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후인지
알 수 있다면
편할 테지만.


호박
하나조차도…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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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이야기는 복수의 헛됨에 대한 명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리학에서 가장 빼도 박도 못할 법칙인 질량보존의 법칙―질량은 결코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을 가장 잔인하게 묘사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 P124

1924년에 《사이언스》에 발표한 〈과학과 사이어소피>라는 글에서 그는 16세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 P125

오만에 대한, 마술적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 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 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 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 P125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약이 "신경계가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몸이 차가울 때도 따뜻하게 느끼도록 하고, 아무 근거 없이 기분 좋아지게 하며, 인격 수양의 핵심을 차지하는 제한과 자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게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은 자기 발전에 대한 저주라는 것이다. 자신을 정체시키고 자기 발달을 저해하고 도덕적으로 미숙하게 만드는 길이자 멍청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 P126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 P126

"행복은 행하고, 돕고, 일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정복하고, 실제로 실행하고, 스스로 활동하는 데서 온다." 내 생각에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려는 요점 같다.
여정을 즐기고 작은 것들을 음미하라고 말이다. 복숭아의 "감미로운" 맛, 열대어의 "호화로운" 색깔, "전사가 느끼는 준엄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운동 후 쇄도하는 쾌감 등. - P127

그는 "당신이 밟고선 그 땅뙈기가 이 세상에서, 아니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라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인용한 뒤, 분발을 요구하는 ‘카르페 디엠‘의 구호를 외치며 독자들을 배웅한다.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은 없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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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초리엔 늘 눈물자국이 말라붙어있다. 어깨 통증은 사라진 것 같다. 손가락을 벌려 이마까지 덮인 뻣뻣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잠깐 옆으로 젖혀지는 듯하더니 다시 눈 위를 덮어버린다. 꼭 새 책을 펼칠 때처럼. - P9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켜자 발바닥이 침대난간에 닿는다. 마치 줄타기 곡예사가 된 듯한 기분이다. 어젯밤에벗어 던진 옷들이 정강이 부근에 걸쳐 있다. 납작하게눌린 옷의 한쪽 구석에만 온기가 남아 있다. 구두끈 끝쪽의 플라스틱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 P10

그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환히 빛나는 아침이면 황금빛 햇살이 방 한가운데까지 쏟아져 들어오고, 그 위를 파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방바닥에 무수한 선을 그린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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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연극의 감독이라면 무대 디자이너에게 조금 살살 하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나라면 이 지점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신성이 훼손되고, 꿈이 박살 났으며, 수십 년 동안 끈기 있게 해온 일이 헛수고로 돌아갔다면, 나라면 지하실로 내려가 패배를 인정했을 것이다. - P113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데이비드의 동료 두 사람은 고무 덧신을 신고서 물고기들의 살덩이를 향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굴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창밖에는 그들의 선지자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희부옇게 드리워 있으며, 이 난장판을 어떻게 다시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가운 물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적어도 당장은 이것들을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 P114

머나먼 곳에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에탄올을 보내달라는 황급한 메시지를 보냈다. 낮이나 밤이나. 그는 학생들에게 잔디밭에 나와 자도 된다고 허락했다. 많은 학생들이 이제 벽을, 주거시설을 두려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낮이나 밤이나. 친구들과 동료들이 땅속에 묻혔다. 먼지에서 먼지로 먼지는 임시 휴전에 들어간듯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것 같더니 다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떠올라 진드기와 푸트레신과 세균들을 품고 데이비드의 연구실 창들을 통해 안으로 몰려들어, 되돌릴 수 없는 부패의 과정을 개시하겠다고 위협을 가해왔다. - P115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렸다. 이토록 억눌리지 않는 불굴의 끈기는 어쩌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그건 미친 짓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선에 대한 믿음을, 별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가슴속에는 존재하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조용히 실행에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신뢰 비슷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 차가운 물이 흩뿌려지는 빛 속에서, 48시간 이상 틀어놓은수도꼭지는 누가 봐도 위풍당당해 보였다. - P115

데이비드는 바늘에 실을 꿴 다음 바늘 끝을 파나마 망둥이의 목살에 찔러 넣어 반대쪽으로 뽑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표를 망둥이의 살갗에 곧바로 매달았을 것이고, 그렇게 망둥이는 짠 하고 다시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려졌을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 P118

나는 점점 더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곱슬머리 남자가 나를 떠난 지 3년이 되었고, 세계는 계속 침묵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어느 결혼식장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포옹을 했고그의 계피 향기가 소나기처럼 내게 훅 끼쳐왔다. 그게 다였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모든 게 다 복구될 거라는, 우리의 사랑은 나의 배신에도, 떨어져 있는 몇 년,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낸 몇 년 세월에도 버틸 만큼 충분히 강할 거라는 희망을 말이다. 무언가에 대한 믿음, 말과 행동을 초월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비록그 믿음이 의심이라는 나방에게 갉아먹힌 믿음이라 해도. - P118

샬러츠빌에 있는 내 아파트에는 커피 컵들이 불룩하게 쌓여갔다. 모든 컵이 처음에는 따뜻했고 희망으로 가득했다. 나를 이
엉망인 상태에서 빼내줄 소설에, 연애편지에, 만트라에 쓸 딱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매일 하루가 끝날 때면 커피 컵은 그을음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너무 무거워서들 수도 없었다. 머그컵들이 창틀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내가 논문을 다 썼을 무렵, 노란 벽의 다락방 같은 내 아파트는 퀭한 흙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 까끌까끌한 보도를 따라 걸었다. 나는 폴짝 뛰었다. 내가 되고싶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둥이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우주적 정의가 실행되는 대상이 아니라, 고향에 행복한 가정이 있는 사람이.
그러나 헤더가 남자친구와 시내로 외출한 밤, 도시의 자주색 불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내 인생에 생긴 공백을, 내가 품은 희망의 빛이 나를 더 따뜻이 데워줄수록 점점 더 넓어지고 차가워지기만 하는 그 공백을 말이다.
그래서였다.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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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에 닫는 그 달콤한 꿀, 전능함에 대한 환상, 그 사랑스러운 질서의 감각. 이름이란 얼마나 좋은 위안인가. - P89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 P93

메릭스는 자기 말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잘 안다고 말했다. 만약 당신이 비행기에서 그를 만난다면 그는 자기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놀림당하기 쉬운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것이 정신 나간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요지는 단순하다. 인간의 정신이 세상을 조각해내는 일을 늘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만물에 붙인 이름들은 잘못된 것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노예"는 인간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유를 누릴 가치도 없는 존재였던가? "마녀"는 화형을 당하는 게 마땅한 존재들이었나? 그가 의자를 예로 든 의도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것,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 삶 속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생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P94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 P96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 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그 종을 물리적으로 대표할 새로운 표본이 선택될 테지만, 이 표본은 "신모식neotype"이라는더 낮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모식 표본은 최초의 완모식 표본이 상실되었거나 파괴된 후에 그 종을 대표하는 표본 역할을 하도록 선택된 표본을 말한다. - P96

과연 여기에 어떤 단어들이 어울릴까?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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