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다시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특유의 부드럽고 끈질긴 비는 케이브 언덕의 그늘에 가려진 벨파스트만을 넘어오면서 점점 거세졌고, 도시 위에 자리를 잡더니 짙게 드리운 밤의 장막을 축축이 적셨다. 그녀는 비스킷과 치즈, 사과를 먹은 뒤 안경을 찾아 쓰고 도서관에서 빌린 캐나다 소설가 마조 드라 로슈 Mazo de la Roche의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난롯불에 맨발가락을 쬐며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기나긴 밤을 죄수처럼 기다렸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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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던 가에 있는 헨리 라이스 부인의 하숙집 식당에는 고인이 된 남편의 아버지가 사들인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한쪽 벽에는 단단한 마호가니 찬장이 붙어 있었는데, 대리석을 덧붙인 그 찬장 위에는 꽃이 그려진 과일 그릇과 빈 위스키병이 즐비했다. 같은 나무로 만든 커다란 타원형 식탁이 식당 중앙을 차지했고, 덕분에 양쪽으로 지나가기가 퍽 어려웠다. 식탁 곁에는 여덟 개의 높은 의자가 닻을 내리고 정박한 배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회색 건물과 어둑한 뒷마당을 지나 식당으로 내려앉은 햇빛이 좁은 창문 두 개를 반쯤 가린 얇고 바랜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빛은 찬장 너머로 나아가, 사냥꾼이 희미한 윤곽을 지닌 사슴을 향해 총을 들어 올린 모습이 담긴 금테 유화 액자를 가리켰다. 식당 문 옆에 있는 대형 괘종시계는 늙고 눈먼 개처럼 쉴 새 없이 째깍거리며 시간을 알렸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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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거울에 비친 평범한 여인이 고혹적인 미인으로 탈바꿈하는 즐거운 환상을 지켜보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추함은 뒤늦게 꽃피울 운명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청춘이라는 꼴사나운 미숙함에 가려져 있던 그 추함은 한창 젊을 때 못남의 싹을 틔웠고, 이제 40대 초반의 성숙함을 통해 서서히 꽃을 피우는 중이었으며, 그러면서 오직 쇠락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그윽하고도 화려한 결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 놀이를 하려는 열성마저 모조리 앗아가 버릴 그 마지막 순간을.
그래서 그녀는 그 놀이를, 거울 속의 여자를 더 열심히 즐겼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옆으로 잡아당겼고, 자신의 상상이 빚어 낸 얼굴을 그 치렁치렁한 숱으로 감쌌다. 집시 여인 같아. 마치 초콜릿 상자 위에 그려진 집시 여인이 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스스로의 애틋함에 취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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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관심을 둘 만한 얘깃거리를 가진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주디스는 늘 다른 이들이 따분함을 느끼는 일들 속에서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찾아냈다. 가끔은 그 재능이 선물처럼 느껴졌다.외로운 삶을 달래 주는 커다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선물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면 관심을 끌 만한 화젯거리를 늘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혼 여성들은 늘 육아나 쇼핑, 살림하는 얘기를 나눴다. 게다가 그들의 남편들도 귀가 솔깃해질 만한 얘기들을 들려줄 터였다. 하지만 미혼 여성은 처지가 달랐다. 사람들은 주디스가 집세나 생활비 등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야 했고, 그 내용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 주변에서 전해 들은 사람들, 거리에서 봤던 사람들, 신문이 나 잡지에서 읽은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한데 모은 다음, 그 뭉텅이를 마치 한 바구니 속에 담긴 실타래들처 럼 꼼꼼히 살펴야 했다. 그렇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골라내고, 다시 그걸 잘 다듬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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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뚱보는 분명 적어도 서른 살일걸. 주디스는 생각했다. 저 남자한테는 뭔가가 있어. 술고래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어쩌면, 몇몇 엄마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 같은 것.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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