것이 그 이전과 같기를 원하는 게로군."
"아니, 아니, 아니에요." 로사가 반박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저는 스텔라의 고양이 이야기를 믿지 않아요. 그 이전은 꿈이에요. 그 이후는 농담이고. 오직 진행 중인 것만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걸 삶이라 부르는 건 거짓말이에요."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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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릎으로 침대에 올라가 시트 주름 사이로 쓰러졌다. 꿈을 꾸는 꼭두각시 인형. 어두워진 도시들, 묘비들, 색 바랜 화환들, 회색 들판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 죄 없는 사람들을 몰아대는 짐승들, 입을 크게 벌린 채 두 팔을 뻗은 여자들, 그녀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이런 무자비한 장면들이 몇 시간 동안 지나가고 나니 늦은 오후였다. 이때쯤 그녀는 누가 그녀의 속옷을 슬쩍해 자기 주머니에 넣었든 간에, 그 사람은 온갖 비열한 행동을 하고도 남을 범죄자라고 확신했다. 굴욕. 수치심. 스텔라의 포르노그래피! - P71

거리에 나가자 네온색 황혼이 벌써 반짝이고 있었다. 열기와 느릿느릿 떠도는 먼지의 깔깔한 혼합물. 자동차들이 커다란 꿀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전조등을 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하늘의 낮은 곳에서는 낯선 두 램프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붉은 해, 핏발 선 달걀노른자만큼 둥글고 찬란한 해. 실크처럼 하얀 달, 산맥들로 회색의 줄무늬를 그려 보이는 달. 이 둘이 기다란 도로 양쪽 끝에 동시에 걸려 있었다. 하루 종일 불타오르던 열기는 움직이는 추처럼 보도에서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로사의 콧구멍과 폐는 신중했다. 타는 당밀 같은 공기. 그녀의 속옷은 도로 위에 없었다. - P72

마이애미에서는 밤이 되면 아무도 실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거리는 방랑자와 구경꾼으로 꽉 막힌다. 베두인 유목민처럼 다들 정해진 길 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바보 같은 플로리다의 비가 흩뿌리지만, 너무 가볍고 아주 잠깐이고 변덕스러워서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네온색 알파벳들, 디자인들, 그림들이 갑작스레 내리는 가는 비를 뚫고 기세 좋게 번쩍인다. 발코니가 있는 어느 호텔 위로 번개가 재빨리 날름거린다. 로사는 걸었다. 여기저기서 이디시어가 들려왔다. 이음쇠로 연결된 노부부의 캐러밴이 시원한 해변을 향해 구불구불 내려갔다. 모래는 쉬는 법이 없었다. 늘 파도에 휘저어졌고, 늘 사람에게 치인다. 네온 빛을 발하는 낮은 지평선 아래, 밤이면 담요 밑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졌다. - P73

그녀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만약 누군가 팬티 한 장을 숨기려 한다면, 처분하는 게 아니라 숨기려 한다면, 그 사람은 그걸 어디에 둘까? 모래 속이다. 돌돌 말아 파묻을 것이다. 그녀는 팬티 가랑이에서 느껴지는 모래의 무게는 어느 만큼일까 생각했다. 젖어서 무거운 모래, 종일 햇볕을 받아 아직 뜨거운 모래. 그녀의 방은 더웠다. 밤새도록 더웠다. 공기가 없었다. 플로리다에는 공기가 없었다. 식도 안으로 스며드는 이 시럽밖에는. 로사는 걸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보았지만, 그것들은 마치 날조된 것 같았고 상상 속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 P75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 보이는 높은 호텔의 지붕마다 무자비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건축가도 이런 이빨을 즐겁게 꿈꾸었을 리는 없으리라. 모래는 이제 겨우 식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 펼쳐진 하늘은 별 하나 없는 어둠을 숨 쉬고 있었다. 그녀의 뒤쪽, 호텔들이 그 도시를 꽉 물고 있는 곳에서는 갈색 도는 붉은 먼지의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진흙 구름.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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