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빌려보면 주사를 ‘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주사‘의 용례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하다. 나에게 있어 ‘주사‘란, 그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얼토당토않은‘ 영향을 끼치는 걸 뜻한다. - P42
나는 주사가 두렵다. 다른 사람이 부려놓는 주사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편이 훨씬 낫다. 생물학적인 만취가 불러오는 여러 결과 중에 주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고려하면, 주사는 싫든 좋든 술꾼을 이루는 필연적 구성 요소겠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내가 정해놓은 주사의 경계 안에서만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다. 어쩌면 마음껏 흐트러 지고 싶어서 경계를 정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뚜렷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중력의 영향권 안에서 허공을 날 때는 자유롭지만, 무중력 상태가 되면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한 채 단지 허공에 떠 있을 뿐인 것처럼. - P44
만취한 사람들이 세상의 이상한 일들에 보이는 이 넉넉한 관용은 본인이 이미 이상한 인간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P55
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없게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넬 때도 많았다. 나는 너에게 병도 줬지만 약도 줬으니, 힘내. 힘들겠지만 어쨌든 알아서, 힘내. 세상에 "힘내"라는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 P60
어쩐지 나는 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장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힘내라는 말과 그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 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닥에라도 굴러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필요한 순간 주워 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언젠가 힘을 내야만 하니까. 살아가려면. - P61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면서 추운 날에 마시는 독한 보드카 한 모금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마침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한 모금 넘기면 목에서부터 몸속까지 타는 듯이 뜨거운 길을 내며 내려오다가 사라지는 보드카와 불타면서 떨어져 내리다가 사라지는 유성은 그 속도마저도 비슷한 것 같았다. 황홀감이 밀려드는 속도도. - P66
써 온 글에, 타인의 글을 읽어내는 방식에, 자주 쓰는 표현에, 좋아하는 문장에, 사람들의 성향과 성격이 지문처럼 묻어났다. 지나치게 진한 지문은 때때로 버거웠고, 너무 진하게 찍혔을까 봐 슬쩍 뭉개놓은 지문은 의뭉스러워 보여 신뢰가 안 갔는데 그는 항상 알맞은 진하기의 지문을 가장 익살스러운 각도로 찍어놓는 사람이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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