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비탄과 공포가 다시 덮쳐왔다. 어스름이 지고 어두운 밤이 사위를 에워쌌다. 시커먼 산맥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내 기분은 더욱 침울해졌다. 온 사방이 광활하고 흐릿한 악의 소굴 같기만 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는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참담한 운명을 지닌 인간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 예언은 들어맞았다. 한 가지 정황이 틀렸을 뿐이다. 무수한 불행을 상상하고 두려워했지만 알고 보니 실제로 견뎌내야 할 운명은 백배 더 가혹했던 것이다. - P97

그녀의 무죄를 믿었다. 알고 있었다. 그 악마가, 내 동생을 죽인(그 사실은 단 1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놈이 심지어 소름 끼치는 놀이 삼아 이 죄 없는 이를 죽음과 치욕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내가 처한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중의 의견이, 그리고 재판관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내 불행한 희생자를 단죄하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움에 법정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피고의 고통도 나보다는 덜했다. 그녀는 결백의 힘으로 견디고 있었지만, 회한의 날카로운 이빨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으며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 P110

나는 감방 한구석으로 물러나 나를 사로잡은 소름 끼치는 고뇌를 감추려 했다. 절망! 누가 감히 절망을 논하는가? 다음날 삶과 죽음의 섬뜩한 경계선을 넘을 불쌍한 희생자도 나만큼 깊고 쓰라린 고뇌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박박 갈면서 영혼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 P114

진짜 살인자인 나는 가슴에 살아 있는 불사영생의 벌레를 안고 있었다. 이 벌레는 희망도 위로도 허락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도 흐느꼈고, 또한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결백한 불행이었고, 아름다운 달을 스쳐가는 구름처럼, 한동안 숨길 수 있을지언정 그 빛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고뇌와 절망이 내 심장의 핵까지 관통하고 말았다. 나는 마음속에 지옥을 품고 있었고, 그 무엇도 지옥 불을 끌 수 없었다. - P115

아버지는 성품과 습관이 눈에 띄게 달라진 나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시다가 엄청난 슬픔 앞에 무너지는 나의 어리석음을 분별 있게 타일렀다. "빅토르, 아비도 괴롭다는 생각을 넌 하지 않느냐? 누구도 내가 네 동생을 사랑한 만큼 자식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말을 하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슬픔을 과하게 드러낸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큰 불행을 느낄 터인데 그걸 막는 것도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느냐? 또한 너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지나친 슬픔은 발전도 즐거움도 가로막고 심지어 일상생활까지 방해해서,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버린단 말이다."
이 충고는 선의에서 우러나왔으나 내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여타의 감정에 쓰디쓴 회한이 뒤섞이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앞장서서 비탄을 감추고 식구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절망스러운 얼굴로 답하고, 최대한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 P120

소나무들은 키가 크거나 풍성하 지는 않았지만 어둡고 진중하여 엄혹한 풍광을 두드러지게 했다. 저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광막한 안개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에서 피어나 맞은편 산들을 두터운 화환처럼 휘감고 산봉우리들을 모두 짙은 구름에 숨기고 있는데, 어두운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서, 주위를 에워싼 풍광에 우수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의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 - P129

우리는 쉰다. 꿈은 잠의 독을 푸는 힘을 지녔다.
우리는 일어난다. 방황하는 생각 하나에 하루가 오염된다.
우리는 느끼고, 사고하고, 추론한다. 웃거나 흐느낀다.
어리석은 괴로움을 껴안거나, 근심을 쫓아버린다.
똑같다.기쁨이든 슬픔이든, 내 떠나는 길은 여전히 자유로우니.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

* 퍼시 비시 셸리의 「무상에 관하여」의 후반부에서 인용 - P129

나는 후미진 암벽에 머무르며, 이 기적과 같은 압도적인 풍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다, 아니 광막한 얼음의 강은 산 사이로 굽이치며 흘렀고, 꿈처럼 몽롱한 산봉우리들이 후미진 강가 구석구석을 굽어보며 드높이 떠 있었다. 얼음이 반짝거리는 산꼭대기 들이 구름 위에서 햇빛을 받아 빛났다. 슬픔에 가득찼던 내 심장은 이제 환희 비슷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다. "방황하는 정령들이여, 진정 비좁은 잠자리에서 쉬지 않고 이 세상을 헤매고 있다면, 내게 이 희미한 행복만은 허락해주시오. 아니면 차라리 삶이라는 기쁨에서 나를 데려가 길동무로 삼아주시오." - P130

"악마!" 나는 외쳤다. "감히 내게 다가오겠다는 말이냐? 이 팔이 그 흉측한 머리에 가할 맹렬한 복수의 일격이 두렵지도 않으냐? 어서 꺼져, 이 더러운 벌레! 아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 발길에 짓밟혀 먼지가 되어버려! 아, 네 비참한 목숨을 끝내버리고 네놈이 그토록 사악하게 살해해버린 희생자들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악마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흉물을 저주하지. 그러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물보다 비참한 나를 얼마나 증오하겠는가! 하지만 당신, 내 창조자인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내치다니. 나는 네 피조물이고,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내 조건에 동의한다면 나도 인간들과 당신을 평화롭게 내버려두겠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살아남은 당신 친구들의 피로 배부를 때까지 죽음의 밥통을 채울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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