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더미 위쪽 회벽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 드리워진, 방금 밑동 아래 아마를 묻은 나무의 그림자다. 여러 사람의 팔처럼 소리 없이 흔들리는 그 형상을 바라보다가. 인선이 마지막 영화에서 스스로를 인터뷰했던 배경이 이 벽이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햇빛 드는 회벽에 일렁이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거의 흡사했다. 인선이 그 영화를 만든 것은 이곳으로 내려와 살기 전이었으니 당시 건물은 아직 창고였을 거다. 인선의 어깨와 무릎, 희끄무레한 목선의 굴곡은 마치 잘못 끼어든 피사체처럼 화면 가장자리에 있었고,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벽 위로 저 그림자가 계속해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긴장을 느끼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인터뷰이가 방금 뱉은 말을 부인하며 내는 팔 같은, 힘껏 내밀었다가 돌연히 거두는 손길 같은 일렁임이 인터뷰의 흐름에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넣었다. - P156
어떵할 수가 이시냐. 억지로 끄성 올 방법이 어디 이시냐. 아이를 살려사주. 이 아이가 무신 죄가 이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0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야! 아이처럼 만세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든 인선을 향해 나도 웃으며 말을 놓았다.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 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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