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고 게레와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광재 더미는 저녁이면 지는 해와 게레 사이에서 흙바닥부터 담벼락까지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려, 그를 속박했다. 매일 저녁 그림자는 벽을 넘어 그가 내다보는 창문에까지 이를 것 같았고, 게레에게는 그런 착시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퇴근하려면 그것과 다른 두 개의 광재 더미 앞을 지나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레는 쓸쓸하기는 해도 그림자를 지나지 않아도 되는 몇 달간의 겨울을 좋아했다. - P9

낮 동안엔 비가 내렸다. 젖은 벽돌과 철골이 햇빛에 반짝이는 거리를 그는 빠른 걸음으로, 평소 자신이 ‘유능한 사람‘의 걸음걸이라고 생각해온 속도로 걸었다. 사실 빨리 걷는다는 것은 그에게서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지, 손을 어디에다 둘 것인지 선택할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행동이었다. 빨리 걷기란 천천히 걷는 사람이 겪는 끔찍스러운 자유를 제거하는 것이자, 그에게서 그 자신을, 사춘기 이후부터 줄곧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거대한 몸뚱이라는 짐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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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병을 만들어 내고 있어.

베랑제
그건 선의에서 그런 거지. 환자를 돌보는 기쁨 때문에 말이야.


그들은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어, 새로운 병을 만들어 낸다고.

베랑제
그래, 어쩌면 새로운 병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병을 고치는 것도 의사들 아닌가.


난, 오직 수의사들만 믿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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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은 「나의서재 공개」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낡은 세계를 새로이 하는 것. 이것은 새로운 사물을 얻는 일에 자극받은 수집가가 가장 깊이 느끼는 욕망이다." - P45

오늘날의 독자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가상세계, 즉 검색 알고리즘에 따라 나타나는엄청난 정보와 텍스트의 네트워크에서 우리를 미로 속 환영처럼 헤매게 만드는 거만한 인터넷에 대한 예언적 알레고리이다. - P49

우리가 웹이라고 부르는 전자 네트워크는 도서관의 기능을 복제한 것이다. 인터넷이 만들어진 근원에는 세계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하려는 꿈이 담겨 있었다. - P49

그는 도서관의 구조를 모방해 모든 자료에 주소를 부여하고 다른 컴퓨터로부터의 접근을 허용했다. URL은 도서관의 등록번호처럼 작동한다. 이후 버너스리는 우리가 http로 알고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이동 프로토콜을 고안했다. http는 우리가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으려고 사서에게 써내는 요청서에 해당한다. 도서관이 광대하게 증강되어 방사된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들어가는 경험은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을 경험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놀라움과 방대한 공간이 주는 아찔함.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내려서 서둘러 책의저장고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자, 도서관 현관에서부터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풍요로움에 아찔함을 느끼는 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이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든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토록 많은 정보는, 이토록 많은 지식은, 공포와 삶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는이토록 많은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 P49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엄청난 진보였다. 수세기에 걸쳐 돌과 흙과 나무와 금속을 이용해 쓰여오던 언어가 마침내 제대로 된 재료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책은 언어가 수생식물의 줄기에 자리를 틀면서 탄생했다. 무겁고 경직된 과거의 재료에 비해 책은 처음부터 가볍고 유연하여 여행과 모험에도 적합했다. 펜과 잉크로 쓰인긴 텍스트를 품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장차 건설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도착할 책의 단면이었다. - P53

모두가 알렉산드로스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환영을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세계적인 제국을 파괴하고, 가까운 친인척을 하나씩 제거하고, 그들을 뭉치게 했던 충성심을 배신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사랑에 관하여 오스카 와일드는 「레딩 감옥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한 것을 죽인다" - P54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묘에서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그에게 프톨레마이오스의 묘도 보고 싶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가 "나는 죽은 자를 보러 온 게아니라 왕을 보러 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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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르
난, 신문 기자들을 믿지 않아. 그들 모두가 거짓말쟁이라고. 난 내 나름으로 세상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학교 선생 출신으로서 말이야.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 명확한 것만 믿는다고. 그럼, 아무쪼록 명확하고 합리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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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언제 발명되었을까? 책이 널리 전파하려는, 혹은 책을 없애려는 비밀스러운 노력의 역사는 무엇일까? 그 길에서 사라진 것들과 구원받은 것들은 무엇인가? 그중 몇몇은 어떻게 고전이 되었는가? 시간의 이빨, 불의 손톱, 물의 독이 얼마나 많은 책을 앗아갔는가? 얼마나 많은 책이 분노로 인해 불탔으며 어떤 책이 열정적으로 필사되었는가? 그것들은 동일한 책이었을까? - P17

프로도와 샘, 두 호빗이 모르도르의 험한 산에 있는 키리스 웅골의 계단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예기치 못한 자신들의 모험 이야기를 한다. J. R. R. 톨킨이 쓴 반지의제왕 2부인 두개의 탑 마지막 부분에 일어나는 일이다. 샘 와이즈가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일은 맛있는 음식과 위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우리가 노래나 전설에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가 거기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불 옆에서 들려줄 수도 있고 책으로 읽어줄 수도 있겠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예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얘기야!‘" - P39

그것이 알렉산드로스의 꿈이었다. 자신의 전설을 갖는 것. 기억에영원히 남을 수 있게 책에 기록되는 것. 그는 그렇게 했다. 그의 짧은 생은 동서양에서 신화로 남았다. 코란과 성서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남아 있다. 그가 죽은 뒤 수 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의 환상적인 여행과 모험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며 그리스어로 쓰였다가 나중에는 라틴어와 시리아어를 비롯해 1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소설 「알렉산드로스」로 알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현재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 이야기를 종교서를 제외하면 전근대 시대에 가장 많이 읽힌 작품으로 간주한다. - P40

로마 시대의 어느 여행자이자 지리학자는, 알렉산드로스에 관해 쓰는 사람들은 늘 진실보다는 경이로움을 선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 P40

"지구는 나의 것이다."였다.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는 일은 세상을 소유하는 또 다른 상징적, 정신적, 평화적 형식이었다. - P45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를 가든 아시아를 가든 늘 일리아스』를 가지고 다니면서 조언와 통찰력을 구했다. 독서는 마치 나침반처럼 그에게 미지의 길을 열어주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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